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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니 Feb 17. 2022

걱정 통금 시간

소소 46개월

<1월 22일 토요일 밤>

  이번 주 무리한 일정에도 몸이 잘 버텨주는가 싶더니 주말에 기어이 탈이 났다. 한 주간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드는 듯 온몸이 쑤시고 허리 통증도 심했다. 다행히 밤에 소소가 일찍 잠들어줘서 9시쯤 휴식시간을 얻었다. 글감이나 찾을까 하여 예전에 정리해둔 자료들을 뒤적이다 애착 관련 자료를 열었다. 애착 이론에 따르면 나는 불안정 애착 유형 중 회피성 애착에 해당한다. 그걸 진작 알고 있었는데도 오늘따라 읽는 동안 마음이 점점 불편해지더니 아이 또한 나처럼 불행하게 클 것 같은 절망감이 삽시간에 번졌다.


  "이거 좀 읽어 봐. 꼭 누가 나를 보면서 쓴 것처럼 나랑 똑같아. 그런데 내가 그렇게 커서 달리 아이 대하는 법을 모르는 것 같아. 그러다 나처럼 불완전 애착으로 크는 거 아닐까. 우리 소소 어떡해."

  

  남편에게 기대했던 것은 모종의 희망 내지 격려였을 것이다. 그런데 남편 입에서 흘러나온 건 제3의 반응이었다.

  "그렇구나. 음. 그런데 부정적인 생각이 심한 걸 보니 너 진짜 몸이 피곤한가 봐. 아침부터 계속 몸 안 좋다고 말했잖아."

  

  오잉. 남편의 반응에 한순간 얼이 나갔다가 돌아왔다. 일리 있는 말이었다. 전에도 컨디션이 안 좋은 날 밤 육아를 못했다며 자책하다가 남편이 사실이 아님을 깨우쳐 준 적이 있었다. 게다가 바로 어제는 사고방식이 많이 긍정적으로 변했다며 자축까지 했는데 이렇게 단숨에 절망의 구렁텅이로 추락하다니 뭔가 앞뒤가 안 맞았다. 남편의 가설이 맞다면 지금 내가 느끼는 절망은 진실이 아닐지도 몰라. 일단 생각을 멈추기로 하고 예능 프로를 틀어 주의를 전환시켰다.     


<1월 23알 일요일 낮>

  다음날 오후에 갑자기 어젯밤의 번민이 떠올랐다. 그땐 분명 아이와 나의 운명이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다고 느꼈는데 그런 중차대한 사안이 아침 눈 뜨자마자가 아니라 오후가 돼서야 기억나다니, 벌써 내가 뭔가 헛짓거리를 한 것 같다는 냄새가 솔솔 났다. 걱정했던 내용을 머릿속에 주욱 떠올려보았는데 생각보다 더 덤덤하게 느껴지고 일단 부모니까 최선을 다해보자는 단순한 생각이 들었다. 남편이 옳았다. 내가 느낀 절망이 진실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안도감으로 가슴을 쓸었다.   


<1월 31일 밤 >

  소소를 재우고 나서 밤 10시가 다 되어 육아서를 펼쳤다. 통제적인 엄마에 대한 예시를 읽어보니 그게 바로 나였다. 통제적인 엄마가 아이에게 끼치는 나쁜 영향에 대해 읽으며 그간의 언행을 반성했고, 거기까지는 좋았다. 책에서는 친절하게도 아이를 향한 단계적인 접근법은 물론 엄마가 말해야 할 대사까지도 세심하게 제시하고 있었다. 생뚱맞게도 이 해결책 단계에서 좌절의 회오리가 또다시 몰아쳤다. 이 매뉴얼은 너무 복잡해. 나는 이 매뉴얼대로 해내지 못할 거고 결국 아이는 상처받고 말 거야. 나 때문에 아이가 불행할 거야. 다시 절망에 압도당했다. 그날 밤 무언가에 쫓기는 악몽까지 꿨다.

