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육아가 행복하다고 느끼다 (소소 33개월)
새벽 2시에 시아버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오랫동안 병환으로 고생하셨기에 언젠가 닥칠 일임은 알고 있었음에도 슬픔이라는 두 글자로는 한없이 부족한 감정이 온몸을 감쌌다. 차로 4시간을 달려가는 동안 울다 멈추기를 반복하던 나를 진정시킨 것은 걱정이었다. 새벽 5시에 잠이 깬 소소가 다시 잠들지 않았다. 낯선 환경, 낯선 사람들, 시끄러운 소리, 피로. 낯가림 심한 소소가 장례식장에서 마주칠 총체적 난관이 치솟은 벽처럼 느껴졌다. 남편은 상주라 바쁠 테고 나 혼자 아이를 건사해야 할 텐데 '육아능력-하', '체력-하'에 거의 밤을 새운 내가 아이를 잘 돌볼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다행히도 장례식장에 도착한 소소는 두려움 대신 호기심을 보이며 의외로 잘 적응해주었다. 선방하던 소소가 보채기 시작한 것은 체력이 다한 늦은 오후였다. 시간이 갈수록 늘어가는 조문객과 함께 아이의 울음소리도 커져갔다. 밖에 나가 산책도 하고 간식도 먹여보았지만 그때뿐이었다. 코로나 때문인지 장례식장에 어린아이는 소소가 유일했고 모든 사람들의 관심이 쏠려 있었다. 온 집안 친척과 부모님 지인에게 '데뷔전'인데 보채기만 하니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저녁이 되자 피곤을 이기지 못한 소소가 폭발해버렸다. 내가 사람들을 향해 “새벽에 일어나 여태 잠을 못 자서 그래요”라고 말하는 순간 B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You cannot embarrass me. 너 때문에 엄마가 곤란하다는 느낌을 주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에 변명을 멈췄다. 그러자 나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품속에서 울고 있는 소소에게로 향했다.
“우리 소소, 새벽에 일어나서 힘들구나. 낮잠도 못 잤지. 그래서 많이 피곤하구나. 또 낯선 사람들도 많아서 더 힘들구나. 아이코, 우리 소소 지금 엄청 힘들겠네.”
이런 (극도로 피곤한) 상황에 내 입에서 저런 너그러운 말이 나오다니. 내가 말한 게 아니라 그냥 입에서 말이 저렇게 나왔다. 어찌 된 일인지 어안이 벙벙했다.
진정된 아이를 의자에 내려놓았더니 울음소리가 다시 커졌다. 이번에는 다시 안아 올린 뒤 처음부터 소소에게 말했다. “우리 소소 많이 힘들구나” 이 말을 시작으로 다독이기 시작하자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사방이 깜깜해지고 나와 아이를 냉정한 눈으로 평가하고 있을 것 같던 주변인들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마치 이 세상에 소소와 내가 단 둘만의 공간에 있는 느낌이었다. 그 공간은 밝고 따뜻했고 내가 아이를 꼭 안고 있었다.
“네가 얼마나 힘든지 이해해. 충분히 그럴 수 있어. 눈물이 자꾸 날 수도 있어.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지금껏 한 번 눕지도 못했지. 4시간 동안 차도 탔지.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을 계속 만났지. 우리 소소 얼마나 힘들었을까.”
말하면서 보니 악조건에 비해 정말로 소소가 잘 견뎌주고 있었다. 정말 심할 땐 안지도 못하게 몸부림치며 악을 쓰는데, 이렇게 엄마 품에도 잘 안겨있지 않은가.
“우리 소소 그렇게 힘든데도 잘 견뎌주고 있구나. 그렇게 피곤한데 이 정도 우는 거면 엄청 잘하고 있는 거야. 고마워. 엄마는 소소가 자랑스러워.”
평소의 내 수준에서 할 수 없었던 말들이 계속 흘러나왔다. 자랑스럽다고 말하고 나서는 스스로 굉장히 놀랐다. 그게 사실이어서 한 번 더 놀랐고 내가 그걸 인지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랐다.
