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최후의 밤은 길다
호흡이 긴 영화다. 영화는 느리다 못해 자칫 잘못하단 지루해 보일 수도 있는 롱테이크가 주를 이룬다. 주인공이 사과 하나를 다 먹기까지, 의문의 소년과 탁구 시합을 다 나누기까지. 영화 속 배우들의 시간과 보는 관객의 체감 시간은 동등하다. 그래서 어느새 빠져든다. 빠른 컷 전환과 시간을 요약하는 컷을 지양함으로써 현실감을 더했다. 1분 동안 지속된다던 폭죽은 8분가량은 원 쇼트 롱테이크가 끝나도 여전히 빛나고 있다. 컷을 끊지 않았기 때문에 관객은 이것을 환상이라 믿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롱테이크의 방식은 관객이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닌 직접 카메라의 시점으로 이 상황을 ‘관찰’하는 기분에 들게 한다. 꿈과 현실이 뒤엉킨 이 영화에서 롱테이크 기법은 더욱 효과적이다.
꿈과 기억은 일대일
영화 <지구 최후의 밤>은 1부작은 2D로, 2부작은 3D로 제작됐다. 한국에서는 극장 상영이 흥행되지 않아 영화 감상 후에야 이 사실을 알게 됐다. 1부와 2부로 양분된 이 영화는 내용적 측면뿐 아니라 시각적으로도 분리해낸 것이다. 1부는 뤄홍우의 기억, 2부는 뤄홍우의 꿈을 상징한다. 같은 건 여전히 완치원을 찾고 있는 ‘뤄홍우’밖에 없다. 하지만 뤄홍우의 꿈과 기억이기 때문일까. 감독은 전혀 다른 전개 속에서도 시각적 모티브를 활용해 1부, 2부 사이에 오묘한 연계성을 남겼다. 어릴 적 가출한 엄마의 얼굴조차 자세히 기억해내지 못하면서도 넌지시 등장하는 뤄홍우의 내레이션에서 엄마의 관한 기억이 계속 *점멸한다. 과일과 색깔, 1부에 내레이션으로 등장했던 청각적인 것들이 2부에서 행동으로 보이는 등 파편적인 기억들이 합쳐져 확실한 형상으로 드러난다.
<케빈에 대하여> 스토리가 에바의 트라우마와 현실로 번갈아 구성됐다면 <지구 최후의 밤>은 뤄홍우의 기억과 꿈이 직렬 구조를 취한다. 전혀 다른 장르임에도 <케빈에 대하여>가 생각났던 건 바로 기억을 다루는 법에서의 차이 때문이었다. 개개인의 기억이 이렇게 천차만별이기에 기억을 시각화한 ‘영화’에서도 이런 차이점을 보인다. 기억은 트라우마가 되어 주인공을 파멸시키는가 하면, 기억에 의존한 희망적인 꿈으로 결말지어낼 수도 있다. 스쳐 지나간 기억들은 꿈속에서 ‘사건’으로 확실히 정의된다. 2부는 움직이는 집, 비행, 폭죽 등의 환상적인 요소와 탁구, 키스, 시계 선물과 같은 뤄홍우의 갈망이 합쳐진 또 다른 영화로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 영화 <지구 최후의 밤> 내레이션 中 - “영원한 기억은 고장 난 시계처럼 멈춰 점멸하지만, 찰나의 꿈은 아름다운 폭죽처럼 타올라 발광한다.”
어둠이 있기에 빛이 있다
전직 시인답게 감독 비간은 다양한 문학과 미술 작품을 레퍼런스로 사용했다. 완치원의 초록색 원피스는 이돈구 감독의 영화 <현기증>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 제목마저 로베르토 볼라뇨의 단편 소설 제목에서 따왔을 정도다. 채도 낮은 영화에서 색을 찾으면 그렇게 반가울 수 없다. 영화에서 채도 높은 초록은 꿈과 이상을 구분 짓는 용도로 사용된다. 내레이션 전개로 구성된 탓에 ‘포스트 왕가위’라는 칭호도 받았다. 하지만 사물을 바라보는 섬세한 시선은 누구를 빌려 말할 것도 없이 그저 비간인 듯싶다. ‘배고플 때는 거짓말을 할 수 없다’, ‘슬픔이 극에 달하면 사과의 가운데 부분까지 통째로 먹는다고’와 같은 은유는 비간 감독만이 펼칠 수 있었던 섬세한 시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