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감정을 되찾고 싶습니다』

5편 – 감정의 언어를 배우다

by 라이브러리 파파

“감정은 타고나는 게 아니라 배우는 것이다.”

상담사가 건넨 그 한마디가
한동안 마음에 남았다.

나는 스스로를 감정 표현에 서툰 사람이라 생각했다.
감정이라는 단어 자체가 어색했고,
기쁘거나 슬퍼도 무표정한 얼굴로 넘기기 일쑤였다.

하지만 아이들을 보면서, 아내를 보면서,
감정은 표현하지 않으면 전해지지 않는다는 걸 배워가고 있다.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어렵던 시절,
우리는 종종 일기장에 감정을 적곤 했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습관이 되지 않았다.

그때 상담사가 하나의 제안을 했다.
“가족 감정 어휘카드를 만들어보세요.”

처음엔 유치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의외로 아이들이 흥미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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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단어가 쓰인 작은 카드를 하나씩 뽑아
오늘 하루의 기분을 말로 표현하는 놀이였다.

“오늘 나는… ‘혼란스러워’였어.”
“왜?”
“학교에서 친구랑 싸웠는데,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어.”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놀라움과 동시에 반가움을 느꼈다.

아이가 자기감정을 표현한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우리는 매일 저녁 감정 어휘 놀이를 했다.

처음엔 10개였던 단어가,
30개, 50개로 늘어났고,
‘기쁨’ ‘짜증’ ‘외로움’ ‘질투’ 같은 단어들도 포함됐다.

아내와 나는 서로의 감정 카드도 뽑아보았다.

“오늘 내 카드는 ‘지침’이야.”

“무슨 일 있었어?”
“그냥 하루 종일 정신없었고, 말 한마디 주고받을 틈도 없더라고.”

그런 말을 하며 우리는
서로의 하루를 조금씩 들여다보게 되었다.

감정을 말하는 것 자체가 낯설고 어색했던 나에게
이 놀이는 일종의 언어 수업이었다.

기분이 어땠는지, 왜 그런 기분이 들었는지,
그 기분을 누구와 나누고 싶은지까지 생각하게 해 주었다.

가끔은 아이들이 우리에게 질문을 던졌다.
“엄마는 화날 때 어떻게 해?”
“아빠는 슬프면 울어?”

그 질문에 우리는
그저 웃어넘기지 않고 진지하게 대답하려 했다.

“엄마는 화나면 숨을 크게 쉬어. 그리고 네 얼굴을 봐.”
“아빠는 슬프면 마음이 조용해져. 그리고 너희 옆에 있고 싶어 져.”

그렇게 감정은 더 이상 피해야 할 무언가가 아니라,
이야기할 수 있는 언어가 되었다.

나는 문득 어릴 적 내 모습이 떠올랐다.
감정을 표현하면 약해 보인다고 생각했고,
남자답지 못하다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그래서 점점 무표정한 사람이 되어갔고,
마음이 흔들려도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조금씩 바뀌고 있다.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감정을 아이들 앞에서 말로 표현하는 법을
하루에 한 문장씩 연습하고 있었다.

“오늘은 기뻤어.”
“지금은 조금 서운해.”
“네가 웃어줘서 고마워.”

이 짧은 문장들이
아이들에게는 감정을 말로 배우는 교과서가 되었다.

하루는 로미가 말했다.
“아빠, 나는 지금 좀 울고 싶어. 근데 이유는 몰라.”

그 말을 듣고 나는 조용히 안아주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괜찮아. 이유 모를 눈물도 있어. 그럴 땐 그냥 울어도 돼.”

그 순간,
감정을 이해한다는 것이
이해하려 하지 않는 태도에서 시작된다는 걸 배웠다.

아내와 나는 이제 감정을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가끔은 다투더라도,
그 속에서 서로의 마음을 읽어보려 노력한다.

감정을 표현하는 문장은 짧지만,
그 짧은 문장들이 모여
가족의 관계를 다시 쓰고 있다.

말하지 않았던 시간을 지나,
우리는 말할 수 있는 언어를 하나씩 배우고 있다.

그 언어의 이름은 ‘감정’이다.

그날 밤,
로미가 내게 물었다.
“아빠는 어릴 때, 무서울 때 어떻게 했어?”

나는 대답 대신, 잠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릴 적 나를 떠올리는 건 늘 쉽지 않았다.

“아빠는 그냥 참았어.
무섭다고 말하면 혼날까 봐.”

로미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더 무서워지지 않아?”

나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
“맞아. 그래서 더 무서워졌던 것 같아.”

그 짧은 대화는
내 어린 시절을 대신 위로해 주는 말처럼 느껴졌다.

그날 밤,
로미는 내 옆에 누워 속삭였다.

“나는 오늘 무서운 꿈 꿀까 봐 걱정돼.”
“그럴 땐 아빠가 옆에 있잖아.”
“응… 고마워.”

로미가 조용히 내 손을 잡았다.
작은 손.
작은 말.
작은 감정.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내 마음을 움직였다.

다음 날,
아내가 점심 도시락에 작은 쪽지를 넣어줬다.

“오늘도 잘 버텨줘서 고마워.”

그 쪽지를 펼쳐보는 순간,

왠지 모르게 목이 메었다.
평범한 하루,
아무도 모를 도시락 뚜껑 아래에
그녀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나는 답장을 썼다.

“같이 버텨줘서 더 고마워.”

우리는 이제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감정을 ‘소란’이 아닌 ‘소통’으로 여긴다.

저녁엔 아이들이 감정 카드를 그림으로 그렸다.
화난 얼굴, 울고 있는 표정, 웃고 있는 입꼬리,
그리고 작은 하트.

“이건 오늘 내가 느낀 것들이야.”
라운이 내게 보여주었다.

나는 그림을 한참 들여다보다 말했다.
“네 마음, 고맙게 받을게.”

그 말을 듣고 라운이 웃었다.
“아빠가 그렇게 말하니까 진짜 편안해.”

그 순간,
나는 내가 진짜 ‘아빠’가 된 것 같았다.

그저 일상을 책임지는 사람이 아니라,
아이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

그건 어쩌면
지금껏 내가 가장 원했던 역할이었다.

아내는 여전히 조심스럽지만,
이제는 감정을 표현하는 일이
부끄럽거나 낯선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나도 이제야 말할 수 있어.
예전엔 감정이 부끄러웠거든.
그냥 참는 게 미덕이라고 배웠으니까.”

“근데 이제 알겠어.
감정을 말하는 게 나약한 게 아니라,
진짜 용기라는 거.”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아내는 그 손을 잡으며 말했다.
“우리, 다시 시작하고 있는 거지?”

나는 대답 대신
그 손을 꽉 잡았다.

그날 밤,
식탁에는 네 사람의 감정 카드가 놓였다.

기쁨. 설렘. 피로.

그리고… 사랑.

말보다 먼저 마음이 닿는 순간이었다.


다음 편 예고
우리가 배운 감정의 언어는 일상의 작은 변화로 이어진다.
여섯 번째 이야기에서는, 감정을 나누는 일상이 어떻게

가족 간의 새로운 ‘관계의 패턴’을 만드는지 이야기합니다.

아이들과, 아내와, 그리고 나 자신과 맺는 새로운 약속.
『6편 – 아이들과의 새로운 약속』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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