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는 시간을 품고 있습니다.

두 번째 브랜드 노트

by 엘렌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가 발표한 [트렌드 코리아 2026]의 키워드 중 하나는 '근본이즘(Fundamentalism)'입니다. AI가 만든 이미지가 넘쳐나고, 짧은 영상처럼 모든 것이 흘러가 버리는 시대에, 사람들은 오히려 '진짜', '오래된 것', '근본이 있는 것'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근본이즘은 단순한 복고가 아닙니다. 빠르게 변하는 미래 속에서 다시 본질을 붙잡으려는 움직임, 흔들리지 않는 기준을 세우려는 시도. 시간이 축적한 진정성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렇다면, 브랜드는 어떻게 이 '근본'을 찾아야 할까요? 그 답은 '브랜드 헤리티지'에 있습니다.


브랜드 헤리티지 (Brand Heritage)란?

브랜드 헤리티지란 쉽게 말해 '브랜드가 걸어온 시간의 흔적'입니다. 창업 스토리, 장인 정신, 전통 기법, 브랜드가 지켜온 가치와 철학, 그리고 그 과정에서 쌓인 신뢰와 정통성. 이 모든 요소가 브랜드 헤리티지를 구성합니다.


단순히 '오래됐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 시간 속에서 한결같이 지켜온 무언가. 다른 브랜드는 따라 할 수 없는 고유한 이야기가 있어야 합니다. 100년 된 빵집이 아무 변화 없이 그저 오래되기만 했다면 그건 헤리티지가 아니라 낡은 것일 뿐입니다. 하지만, 100년 동안 같은 레시피를 지키며 3대째 빵을 굽는 장인의 손길이 있다면? 그리고 100년 전 시작된 브랜드 스토리가 브랜드 철학으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헤리티지'입니다. 시간과 진정성이 만나는 지점, 그곳에 브랜드의 '근본'이 있습니다.


브랜드가 왜 시작되었는지, 그동안 어떤 시간을 견뎌 왔는지, 지금도 지키고 있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브랜드의 뿌리입니다.


성심당 - 밀가루 두 포대에서 지역의 헤리티지로

대전을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생각나는, 이제는 대전의 대표 브랜드가 있습니다. 1956년 작은 제과점에서 출발해 지금은 "빵"을 사기 위해 대전까지 여행을 가는 "성심당"입니다. '68년 된 빵집'이라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창업주가 생사의 순간에서 다짐한 "남은 인생은 남에게 베풀기 위해 살겠다."는 약속이, 지금도 이 브랜드를 움직이는 힘이라는 점입니다. 하루 빵 300개 중 100개를 이웃에게 나눠주던 그 철학은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브랜드 헤리티지는 단순히 박물관에 걸어두는 옛날 사진이 아닙니다. 위기의 순간마다 브랜드가 무엇을 선택했는지, 그 선택들이 어떤 가치로 이어져 왔는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입니다.


부창제과, 60년 전 그 이름을 다시 꺼내다.

최근 배우 이장우의 결혼식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전 세계 하나뿐인" 호두과자로 만든 부케가 등장했습니다. 호두과자부케로 더 유명해진 부창제과는 1963년 경북 경주에서 시작한 동네 제과점이었습니다. 1990년대에 문을 닫았고, 이를 창업주의 외손자 이경원 FG대표와 배우 이장우가 부활시켜 30년간 멈춰있던 브랜드를 다시 현재로 불러냅니다. 잠시 멈춰 있던 브랜드를 다시 살리고, 브랜드의 철학과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한 브랜드가 오래 전의 진짜 이야기를 품고 있을 때, 사람들은 감동합니다. 아마도 부창제과는 '근본'의 진정성이 브랜드의 가장 강력한 자산이 된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다시 브랜드 헤리티지를 찾아, 스토리를 만들고, 디자인을 하고 브랜딩을 하지 않았을까요? 그 덕분인지, 부창제과는 출시 6개월 만에 호두과자 누적 판매량 1억 개, 월 매출 15억 원을 돌파하며 국내 디저트 업계 최단기간 매출 신기록을 세웠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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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후, 궁중문화를 담은 브랜드 헤리티지

제가 직접 담당하고 경험했던 브랜드, 화장품 브랜드 '더 후'는 한국 궁중문화의 아름다움과 철학을 담은 브랜드입니다. 우리의 전통과 궁중문화의 아름다움, 궁중 의학과 비방 그리고 동양의 미학을 브랜드의 세계관 한가운데에 두고 있습니다. 특히, 2015년부터 문화재청과 함께 진행한 궁중문화 캠페인은 경복궁, 창덕궁 등 우리의 궁에서 궁중공예의 아름다움을 전시하고, 궁중문화를 직접 경험하게 하며 궁중 문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보여줍니다.


우리의 궁궐은 브랜드가 시작된 의미를 부여하는 장치였고, 우리 궁중 문화와 왕후의 아름다움은 브랜드의 이야기였습니다. 장인, 화각, 자수, 금박, 나전칠기, 입사 등 궁중 공예의 장인들과 협업을 하고, 우리의 전통을 지키는 모습으로 브랜드의 진정성을 강조합니다. 단지 '옛날이야기'가 아닌 브랜드가 지향하는 방향과 감정선, 제품 경험을 모두 담은 브랜드의 헤리티지로 보이며, 지금도 쌓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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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운, 500년 역사가 스며 있는 카페.

대구시 달성군의 한옥 카페 '묘운'은 제가 다녀온 곳 중, 헤리티지를 가장 선명하게 느낀 공간이었습니다. 묘운이 자리한 묘골 마을은 조선 단종 때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박팽년의 후손들이 500년 넘게 삶을 이어온 유서 깊은 마을입니다. 마을에는 사육신의 위패를 모신 사당, '육신사'가 있고, 마을 입구에 후손이 직접 운영하는 한옥 카페 '묘운'이 자리합니다.


손수 지었다는 한옥 카페 안에는 선조들의 흔적이 가득합니다. 그리고, 한국 전통이 오늘날과 만나 새로워진 디저트 메뉴와 커피 메뉴가 있습니다. 카페는 그 자체로 사랑방이자, 작은 문화 공간이자, 이 마을의 과거와 현재를 잇는 매개처럼 느껴졌습니다. 사육신의 이야기, 500년이 넘게 함께 살고 있는 마을의 분위기, 그리고 그 후손이 직접 운영하는 카페. 마을과 역사와 현대의 문화가 자연스럽게 섞여있습니다. 사람과 역사, 마을의 기억이 켜켜이 쌓인 살아 있는 헤리티지로 다가옵니다. 물론 이곳은 브랜딩도 훌륭하지만,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감정보다는 장소 자체가 품고 있던 역사적인 헤리티지가 자연스럽게 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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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1초 만에 완벽한 이미지를 만드는 시대이지만, 저는 여전히 오래된 흑백사진 한 장에 마음이 흔들립니다. 그 사진 속에는 '진짜'가 있고 '이야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헤리티지는 브랜드가 선택하는 장식이 아니라 브랜드가 왜 여기 있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 주는 가장 단단한 언어입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오래 전해주는 깊은 울림이기도 하지요.


좋아하는 브랜드 하나를 떠올려 보세요.

그 브랜드는 어디에서 시작되었나요? 어떤 이야기를 지켜왔나요?

당신에게 어떤 감정을 남기나요?


브랜드를 읽는 두 번째 방법은 그 브랜드가 서있는 뿌리와 시간을 천천히 들여다보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