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다림은 피로 시작해서 피로 끝이 난다. 생리 혹은 피검사. 3차 인공수정 시술도 비임신으로 끝났다. 세 번의 시도라고 하면 간단해 보이지만 3개월을 주사와 진료, 시술로 메운 여정이었다. 생리 주기가 시작되면 생리 3일 차부터 배란 유도제를 1~2주가량 받는다. 그 사이 질초음파를 최소 2회 받으며 난포가 잘 자라고 있는지 확인한다. 배란이 임박한 시기가 되면 정자주입 시술을 하고, 그 이후 2주 동안 호르몬 주사를 맞는다.
내 진단명은 원인 불명의 난임이다. 그 사실이 억울하고 화가 난다. 왜 내가? 나는 아직 젊고, 건강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하는데. 운동도 열심히 꾸준히 하고. 먹는 것도 적당히 건강하게 먹고, 크게 스트레스받는 일도 없다. 원인을 알 수 없어서 더 억울하다. 아니, 어떤 원인으로 난임이 되었든 억울한 건 매 한 가지일 것이다.
노력해서 되는 일이면 조금은 덜 억울하겠는데 그렇지 않다. 하지만 누군가는 자꾸 이런저런 노력을 해보란다. 그들이 말하는 걸 안 해본 건 아니다. 술을 끊고 카페인을 줄이고 한약을 먹고 더 많이 걷는다. 마음이라는 게 본래 노력해서 잘 되지 않지만 마음도 편안히 먹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결국 다 개소리라는 걸 알면서도. 그 모든 고리타분한 노력 없어도 생길 사람들은 곧잘 생긴다. 피임하지 않은 이성 간 커플의 80~85%는 1년 이내에 그리고 2년 이내에 90~95% 임신에 성공한다. 우리 커플은 노력해도 임신이 잘 되지 않는 5%에 포함되었다.
확률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내 주변에는 임신을 잘하는 사람들만 있는 것처럼 보였다. SNS로 피드에 종종 태아의 초음파 사진, 갓난아이의 사진이 올라오고 프로필 사진이 바뀌었다. ‘될놈될 안될 안’이다. 세상이 원래 그런 건데 나는 이제야 5%의 커플만이 겪는다는 난임이라는 세계를 통해 처절하게 배우고 있다.
내가 2년째 임신 시도 중이라는 걸 아는 주변 몇몇은 본인의 임신 사실을 내게 알리는 걸 조심스러워했다. 그의 임신과 나의 비임신 상태는 상호 독립적인 사건임을 서로 인지하고 있음에도, 그는 나를 상처를 입힐까 봐 자연스럽게 거리를 뒀다. 그러면서도 나는 친구가 너무 조심스러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나를 배려하려는 마음을 알아버릴 때 더 비참해지고 마니까. 친구에게 생긴 좋은 일을 축하조차 해줄 수 없는 모자란 인간이 되어버리는 것만 같아서. 난임 기간이 길어질수록 어떤 이들은 지나가는 아이만 봐도 마음이 아프다고 한다. 그렇게 온갖 일에 할퀴어지고 싶지는 않다.
축하와 별개로 슬플 뿐이다. 그의 일과 나의 일이 별개이듯 나의 임신을 위한 노력도 임신과는 자꾸 별개의 일이 되어버리는 게. 그러니 나는 더 힘껏 축하해 준다. 진심으로 축하한다. 나 같은 상황에 놓이지 않게 된 걸, 지금의 나여서 그를 더 축하해 줄 수 있다.
이런 일은 평생 몰라도 된다. 예상보다 오랜 기간 동안 임신이 되지 않아 느끼는 거지 같은 감정 따위. 겪어봤자 큰 역경을 견뎠다고 박수받을 종류의 것도 아니다. 난임 시술을 받는다는 얘기를 하면 벌써부터 어떤 사람들의 속마음이 들려오는 것만 같다. 그것은 내 일부 속마음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다른 이의 임신 소식이나, 그저 지나가는 귀여운 아기보다는 이런 말에 할퀴어진다.
‘왜 그렇게까지 임신에 집착해?’
처음에는 나도 집착하지 않았다. 쉽게 생길 줄 알았으니까. 하지만 쉽지 않다는 걸 알 수록 집착하는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산부인과 진료를 보고 왔다고 하니 요목조목 캐묻는 엄마에게 결국 말하고야 말았다. 인공수정을 하고 있다고. 벌써 세 번째 시도라고.
‘주사도 맞고 그러는 거야? 그거 힘든 거 어니냐,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 고 물 흐르듯 빤하게 이어지는 물음에 괜찮다고 말했다. ‘그렇게까지…’ 하는 것, ‘그렇게’는 어디서부터 어떻게일까 생각하면서. 해볼 만하다고, 정부지원금도 있어서 병원비도 많이 안 든다고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꾹꾹 눌러 담으며 대답했다. 거짓말도 아니고 사실이었다. 정말 사실인데, 엄마의 걱정을 불식시키기 위해 아무것도 아닌 양 말하는 딸을 연기하는 듯했다. 엄마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며칠 후 엄마가 나에게 전화해서 아기 없는 삶도 괜찮다고 무덤덤하게 말했다. 엄마에게서 처음 듣는 말이었다. 엄마는 그 말을 나에게 하게 되기까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몇 년 전의 내가 그와 비슷한 말을 할 때는 듣는 척도 안 하던 엄마였다. 아이 없는 삶에 대한 가능성을 입 밖으로 꺼내기만 해도, 저출생 대책위원회에서 나온 사람처럼 나를 단속하기 바빴다. 그래도 아이가 있는 게 좋다며, 남들 다 하는 건 해봐야 하는 거라며. 그러던 엄마가 딸의 불임 가능성을 받아들이려 하고 있었다. 이제, 엄마가 나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한다. 엄마의 마음은 내게 미안해서 본인의 임신 소식을 조심스러워하는 타인들의 마음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차마 그런 말은 못 하는 거겠지. ‘그래, 하는 데까지는 해봐야지, 시험관 시술도 생각해 본 거냐고.’ 맘카페의 난임 고민 댓글에서 흔히 볼 법한, 생판 모르는 남들이 쉽사리 하는 말을 엄마는 못 한다. 다른 어떤 이들 보다도 손주가 생기면 가장 기뻐할 거면서.
엄마가 손주를 바라는 마음보다 나를 아끼는 마음이 더 크다는 걸 알아버렸을 때, 나도 알고 싶었다. 내가 엄마를 사랑하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애틋함을. 엄마는 내 엄마여서 나를 더 애달프게 만들었다. 나를 엄마라고 불러줄 존재, 나를 다른 종류의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게 할 존재, 아직은 없는 그 존재를 기다리는 마음만큼은 지금의 나는 정말 잘 안다. 그러나 엄마가 나에게 품고 있는 마음을 나는 아직 모른다. 상상할 뿐이다. 그 마음을 알지 못할까 봐 억울하고, 알고 싶다. 점점 더 알고 싶다는 마음이 커진다. ‘그렇게까지’ 해봐야 할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