취향,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

연말을 맞아 정리하는 근래 내가 배운 것에 대한 이야기

by 콩지수
나는 소위 말하는 '패션 고자'였다.


주로 입는 옷이 다 회색이어서 별명은 '스님'이었고, 옷장에 내가 산 옷은 한 벌이 있을까 말까 했다. 나머지는 다 얻어온 옷, 언니가 입던 옷, 언니가 사준 옷, 누가 사준 옷... 어렸을 때는 내 주관과 스타일이 꽤 뚜렷했는데 크면서는 남들이 입은 옷이 예뻐 보였다. 언니 옷이나 친구 옷.

옷을 고르는 게 어렵기도 했지만 사실 더 큰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아무도 나에게 요구하지 않았음에도 혼자 절약정신(?)이 투철했던 나는, 중학생 때 모 온라인 마켓에서 9,900원짜리 남방 두 개를 혼자 구매해 본 후 9,900원이 넘어가면 다 비싸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엄마 말로는 백화점을 데려가면 나는 행사 매대에서만 옷을 골랐다고...) 부모님께 뭐 사달라는 얘기를 안 하는 편이기도 했지만, 언니나 친구한테 빌려 입는 걸로 대리만족했다. '내 옷'에 대한 욕심은 없었으니까.


지금 생각하면 그런 나에게 교복은 아주 좋은 옷이었다. 남들 다 똑같이 입는 거니까 고민거리가 확 줄었다. 수선을 해서 핏을 바꾸거나 겉옷, 가방 등으로 포인트를 주는 것만으로 만족스러웠다. 그러다 대학생이 됐을 때는 처음으로 여자만 있는 공간에서 생활하게 되어 '개이득!'을 외치며 꾸밈 제로의 상태로 다녔다.

학교가 아닌 곳에 갈 때는 나름 꾸민다고 꾸민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하면 뭘 입었었는지, 입을 만한 게 있긴 했는지 기억도 안 난다. 다만 기억나는 옷이 고등학생 때부터 입던 남색 저지(=언니 옷), 내 몸 두 배만 한 검정 바람막이(=언니 옷) 밖에 없으니... 설명은 다 했다고 본다.

연애를 하면서도 뭔가 꾸민다고 꾸민 것 같은데, 딱히 기억 안 나는 걸 보니까 그때도 특별히 다르다고 할 만한 건 없었던 것 같다. 심지어 남편도 내가 기억하는 위의 옷 두 개만 기억하고 있는 듯하다.




아무튼 올해 초까지만 해도 큰 변화는 없었는데, 돌이켜보면 작은 계기들이 있었던 것 같다.

결혼하고 맞이한 첫 생일에 시부모님이 100만원이라는 큰돈을 주셨다. 막상 목돈이 생기니 뭘 사야 할지 몰라 한참 인터넷을 뒤적거렸는데, 대충 뭐였냐면 성분이 착한 샴푸, 바디로션... 뭐 그런 거였다. 쓰고 싶은데 비싸(다고 느껴져)서 못 사던 것들.

더 웃긴 건 결국 100만원으로 처음 구매한 물건이 뭐냐, 바로 정수필터였다. 주방용, 화장실용 정수필터와 수전. 다 하면 7~8만원 정도 되는데 비싼 거 같아 안 사고 있던 거였다. 그걸 사고도 돈이 많이 남았다는 게 기뻤다. 정말 갖고 싶었으니까, 정수필터.

그러고 나서는 옷을 사긴 사야 할 것 같아서 언니를 졸라 쇼핑을 하러 갔다. 여전히 나는 뭘 사면 좋을지 몰라 언니가 골라준 것들을 입어보고, 내가 보고 예쁘다 싶은 건 언니의 허락(?)을 받고 입어봤다. 몇 벌 안 샀는데도 가을 겨울옷이라고 엄청 비쌌다. 40만원 정도 썼나.

돈에 대한 강박(=옷은 비싸!)은 더 견고해졌지만 하나 알게 된 것이 있었다. 돈 걱정을 덜 하고 옷을 사니까, 좋았다. 나는 내가 옷에 진짜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옷을 사니까 좋았다. 나는 옷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두 번째 계기는 우울증이었다. 올해 초는 이런저런 이유로 유난히 우울했는데, 병원의 진단을 받은 건 아니지만 친구가 나랑 얘기를 나누다가 그런 것 같다며 얘기를 해주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만 있었지만 우울증이라는 확신은 없었는데, 그 얘기를 들으니 내가 거실 한복판에 서서 2시간이 넘도록 입술을 뜯던 모습이 떠올랐다. 앉아있지도 누워있지도 않았고, 서서, 핸드폰을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입술이 매끄러워질 때까지 거스러미를, 피가 나도 휴지로 닦아가며 뜯었다. 그러면서도 '나 뭔가 이상한데?' 하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남의 입으로 '우울증'인 것 같다는 말을 들으니 그제야 실감이 났다.