사람들에게 애써 변명하기를 멈추자 비로소 아이의 입장(고통)이 눈에 들어왔다. 전하는 내용은 거의 엇비슷한데 설득하려는 ‘대상’을 바꾸자 자동으로 말의 ‘의도’까지 같이 바뀌어버렸다.
<사람들에게 말할 때> <아이에게 말할 때>
얘가 새벽에 일어나 잠을 못 잤어요. ☞ 새벽에 일어나 잠을 못 자서 그렇구나.
낮잠도 못 잤거든요. ☞ 낮잠도 못 잤지.
그래서 많이 피곤한가 봐요. ☞ 그래서 많이 피곤하구나.
낯도 좀 가리는 편이거든요. ☞ 낯선 사람들도 많아서 더 힘들구나.
죄송해요. 원래 이런 애는 아닌데. ☞ 우리 소소 지금 엄청 힘들겠구나.
다음날도 소소가 종일 보챘지만 그럴 때마다 마법처럼 관객은 사라지고 둘만의 공간에서 소소를 따뜻하게 보듬어줄 수 있었다. 남들이 어떻게 볼지, 우리 애를 떼쟁이로 기억할지 어떨지는 더 이상 중요치 않았다. 그저 나름 버티고 있는 소소가 대견하고 자랑스러울 뿐이었다. 그리고 아이도 나도 극도로 피곤한 상황에서 엄마로서 아이를 잘 보듬었다는 사실이 엄청난 자신감으로 다가왔다. 처음으로 육아가 행복할 수도 있음을 느꼈다. 더 큰 성장을 위해 허물을 벗어내는 미물처럼 나는 껍질을 한 겹 벗어내고 새로운 세상을 맞이했다.
“너 육아가 행복해?” 전날 친구와 통화하며 물었다. 아직 돌이 안 된 아기를 키우고 있는 친구는 “육아는 행복할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어”라고 대답했다. 부러웠다. 나는 늘 행복하지 않았는데. 심지어 엄마가 되었다고 각성한 이후에도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친구의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선생님, 저도 드디어 기다리던 순간이 온 걸까요?”
“절벽을 기어오르는 사람이 드디어 한쪽 손을 위에 걸친 느낌이네요.”
“그런데 장례식장에서 행복함을 느껴도 되는 건가요? 가족들에게 죄책감이 느껴졌어요.”
“장례라는 사건은 슬프고 힘들었지만, 이 사건은 별개의 사건입니다. 장례식장에서 사람들이 화투 칠 수 있잖아요.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과 반갑게 인사할 수 있잖아요. 이건 신니씨와 소소와의 관계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이 행복감이 일시적인 건 아닐까요?”
“미적분 문제를 한 번이라도 풀어낸 사람은 다시 풀 수 있습니다. 축하해요.”
이제 시작이라는 김날따 선생님의 말에 주변이 환해지는 것 같았다. 나도 육아로 행복할 수 있어. 엄마임을 각성한 지 6개월 만의 일이었다. 비록 이후에 다시 위축된 나로 돌아오기도 했지만 문제를 한 번이라도 푼 사람은 다시 풀 수 있다는 말을 되새기며 나를 일으켜 세웠다.
"신니는 일하니까 나는 신니 직장 덜 바쁜 기간에 죽어야겠다. 그래야 신니가 편하지"라고 말씀하셔서 모두가 웃고 나는 손사래를 치던 오래전 풍경이 떠오른다. 거짓말처럼 아버님은 그 말씀을 지키셨다. 여전히 아버님이 그리울 때면 눈물과 웃음이 뒤엉켜 다가온다. 몸과 마음이 그렇게 불편하신데도 돌아가시기 며칠 전까지도 영상통화를 하며 소소에게 하트를 만들어주시던 다정한 할아버지이시기도 했다. 장례식장에서 생긴 일은 생전 손주와 부족한 며느리를 예뻐해 주신 아버님이 주고 가신 사랑의 선물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