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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니 Feb 24. 2022

셀 수 없이 많은 추억

(소소 39개월, 47개월)

<소소 39개월>

  “해주고 싶은 건 많지만 아마 다 못해줄 거예요. 그런데 한 가지를 꼽자면 제 품이 따뜻하고 편안했으면 좋겠어요. 제 품에 안겼을 때 로아가 좀 쉴 수 있고, 약간 그런 엄마가 되자. 그 생각은 되게 확고하죠. 로아한테 가장 행복했던 게 뭐야 하고 물어보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기억들을 했으면 좋겠어요.”


  사람이 놀라면 눈이 똥그래질 때가 있는데 만약 귀도 변형이 가능하다면 그때 내 귀는 필시 똥그래졌을 것이다. 육아 예능 프로를 틀어놓고 눈으로는 아이를 좇으며 보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말이 날아와 파편처럼 꽂혔다. 다음날 혼자 있는 시간에 인터넷에서 그 장면을 찾아 몇 번이고 되돌려 보았다. 아이에게 꼭 해주고 싶은 한 가지가 편안하고 따뜻한 엄마품?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행복한 기억을 준다고? 난 그런 거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데.


  나들이를 가고 동물원을 가고 촉감놀이를 하는 건 전부 발달에 필요한 적절한 자극을 주기 위해서였다.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 동안 내가 기대한 결과물은 신체 발달, 촘촘한 시냅스, 지식 확장이었다. 아이 마음속에 어떤 추억이 쌓일지는 관심 없었다. 몇 가지 색깔을 기억하는지, 숫자를 어디까지 말할 수 있는지 등 다른 셀 수 있는 것들에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으니까. 내가 그린 건 족집게 강사 같은 엄마였음을 알았다. 너에게 필요한 건 따뜻한 엄마였는데.



<소소 47개월>

  예전 글을 읽다가 뒤통수 너머로 그 말을 들 처음 그날처럼 다시 당황해 버렸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행복한 기억이라니? 정말 그런 걸 갖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야? 난번엔 엄마의 입장에서 받아들인 말을 이번나도 모르게 자녀의 입장에서 읽어버렸다. 세상에 그런 게 정말 있다는 건지 한참을 곱씹다가 내가 성장과정에서 경험하지 못한 미지의 영역이 있음을 눈치챘다. 한순간에 외로워지고 말았다. 시에 걸 모르는 나의 메마른 정서를 아이에게 대물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숨이 막혀왔다. 심지어 지금도 나는 아이에게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무척 어려운데. 이런 나로 인해 아이가 행복한 추억은 고사하고 내가 겪은 외로움과 불안을 고스란히 떠안게 되면 어쩌지.


  정신과 상담일, 절망스러운 마음을 털어놓았다.


 "저는 어릴 때 행복한 기억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기억은 많은데 그것에 덧붙여진 감정이 없달까요. 아직 아이에게 감정 표현하는 것도 너무 어려워요. 아이에게서 일부러 멀찍이 떨어져 앉기도 하고요. 그러다 소소가 행복한 추억은커녕 저처럼 우울하게 클까 봐 두려워요."

  "그게 힘드니까 계속 휴대폰만 하면서 아이를 피하고 그랬던 거죠. 그래도 지금은 예전처럼 휴대폰만 하진 않잖아요."

  "아, 그러네요. 전에는 아이랑 있을 때 휴대폰만 보고 있었는데, 요즘엔 좀 떨어져 앉아서 그렇지 아이를 보고 있긴 하네요. 나아지고 있네요."


 그래, 좋아지고 있어!


  "최근에 소소와 행복했던 기억이 있나요?"

  "네, 오늘 아침에 소소와 간지럼 태우기를 했어요. 그때 행복했어요."

  "신니씨가 3년 전 여기 처음 왔을 때 제가 같은 질문을 했다면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없다고 했겠죠. 그땐 매일 불행했으니까."


  과거 진료실의 의자가 절망 의자라도 되는 듯 앉기만 하면 앵무새처럼 불행을 하던 시기가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질문을 듣자마자 단박에 아이와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릴 수 있었다. 기쁨과 안도감이 동시에 몰려왔다. 잠시의 행복 후 용기를 내어 정말 묻고 싶은 걸 질문했다.


  "그럼 지금처럼 계속 노력하면 정말 다 좋아질 수 있을까요?"

  "그건 누구도 모르죠. 그냥 열심히 하는 수밖에요. 신니씨가 처음 왔을 때 제가 '자, 지금부터 3년 후 신니씨는 아이와 간지럼을 태우며 행복해할 겁니다'라고 말했다면 믿었겠어요?"

  "그럼 다시는 안 왔겠죠."


  웃음이 터졌다. 웃음소리에 슬픔이 반짝 허공으로 흩어졌다. 3년 후 또 이렇게 옛날이야기를 나누며 '그땐 그랬지'라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앞으로는 아이를 대함에 있어 잘하려 하지 말고 실수와 약점을 줄여나가기로 했다. 수평선을 기준으로 영점에서 시작해서 (+)로 가는 것이 아니고 (-) 어딘가에서 시작해서 점점 영점을 향해 가는 거다. 나는 (-) 지점에서 시작한 게 맞으니까, 변하고 있으니까. 수많은 행복한 기억은 못 만들어주더라도 최소한 소소가 엄마의 따스한 시선과 가슴을 떠올릴 수 있도록, 그렇게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JTBC '내가 키운다' 4화 (2021.07.30 방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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