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코, 입이 없는 얼굴 전체에 숫자 42가 쓰여진 사람이 영어 대문자 'B'가 쓰여진 야구모자를 쓰고 있다. ⓒ작가 김소하
얼마 전 기아 타이거즈가 2024 KBO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을 거머쥐었다. 삼성 라이온즈 팬으로서 매우 아쉽지만, 영원한 1등이 없다는 것도 야구의 묘미이니 어쩔 수 없다.
올해도 외국인 선수들의 활약이 눈에 띄었는데, 한국 야구에서 외국인 용병 선수가 등장한 것은 1998년이다. 바로 현대 유니콘스의 조스트롱 선수이다. 한국 문화에 빠르게 적응하여 수많은 팬에게 관심을 받았는데, 적응을 위해 억지로 순대국밥을 먹은 것은 일화로 널리 알려져 있다. 초반에 좋은 모습을 보였으나 전반적으로는 그렇지 못해 한 시즌 만에 떠난다. 시즌을 떠났지만, 포기하지 않고 도전한 결과 36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짐 모리스와 함께 미국 메이저리그에 데뷔한다.
“그렇다면 메이저리그에도 피부색이 다른 최초의 선수가 있지 않을까?”라는 궁금증이 생겨서 한 번 찾아보았다. 1947년 4월 15일 흑인 최초로 2루수로 선발 출전한 재키 로빈슨이라는 흑인 선수가 있었다.
당시 미국 사회에는 인종차별이 만연해 있었다. ‘분리하되 평등하게’라는 원칙에 따라 대중교통, 화장실, 학교 등에서 흑인에 대한 분리 정책을 시행했다. 흑인에 대한 린치도 공공연히 이루어졌으며 참정권도 무력화되어 있었다. 흑인들의 참정권이 제대로 인정받은 건 마틴 루서 킹 목사 등이 주도한 흑인 인권운동이 결실을 본 1965년 이후였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메이저리그에 등장한 재키 로빈슨은 큰 충격을 주었다.
그의 형 맥 로빈슨은 1936년 베를린 하계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딸 정도로 뛰어난 운동 능력을 갖추고 있었고, 그의 동생 재키 로빈슨도 야구, 미식축구, 농구, 육상, 테니스와 같은 다양한 종목에서 선수로 활약하며 우승했다. 하지만 인종차별이 가득한 사회 환경 속에서 그의 재능은 크게 빛을 발하지 못한다.
그러던 중 그의 재능을 알아본 프로야구 구단 관계자의 눈에 띄어 흑인들로만 이루어진 니그로리그 팀에 영입된다. 그곳에서 경험을 쌓다가 현재 LA다저스의 전신인 브루클린 다저스 단장, 브렌치 리키와 운명적으로 만난다. 그때 브렌치 리키는 재키 로빈슨에게 피부색과 인종을 이유로 부당한 일을 당해도 참을 수 있을지 물었다. 험난한 생활이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것을 감내하기로 마음먹은 로빈슨은 계약을 체결한다.
다저스에 입단한 로빈슨은 마이너리그 생활을 거쳐 1947년 4월 15일 메이저리그에 데뷔한다. 하지만 관중, 자기팀·상대팀 선수들, 심판 가릴 것 없이 모두 흑인 선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심지어 흑인 선수가 소속되어 있는 팀과의 경기는 거부하겠다는 움직임도 생겨났다. 역사적인 데뷔였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심판들은 차별적 판정을 하고, 상대 투수들은 고의로 몸을 맞히는 공을 던졌다. 수비 시 슬라이딩으로 그의 발목을 다치게 했고, 주자로 나갔을 때는 발길질 당하기 일쑤였다. 그래도 그는 굴하지 않고 끝까지 경기에 집중했다.
1947년 5월 14일 브루클린 다저스가 신시내티 레즈와의 원정 경기를 치르는 날 역사적인 장면이 있었다. 경기장이 있는 지역은 인종차별이 심하기로 이름난 곳이었는데 그가 경기장에 등장하자마자 야유를 퍼부으며, 흑인을 비하하는 구호를 큰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 같은 팀의 백인 선수 피 위 리즈가 재키 로빈슨과 어깨동무를 해버렸다. 일 순간 경기장이 고요해졌다. 이는 메이저리그에서 인종차별보다 중요한 것은 동료라는 메시지를 던졌다. 그의 행동은 다른 팀 동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어깨동무 한 번으로 흑인 차별이 사라질 리 만무했다. 로빈슨은 항상 살해 협박과 위협에 시달렸고, 그가 경기에 나서는 것 자체를 저주하는 백인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의 동료들은 로빈슨을 조건 없이 지지했다. 모든 선수가 로빈슨의 등번호 42번을 달고 나오면 누군지 모르지 않겠냐며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그만큼 로빈슨과 함께하고 있음을 상징하는 말이었다. 이 말은 훗날 메이저리그 중요한 행사의 씨앗이 된다. 이러한 환경에서 그는 뛰어난 선수로 활약했고 흑인 선수들에 대한 차별적 시선을 변화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다. 그의 데뷔 이후 많은 흑인 선수들이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28세라는 늦은 나이에 데뷔한 탓에 짧은 선수 생활을 했지만, 여러 차례 올스타와 MVP에 선정된다. 아울러 흑인 선수 최초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데, 이는 메이저리그 선수에게 가장 큰 영예이다. 1957년 은퇴한 뒤, 사회 여러 부분에서 흑인 인권 증진을 위해 활동하다가 1972년 10월 24일 세상을 떠났다.
1947년 4월 15일 재키 로빈슨의 첫 번째 경기는 미국 안에 팽배했던 인종차별에 균열을 내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그가 첫 번째 경기에 나선 지 50주년이 되는 1997년 4월 15일을 ‘재키 로빈슨 데이’로 정하고 그의 등번호 42번은 이후 메이저리그 전 구단 공통 영구 결번이 된다. 이후 2009년부터 재키 로빈슨 데이가 되면 경기장에 나서는 선수, 코치, 심판들은 등번호 42번을 달고 그를 기억한다. 모든 선수가 재키 로빈슨의 등번호 42번을 달고 나오면 누가 누군지 모르지 않겠냐는 농담이 실현된 것이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걸어갔기에 재키 로빈슨은 차별과 혐오를 정면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꿋꿋이 자신의 길을 갔고 동료들과 함께 연대하며 마운드에서 흑인 차별에 저항했다. 그의 첫 번째 발걸음은 다양한 피부색과 인종을 가진 사람들이 메이저리그 선수가 될 수 있도록 길을 내었다.
재키 로빈슨과 피 위 리즈 선수의 따뜻한 어깨동무처럼 이 글을 보는 독자들도 혐오와 차별에 시달리는 동료 시민들을 지지하고 함께 연대해 주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