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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휘롱 Jul 15. 2022

콩나물 그리고 <우리들>


  <콩나물>부터 시작된 아이의 이야기. ‘윤가은 옴니버스’는 <우리들>에서 아이들의 이야기로 발전됐다. 아이들을 다뤘다고 해서 마냥 아이를 위한 영화는 아니다. 어른의 시선으로 바라본 아이들이기에 어른들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날카롭다. 아이들의 문제는 아이가 해결한다. 영화에서 어른은 '보호'의 역할만 충실할 뿐 더 이상의 도움은 되지 않는다. 훗날 선에게 도움을 주는 것도 동생이다.


  <콩나물>에서는 일곱 살의 아이레벨(eye level)로 촬영돼 어른들의 얼굴은 거의 볼 수 없다. 또한 사소해 보이는 문제들이 아이에겐 큰 난관이 되어버린다. <우리들>에서도 마찬가지. 절대 작은 아이들을 어른 시선에 맞춰 하이앵글로 찍지 않았다. 도리어 어른들의 상반신을 잘라낸 앵글을 취하고 있다. 4학년 선이에게 친구란 인생의 전부다. 친구를 잃었으니 감정이 무너지는 건 당연하다. 윤가은은 무던해진 어른들에게 경고장을 날린다. 어른이라 해서 아이들의 것을 대수롭게 보아선 안 된다고. 우리도 아이일 시절이, 피구 편을 나눌 때 온정신을 다했던 적이 있었다고.



난무하는 J컷, L컷. 늘어나는 상상력

  <우리들>의 시작과 끝은 소리다. 화면은 프레임아웃으로 보이지 않는다. 검은 화면 속에서 오롯이 피구하는 아이들의 소리만 들린다. 단순히 ‘까르르’ 같았던 첫소리에 반해 영화 끝자락의 피구 소리는 그렇게 다가오지 않는다. ‘나가’, ‘두고 봐’하는 소리가 명랑해 보이지도 않다. 시작과 끝을 같게 배치하는 수미상관 방식을 통해 감독은 변화한 감정과 시선을 부각했다. 관객뿐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많은 변화가 있었음을.


  이외에도 영화는 소리와 화면을 일치시키지 않고, 앞 컷과 뒤 컷의 소리를 끌어오거나 이어지게 배치하는 기법이 때때로 등장한다. 병원에서 파도소리가 들려오는 식이다. 컷은 명확하나, 소리는 그렇지 않다. 또한 그렇지 않아도 된다. 단절된 컷, 가상의 ‘영화’가 아닌 어딘가 존재하는 선형적 아이들의 이야기를 강조하고 싶었을까.



사물의 상징 : 비언어적 표현

  아이들답게 사소한 사물들이 상징화된다. 그것이 발화점이 되어 전개에도 영향을 미친다. 김밥은 엄마의 사랑, 색연필은 돈독한 비밀, 팔찌는 우정을 상징한다. 같은 신발이어도 선이는 해진 단화를 신은 반면 지아는 컨버스화 신었다. 바다는 결핍 없이 명랑한 아이들의 동경 대상에 해당한다. 이렇듯 감독은 다양한 사물들로 아이들의 감정을 섬세하게 다뤄냈다.


  사물의 상징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바로 봉숭아 물과 매니큐어일 것이다. 봉숭아 물과 매니큐어는 아이들의 계층을 상징함과 동시에 관계에도 영향을 미친다. 봉숭아 물은 여름방학 때 선과 지아가 공유했던 연대와 우정을 상징한다. 보라가 빌려준 매니큐어는 쉽게 까져버렸지만 봉숭아는 영화의 끝이 될 때까지 남아있다. 아주 조금이라도 말이다. 봉숭아 물은 시간의 흐름과 동시에 아이들의 우정을 시각화한 요소다. 지아는 몰라도 선은 남아있으니, 동생의 말처럼 한 발짝 물러나 싸움을 그만둘 때가 됐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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