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를 의무감에 보는 것만큼 곤혹스러운 일은 없다. 특히 정신의학 소재의 국내 드라마는 점점 퇴행해 가는 느낌이 들어 거부감이 컸다. 하지만 기자나, 환자, 또는 지인들이 자꾸 물어보는 바람에 넷플릭스를 켰다. 기다려왔던 스위트홈 2를 미루고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를 보았다. 숙제하듯 보기 시작했지만, 공감 가는 부분이 많아 즐겁게 시청할 수 있었다. 약 스포가 있으니, 보실 분들은 주의 부탁드린다. 본 드라마는 정신병동에 신규 간호사로 배정된 주인공 정다은(박보영 분)의 초반 성장기와 후반 낙인 극복기로 이어진다.
나의 초년병 시절
작중 주인공은 정신과 신규 간호사이지만, 자연스레 나의 정신과 전공의 시절이 떠올랐다. 나는 전공의 1년차 첫 6개월을 폐쇄병동에서 시작했다. 첫 2개월간은 병원에만 있었고, 이후에도 집에 간 날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환경적으로는 환자와 다를 바 없이 갇혀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머리도 제때 못 깎고 퀭한 모습으로 병동을 누비고 다녔다. 병동 산책 때, 산책 구역에서 경계를 서고 있었는데 (이때는 가운대신 사복을 입는다), 실습 나온 간호대생이 조심스레 다가와 내게 말을 건넸다. “치료받느라 많이 힘드시죠?” 개인적으로는 슬픈 추억이지만, 환자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한달까? 주인공과 같은 종류의 실수는 아니었어도, 나 역시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대부분 의욕이 앞서고, 기다릴 줄 몰라서 생긴 일들이다. 초짜 정신과 의사가 제 역할을 할 때까지 기다려 준 건 환자 분들이니, 늘 감사할 따름이다.
고난은 관계의 문제부터
환자의 가장 아픈 상처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생겨나기 마련이다. 모든 임상과가 그렇지만, 특히 정신과 치료에선 환자-치료자의 관계가 중요하다. 환자는 이전과 다른 관계 맺기를 통해 교정적 재경험을 한다. 정신과 전공의 수련이 4년으로 긴 이유는, 정신과 약물이 많고 복잡해서만은 아니다. 다양한 환자들과 치료적인 관계를 잘 맺으려면, 충분히 훈련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치료자는 환자를 만날 때마다 본인만의 고유한 대인관계 패턴이 나타난다. 이를 역전이라고 하는데, 이를 객관화해서 들여다보고 다루려면 오랜 기간 훈련이 필요하다. 특히 주인공 정다은 간호사처럼 정이 많고, 내담자에게 감정이입을 많이 하는 선후배들이 가끔씩 있었다. 이들의 몸에 밴 따뜻한 태도는 장점이지만, 스스로 소진되기도 쉽다. 대개 수련 과정을 거치면서 환자와 적당히 거리두기 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극 중에서처럼 퇴원할 때 건네는 “우리 다시는 만나지 마요.”란 말은 매정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결국 환자가 스스로 설 수 있도록 돕기 위한 좋은 작별(Good-bye)이다. 본 드라마는 기존 정신의학 소재 드라마에 비해 꼼꼼한 자문을 받아서인지 전반적으로 어색함이 적었다. 다만 작중 옥에 티라면, 정다은 간호사가 김서완님에게 개인 연락처를 남긴 행동이 끝내 극 중에서 다뤄지지 않았던 점이다. 이는 치료적 중립성을 깰뿐더러, 환자의 의존욕구를 조장할 수 있다. 후회하는 회상씬에서 그 장면이 지나가기를 바랐지만, 결국 나오진 않았다. 통화를 끝낸 김서완님은 거절 공포(fear of rejection) 또는 유기불안(fear of abandonment)까지 느꼈을 수 있다. 외로웠던 환자의 극단적인 행동화(acting-out)가 이해가 되는 지점이다.
