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지어 대문자임 (확신의 인티제 회고록)
대학시절 검사 결과지로 처음 마주한 내 MBTI 성향은 퍽 만족스러웠다.
INTJ
창의적인, 비전 있는, 미래지향적인, 직관적인...
뭔가 스마트한 냄새를 뿜뿜 풍기는 준비된 인재의 키워드 같아 자아도취에 빠졌던 것이다.
불혹이 된 나는 이제 와서 FP친구들이 부러워진다.
타인의 고통과 심정을 같이 느껴주고 함께 공감해 줄 수 있는 F의 따뜻한 마음씨와 선량한 배려에서 오는 그 여유로움이.
즉흥적으로 선택하고 지금 당장의 순간을 오롯이 즐기며 하고 싶다는 열정 그대로 용기 있게 저질러보고 언제든 뒤돌아설 수 있는 P의 유연하고 과감한 추진력이.
그리고, 그런 성향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주었을 그들의 환경과 조건이. 나에게는 허락되지 않았기에 못내 부러운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의 감정에 앞서 당면한 내 앞의 현실적 이슈에, 여러 갈래의 대안이 있음에도 장기적인 관점에서 가장 후회가 남지 않을(=잃을 것이 제일 작아 보이는 = 여러 측면에서 바라봤을 때 제일 가치 있다고 판단되는) 선택지를 오랜 숙고 끝에 단 하나만 고를 수 있었다. 내 주머니에 총알은 늘상 부족하였으므로.
외벌이 소상공인 부모님의 소득 패턴은 나의 TJ적 성격 형성으로 귀결된다. 자영업 중에서도 가구라는 품목의 특성상 계절마다 매출이 들쭉날쭉 널을 뛰고 불규칙하였기에. 학창 시절의 나는 용돈을 제대로 받아본 기억이 없다.
여유롭지 않은 형편에 과할만치로 조숙한 둘째 딸로서 돈 달라고 떼쓰기도 어려웠고. 간헐적으로 가끔 생기는 심부름값 수준의 잔돈과 설날에 친척집에서 얻어오는 세뱃돈만이 내 1년 살림 예산의 전부. 학교 앞 문방구나 교내 매점은 성장기 아이들이 탐욕을 부릴 꿈과 희망의 공간이건만, 물욕 없는 나의 시큰둥한 무소비 성향은 그때부터 이미 발동하였음이라.
그렇게 나는 미래의 더 미래를 내다보고, 명확하게 구체화되지 않은 앞날의 무언가를 위해 항상 대비하면서, 수중에 여분의 비상금이 없으면 전전긍긍 불안해하는 초특급 계획형 인간으로 성장했다. 상장을 모아둔 앨범 뒷면에 남몰래 꽂아둔 빳빳한 만 원짜리 지폐 세장을 마땅히 꺼내어 쓸 용기도 없는 주제에, 잘 있는지 주기적으로 체크하면서 굳이 세어보는 요상한 루틴을 간직한 채로.
한 번은, 워크숍에서 조별 토론 주제로 행복한 고민을 공유할 기회가 생겼는데,
지금 당장 누가 내 손에 100억을 쥐어준다면 어떻게 쓸 것인지 조별로 이야기해 봅시다.
각자 의견이 다양하게 나와서 재밌었지만
내 대답을 다시 생각해 보니 이렇게 짠할 수가!
일단은 강남에 똘똘한 부동산을 하나 사고
금과 주식을 분산 투자한 후, 남은 소액은
샤테크로 뜯지 않고 보관만 해둘 겁니다.
드림카고 호캉스고 해외여행이고. 돈으로 즐길 수 있는 수많은 갈림길이 있음에도 나는 무엇하나 고르지를 못하여 미래의 나에게 선택을 유보한 셈이다. 소고기를 백만 원어치 사 먹어 보겠다는 작은 소망조차 생각해내지 못하고. 이래서 돈도 써본 놈이 쓸 줄 안다고 했던가. 100억을 손에 쥐고도 쓰지를 못하니. 두 번 다시는 그런 행운이 또 찾아올 리 없다고 맹신하는 TJ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