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널 위해 절벽에서 뛰어내릴 수도 있지만
그건 그냥 인간적인 거야 (소소 46개월)
요즘 소소가 점점 귀엽다. 사랑스럽다. 마침내 나에게도 이런 감격스러운 순간이 왔다. 소소를 향한 주된 감정이 사랑으로 채워진 것은 해가 바뀌고 다섯 살이 된 요즘인 듯하다. 그게 얼마나 감사한지. 그 전에는 부담, 불안, 의무감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심할 때는 그 감정들이 99%를 차지하던 시기도 두 해 남짓 있었다. 모두에게 고통스러운 시간이었고, 영원히 아이에게 속죄할 시간이다.
해서 아이가 예뻐 보일 때마다 신이 나서 속으로 깨춤을 춘다. 그리고 안심한다. 더 이상 엄마가 널 불안하게 하지 않을게. 물론 나의 내면엔 여전히 많은 숙제가 쌓여 있지만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시간을 지나 조금씩 엄마의 자리를 찾아가는 느낌이 흔들리는 나를 바로 세워준다. 아이와 나 앞에 가시밭길이 나타나더라도 헤쳐나갈 용기가 조금은 생겨난 것 같다고나 할까.
그러다 이 행복감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 발생 시각은 어제 오후 4~9시.저녁 내내 내게 호흡 곤란 증상이 약하게 나타났다는 것이 골자이며 피해자와 가해자는 모두 나다. 호흡 곤란은 내가 가진 공황장애 증상 중 하나로, 주로 스트레스가 있거나 체력이 달릴 때 예고 없이 나타난다. 하지만 미치도록 억울했다. 분명 야근 중인 남편도 없이 아이와 둘이서 늦은 오후부터 밤까지 시간을 ‘잘’ 보냈기에. ‘잘’의 기준은 몸과 마음이 과도하게 힘들거나 자리를 피하고 싶지 않았으며 전반적으로 아이가 예뻐 보였다는 게 포인트다. 그래서 뿌듯함마저 느꼈는데 도대체 왜 이 타이밍에 공황장애 증상이 나타난 건지? 아이랑 있는 시간이 그 정도로 부담됐니? 숨을 못 쉴 만큼? 아직도 그것밖에 안 되는 거야? 여전히 엄마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은 거야?형언할 수 없는 좌절과 분노가 뒤엉켜 내 뺨을 내가 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눈앞에 보이던 산의 정상이 갑자기 저만치 멀어지는 것 같았다.
다음날 언니와 오랜만에 통화하며 요즘 소소가 예뻐 보인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고 나서 말했다.
“그런데 이제는 아이가 예쁘다고 느끼는데도 어제 소소랑 놀 때 약하게 공황 발작 증상이 올라왔어. 그때 분명히 크게 힘들다 느끼지 않았는데도 말이야. 내가 아이랑 시간 보내는 걸 자각하는 것보다 더 힘들게 느끼는 것 같아. 난 아직 멀었나 봐.”
“아냐, 그건 나도 똑같아. 심지어 나는 하나가 열네 살이니까 챙겨줄 필요도 없고 오히려 아이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인데도, 네 형부 없이 아이랑 둘이서 하루 종일 있으면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이 저절로 드는걸. 그냥 육아란 원래 그런 거 아닐까?”
“정말 육아는 다 그런 걸까? 사실 나는 소소에 대한 사랑을 되찾으면 공황장애가 사라질 거라 생각했거든. 애초에 아이 낳고 나서 마음이 불안으로 가득 찬 게 공황장애가 생겨난 가장 큰 원인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아직은 내 사랑의 크기가 모자란 것 같아.”
“그건 사랑의 깊이가 얕아서가 아니야. 나는 아이에게 필요하다면 1초도 고민 없이 절벽에서 뛰어내릴 수 있어. 세상에 이런 사랑이 어디 있어. 너도 똑같잖아. 하지만 절벽에서 뛰어내릴 순 있어도 아이랑 30분 놀아주는 건 참 힘들어.”
언니의 솔직한 고백에 단숨에 머릿속이 정리되었다. 당연히 소소를 위해서라면 절벽에서 뛰어내릴 수 있지.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과 육아를 힘들어하는 마음이 양립할 수 있는 거구나. 사랑이 모자라거나 부족한 엄마라서가 아니야. 원래 힘든 일인 거야. 이제 그만 자책해도 돼.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엄마와 힘겹게 30분을 놀아주는 엄마의 대비가 우스워 낄낄 거리고 나니 몸과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그래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하나 있었다.
“맞아, 내 사랑의 깊이는 절대 얕지 않아. 나도 아이를 위해서라면 사자 우리에 뛰어들어 사자와 맞서싸울 수도 있어. 그런데 그렇게 사랑하는데도 왜 아이랑 같이 시간 보내는 걸 그렇게 힘들다고 느끼는 걸까?”
“말이 안 통하는 존재와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낼 때 느끼는 고통은 그냥 인간적인 거야. 생각해봐.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이랑은 하루 종일 수다 떨어도 피곤하지 않지만 말 안 통하는 사람이랑은 그렇게 할 수 있겠어?”
맞다! 대화가 통하지 않는 소개팅 상대와 억지로 마주 앉아있던 고역의 시간들이 대번에 떠올랐다. 잠시만 함께 해도 시간이 유난히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지는 지인이 있지 않았던가. 반면 말이 잘 통하는 친구와는 아침부터 밤까지 수다를 떨어도 힘들지가 않다. 그렇게 비교를 해보니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랑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게 왜 엄마라면 예외가 될 거라 생각했을까.
얼마 후 이 모든 스토리를 전해 들은 지인 E가 또 다른 이야기를 해주었다. E의 동생 가족이 타국으로 이주한 지 한 달이 넘었다. 오랫동안 동생의 아이들을 전담해서 키워주신 E 어머니의 상실감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지난주엔 손주들이 너무 보고 싶다며 통곡을 하셨다 했다.
“근데 있잖아. 요새 만나는 사람들마다 우리 엄마한테 하는 말이 있대.”
“손주 보고 싶으셔서 어떡하냐고?”
“아니, 얼굴이 엄~청 좋아졌다고.”
푸하하. 통곡은 하셨지만 얼굴에 생기가 도는 할머니라니. 그거구나.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야. 그냥 인간적인 거야. 그렇게 완전무결한 엄마의 기준을 또 한 겹 걷어내고, 나의 인간미를 힘껏 끌어안는다. 와라, 공황 발작! 얼마든지 겪어줄 테다. 또 다시 숨이 쉬어지지 않는 순간이 온다고 해도 이제 소소에 대한 사랑을 의심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아이를 사랑하지만 육아는 버거운 평범한 엄마 중 하나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