그러면서 친구는 나에게, 나 자신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 자신을 위한 것들을 해보라고 했다. 그래야 할 것 같아 운동도 시작하고 면허도 따고 하면서 조금씩 나아졌다.

그런 과정을 겪던 어느 날 집에 있다가 주변을 둘러봤는데, 정확히 '내 취향'이라고 할 만한 물건이 하나도 없는데 그게 좀 이상하게 느껴졌다. 28년이나 살았는데 '내 취향' 물건이 하나도 없다니,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졌을 때 나를 정확히 설명해 줄 물건이 없는 것 같은 느낌. 그러면 서른이 되기 전에, '내 취향'의 물건들을 사보자고 마음먹었다. 내가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나를 위한 일 중 하나로.


그렇게 처음 아이폰에 입문했다. 전에 쓰던 폰은 폰으로서 충분한 역할을 해주긴 했지만 애정을 쏟기에 충분하지는 않았다. 수리비가 비싸니까 고장 나거나 파손될까 봐 걱정했을 뿐. 케이스도 핸드폰 샀을 때 주는 실리콘 케이스 그대로 2년을 썼다.

그러다 연말에 부모님 모시고 유럽에 가기로 계획을 세웠고, 예쁜 사진을 많이 남겨드리고 싶어 마침 출시되었던 아이폰 신모델을 샀다. 애플 제품을 쓰는 사람들을 딱히 비난하지도 않았지만 이해되지도 않았고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았던 나였는데. 어찌어찌 내 돈을 들이지 않고 구매하게 됐는데, 아마 그게 아니었다면 이런 도전은 못 하고, 안 했겠지- 지금도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부모님 인생샷을 엄청나게 건졌고,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 10가지 중 하나로 등극했다. 이때 깨달은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내가 생각보다, 그러니까 나 스스로가 알고 있던 것보다 더 많이 지출을 자제한다는 것. 다른 하나는 좋아하면 핸드폰을 곱게 쓸 수 있다는 것. 마지막으로, 해봐야 내가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관심이 없는지 알 수 있다는 것.




그때부터 야금야금 혼자 힘으로 옷을 사기 시작했다. 조언 구하기는 구매 후 랜선으로만. 결제 버튼을 누르는 건 온전히 나의 판단이었다. 사실 모 브랜드가 이제 없어지면서 정리 세일을 한다길래 호기심에 눌러본 거였는데, 평이 좋은 옷을 저렴한 가격에 팔길래 몇 개를 용기 내 구매해봤다.

결과는 꽤나 만족스러웠다. 처음 입어보는 스타일인데도 생각보다 잘 어울렸고 예뻤다. 내가 가장 신뢰하는 패션 조언자인 언니도 합격점을 줬다. 뿌듯했다. 혼자서 옷을 산다는 건 나한테 엄청난 모험이었다. (심지어 온라인이라니! 입어보지도 않았는데!) 그런데 그 모험이 즐거웠고 결과도 좋았다. 자신감이 생겼고,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뭐가 어울리는지도 조금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이 시점의 나만큼 대범해지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다. 절약정신을 극복(?)하는 게 생각보다 어려웠다. 나는 습관처럼 세일 품목을 뒤적거렸고, 조금이라도 비싸다 싶으면 뒤로가기를 눌렀다.

그러기를 여러 번, 친구의 말이 생각났다. 내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 나를 위한 일. 거기에 중점을 두니 훨씬 다양한 게 눈에 들어왔다. 금액과 상관없이 다양한 옷을 보는 재미도 있었고, 찜목록이나 장바구니에 넣을 정도로 마음의 여유가 생기니 취향이 가시화됐다. 배송비가 너무 아까워 온라인으로 옷을 안 샀었는데... 매장에 가서 한참 뒤적거리고 입어보고 커피도 마시고 버스도 타고 하는 걸 대신한다고 생각하며 털어냈다. 아, 마음가짐이 다르면 같은 것도 새롭게 보이는구나- 깨달았다.

물론 지금도 가격을 보면 주눅이 들고, 세일 상품 구경할 때가 훨씬 마음이 편하다. 뭐가 안 맞아 반품이라도 하게 되면 흠- 하게 된다. 아마 앞으로도 꽤 오랜 기간 그러겠지.


그럼에도 행복하다. 써놓고 나니까, 무슨 옷 사게 된 얘기를 이렇게 장황하게 했나 싶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기록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나에게 의미 있는, 큰 변화였어서. 행복한 변화였어서. 기록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전보다 돈을 더 많이 쓰지만, 이전보다 더 행복하다.


아이폰을 사고 옷을 많이 사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소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서.
도움 없이도 원하는 것을 고를 수 있고,
옷으로도 나를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서.


그리고 이런 변화의 경험을 통해서 '옷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서. 나에겐 그게 옷이었고, 아이폰이었지만, 누군가에게는 다른 무엇이겠지. 어쨌든 이 장황하고 개인적인 글을 읽은 여러분 중 아직 본인의 취향을 찾지 못한 분이 있다면 이 기록이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자신을 더 사랑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며. 기록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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