정신과 치료는 낙인과의 싸움
경험과 연륜 덕에 조금 여유가 생긴 지금, 치료자로서 가장 힘든 건 역시 낙인과의 싸움이다. “약을 먹으면 중독되는 것 아닌가요?”, “정신병동에선 툭하면 사람을 묶어둔다면서요?” 매일 반복되는 질문들이다. 낙인이란 본질적으로 두려움에서 출발한다. 두려운 이유는 우선 잘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드라마는 이미 내용과 무관하게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다. 노출될 수 없는 공간을, 이야기를 통해 흥미롭게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반인은 정신병동(일명 폐쇄병동)을 모를뿐더러, 경험해 볼 일이 없다. 견학이나 체험코스조차 불가능한 공간이다. 병동은 겉모습만으로는 제대로 알기 힘들다. 마음대로 외출할 수 없기 때문에 자유를 제한하는 두려운 장소로만 비칠 수 있다. 전공의 시절, 병동에 파견교육을 왔던 한 변호사는 2주간의 실습을 마친 뒤 소감을 말했다. “왜 멀쩡한 사람들을 가둬놓고 치료하는지 모르겠어요.” 정신병동은 외출 제한이 핵심이 아니다. 불필요한 자극을 줄이고, 위험을 최소화한 환경에서 온전히 치료에만 전념하는 공간이다. 이곳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다른 곳과 별반 다르지 않다. 회복이라는 같은 목표로 치료진과 환자들이 함께하는 하나의 커뮤니티일 뿐이다. 드라마에서 다양한 정신질환을 환자 입장에서 시각화하며 다룬 것도 괄목할만하다. 증상에 압도된 상태에서 의지만으로 벗어날 수는 없다. 우리의 감각은 미혹되기 쉽고, 이성도 불완전하다는 걸 인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연기자들의 멋진 연기를 통한 간접체험은 환자의 입장이라면 어떨지 상상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노출과 체험이 갖는 효과는 작지 않다. 대단한 논문은 아니지만, 올해 약물중독자에 대한 일반인의 낙인과 차별을 조사해서 발표한 바 있다. 미국과 비교했을 때, 한국인은 약물 중독자를 가족 구성원으로 용인하는 정도는 비슷했으나, 직장동료나 세입자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성향은 더 심했다. 흥미롭게도, 담배를 많이 피우는 사람일수록, 약물중독에 대한 낙인과 차별이 모두 적었다. 흡연자는 비슷한 경험을 했기 때문에, 다른 마약성 약물에 중독된 사람을 덜 적대시하고, 보다 포용하는 태도를 보인 셈이다. 자주 접하면, 덜 낯설어하고, 더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자기 노출의 용기
최근 정신질환을 ‘커밍아웃’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여전한 사회적 편견을 생각하면, 이러한 자기 노출은 대단히 용감하고 멋진 일이다. 2016년 당대 최고의 팝스타 레이디 가가는 PTSD를 앓고 있음을 고백했고, 최근 apple TV+의 ‘당신이 보지 못하는 나’에서 여전히 투병 중인 사실을 공개했다. 국내에서는 유명인들의 고백 덕분에 공황장애는 ‘연예인병’이란 별칭을 얻기도 했다. 책으로 출판되는 예도 많다. 퓰리처상 작가가 쓴 “내 아들은 조현병입니다”(론 파워스, 2019)은 원제”No-one cares about crazy people”가 더 노골적이다. 상담치료내역을 글로 옮긴 베스트셀러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백세희, 2018)부터 시작해서, 의대생이 쓴 “당신이 ADHD라고 해서, ADHD가 당신은 아니다.”(김강우, 2022)와 “나의 조현병 삼촌”(이하늬, 2023) 등이 있고, 이 달에는 경조증을 앓는 현직 내과 전문의가 “가끔 찬란하고 자주 우울한”(경조울, 2023)란 책을 냈다. 경험을 바탕으로 한 글은 힘이 있고, 울림이 있다. 본 드라마 원작 웹툰의 저자도 정신과 간호사였다. 치료자는 환자 사례를 언급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들의 이야기는 소중하다. 이들의 용기 있는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으리라 믿는다.
현실의 아침은 쉬이 오지 않는다.
치료를 받으면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은 결코 헛되지 않다. 정신병동에서는 반드시 아침이 온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쉽게 아침이 오지 않는다. 생의 앞길이 곧 밝아질 거라 섣불리 이야기한다면, 환자에게 솔직하지 못한 태도이다. 아침이 오지 않아도, 앞길이 여전히 어두워도, 계속 함께 걸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극 중에 김서완님이 무너진 것도 사실은 이러한 절망에서 일부 기인했을지도 모른다. 문명화되었다고 믿었던 지금,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 앞에서 어떤 희망을 쉽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큰 희망이 없더라도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힘들지만 끝까지 이어가야 한다. 중요한 건 삶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정확히 20년 전, 1993년 12월 방영된 미드 ‘프레지어(Frasier)’에서 정신과 의사는 갑자기 사망한 친구의 미망인에게 말했다. “제 생각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삶이 줄 수 있는 작은 즐거움과 놀라움을 기다리며 사는 것입니다. (I suppose the best we can do is live for the little joys and surprises that life affords us.)” 올 한 해 힘들었고, 2024년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 작은 행복을 이어가며 살아낼 수 있기를!
참고문헌
1)Jang KW, Lee HK, Park BJ, Kang HC, Lee SK, Kim CH, Nam SK, Roh D. Social Stigma and Discrimination Toward People With Drug Addiction: A National Survey in Korea. Psychiatry Investig. 2023 Jul;20(7):671-680. doi: 10.30773/pi.2023.0065. PMID: 37525617; PMCID: PMC10397776.
2)https://www.kacl780.net/frasier/transcripts/season_1/episode_11/death_becomes_him.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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