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코르도바 여행기
곰브리치는 <서양미술사> 서문에서 ‘카탈로그를 손에 들고 회랑을 걸어가는 사람’을 이야기한다 . “그들은 한 그림 앞에 걸음을 멈출 때마다 그 그림의 번호를 열심히 찾는다. 그들은 카탈로그 페이지를 넘기다가 그 그림의 제목이나 화가의 이름을 찾으면 걸어간다.” 코르도바 메스키타 성당에서는 4유로를 내고 오디오가이드를 빌렸다. 그런 뒤 나는 ‘카탈로그를 손에 들고 회랑을 걸어가는 사람’ 그 자체가 되었다. 장소마다 해당되는 번호를 누르면 오디오가이드 수화기에서 안내 음성이 나왔다. 1번 환영. 2번 순교자 성 빈센트의 바실리카. 3번 아브드 알라흐만 1세 소개. 어딘가 갈 때마다 이 곳은 몇 번 장소일지 번호를 열심히 찾았다. 반드시 번호 순서대로 다녀야 했다. 번호가 적혀 있지 않은 곳에서는 옆 사람이 무슨 번호를 누르는지 힐끗 살폈다. 중간에 번호 하나를 빠뜨리면 몹시 심란했다. 방금 14번을 들었는데 지금은 왜 16번이지? 15번은 못 보고 지나친 건가? 곰브리치의 일갈은 서문에 걸쳐 계속된다. “그런 사람들은 그림을 거의 보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차라리 집에 머물러 있는 편이 더 좋았을 것이다.”
9년 전 살라망카의 성당에 갔을 때도 오디오가이드를 빌렸다. 영어와 스페인어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다. 스페인어 학구열이 매우 높을 때여서 (실력은 형편 없었다) 스페인어 가이드를 당차게 골랐다. 매표소의 할머니는 깜짝 놀라면서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어떤 질문을 스페인어로 자연스레 건냈다. 하지만 나는 “OOO OOOO가 OOO하니?”정도만 이해할 수 있었다. 허황된 실력이 들통나자 황급히 자리를 피할 수밖에 없었다. 간단한 질문도 이해하지 못했으니 성당에 대한 학술적인 설명은 당연히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훗날(일 년 뒤다) 홍대입구의 레알스페인어학원에 다니게 되며 스페인어 듣기의 진정한 어려움을 체감하였다. 학원에서는 간단한 듣기를 많이 연습했다. 비행기 표 시간 물어보기. 좋아하는 취미 물어보기. 9년이 흐른 뒤 코르도바에서는 영어 가이드를 선택했다.
오디오가이드는 전 세계 어디서나 비슷한 느낌이었다. 현악 4중주가 경쾌한 음악을 연주하고, 환대하는 톤의 학구적인 목소리가 등장하여 건축물 구석구석의 위대함과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번호 순서대로 움직이며 한 시간 동안 설명을 열심히 들었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니 들었던 내용이 정말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결국 아래의 설명은 스페인 코르도바가 아닌, 영등포구 문래동에서 검색을 통해서 새로 정리해야만 했다.
카를 5세는 1525년에 대수선된 코르도바의 성당을 구경하고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건물을 짓기 위해 어디서도 볼 수 없는 건물을 파괴했다!‘고 한탄했다. (오늘날 건축을 관통하는 놀라운 문제의식이기도 하다. 힐튼호텔을 파괴하고 커튼월 오피스를 짓는 것과 마찬가지다) 중세 시대 스페인은 이슬람의 영토였다. 당시에 지어진 모스크를 레콩키스타 이후에 성당으로 개축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모스크와 성당이 합쳐진 기묘한 건축물이 탄생하였다.
이 건축물의 흥미로운 점은, 성당과 모스크가 합쳐져 있기는 한데 너무 직관적으로 합쳐져 있다는 사실이다. 낮은 기둥이 촘촘하게 박혀 있는 모스크 평면 사이로, 어떻게 고딕 성당의 장대한 대공간을 배치할지가 크나큰 고민이었을 것이다. 해결책은 단순했다. ‘안 되면 되게 하라!’ 모스크 한가운데를 전부 덜어 내고 마치 성당이 먼저 있었던 것처럼 평면을 끼워넣었다. 그래서 평면만 보면, 마치 성당이 가장 먼저 지어진 것처럼 보인다.
내부에는 낮과 밤이 모두 존재한다. 건물 한가운데는 대낮처럼 밝고 가장자리는 칠흑처럼 어둡다. 성당의 클리어스토리에서는 빛이 쏟아지는데, 모스크에서는 가느다란 기둥들이 암흑의 숲처럼 한없이 이어진다. 이슬람 건축의 배치 핵심 원칙은 메카의 카바를 바라보는 것, 즉 키블라를 향하는 것이다. 반면 기독교 건축의 핵심 원칙은 동쪽 하늘을 바라보는 것, 즉 상승하는 대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두 개의 완전히 다른 건물이 합쳐질 때의 묘미는 주로 결합의 절묘함에 있다. 그런데 메스키타의 두 건물은 그 절묘함이 없어 오히려 절묘하다. 카를 5세가 안타까워 마지않았던 파괴된 유산은 오백 년이 흐르며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건물’이 되었다. 카탈로그를 들고 회랑을 걸어가는 동안 오디오가이드에서 들은 설명이 왜 기억나지 않는지 드디어 알게 되었다. 너무나 놀라운 건물에서, 너무나 평범한 설명을 듣고 있던 것이다. 건축학과를 졸업했다고 하면 관광지에서 종종 듣는 질문이 있다. 이 건물은 무슨 양식인가요? 집에 돌아와서 정보를 찾아보기에 제대로 대답할 수 있던 적은 없었다. 너무 멋진, 정말 멋진 건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