  

<2월 1일 낮>

  자고 일어나니 거짓말처럼 어젯밤의 좌절이 느껴지지 않았다. 상황을 복기해보니 책에서 제시한 복잡한 해결책이 부담이 되긴 하지만 따라 하다 보면 어떻게든 되겠지 싶었다. 이 느낌이 몹시 익숙한 것이 지난 주말의 상황의 데자뷔라는 걸 알았다. '너 많이 피곤한가 봐'라는 남편의 말이 떠올랐다.



  일주일 간격으로 같은 상황을 두 번이나 겪고 나서 내 삶에 오래도록 존재한 패턴을 마침내 찾아냈다. 바로 밤이 깊어갈수록 몸은 피곤해지고 몸이 피곤하면 부정적인 사고가 증폭되기 쉽다는 것이다. 심야에는 비교, 과몰입, 확대 해석, 억측, 지나친 일반화의 오류, 꼬리물기, 인지 왜곡이 빈번히 발생하고 자연스레 열등감, 자격지심, 열패감, 우울감 등 커지는 감정에 압도되어 스스로를 루저로 결론 짓고 나서야 마침표를 찍는다. 전에 이런 일을 겪었을 땐 일회성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패턴이었다.

 

  돌이켜보면 남편과 장거리 연애를 하던 시절 밤늦은 시간에 통화를 하다 언쟁이 불거지면 좀처럼 진화가 어려웠다. 결혼 후에도 지리멸렬한 말싸움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주로 심야였다. 밤이 늦을수록 인내심이 줄고 좀처럼 화를 주체하기가 쉽지 않다는 법칙을 알아낸 우리 부부는 암묵적으로 심야에는 되도록 심각한 이야기는 피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그게 부부싸움의 영역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을 줄이야.


  바깥이 어둠으로 채워질수록 내 마음에도 어둠이 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늦은 밤에 과도하게 좌절했던 상황들이 떠올랐다. 육아서를 보면 내 아이의 미래가 안보였다. 심리책을 보면 내 인생은 이미 망한 것 같았다. 하루를 돌이켜보면 잘해주지 못한 것만 생각났다. 육아용품을 검색하면 이것도 사야 할 것 같고 저것도 사야 할 것 같아서 끝없이 검색해야 했다. 잠자리에서 SNS를 보면 우리 애만 뒤쳐지고 나만 부족한 엄마인 것 같았다. 가장 방어력이 떨어지는 시간대에 가장 위험한 손님들을 초대한 셈이었다.


  물론 세상이 잠든 적막한 시간에 갖가지 생각들을 떠올리는 건 나 혼자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부정적인 생각이 불쑥 떠오르는 것과 내가 그 상황이 찾아오도록 레드카펫을 깔아주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레드카펫의 종류에는 대표적으로 SNS, 심리책, 육아 등이 있다. 체력이 떨어지는 심야에는 이것들이 편향되게 해석되거나 과도한 부담을 줄 여지가 크다고 본다. 물론 잠가둔 빗장을 부수고 불쑥 떠오르는 불청객이야 불가항력이다. 그러니까 이름이 불청객이겠지. 그건 어쩔 수 없다 쳐도 적어도 감당 못할 부정적인 생각을 초대하는 의식은 하지 않는 거다.


  그리하여 걱정의 통금 시간을 정했다. 앞으로 밤 9시 이후에는 마음의 빗장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심각한 생각 손님을 불러들이지 않는다. 육아, 심리책, SNS를 피한다. 남편에게 심각한 주제를 꺼내지 않는다. 특히 아이의 미래를 점치거나 나의 엄마 노릇 점수를 매기는 대화를 삼간다. 대신 그 시간에는 일단 잠드는 걸 목표로 하되 만약 깨어있다면 좋아하는 TV 프로를 보고, 가벼운 소설과 에세이를 읽고, 무겁지 않은 글을 쓰며 하루 동안 수고한 내가 쉴 수 있는 시간을 만기로 한다.


 < 2월 10 목요일  >

  소소가 밤에 자러들어갔다가 침대 모서리에 머리를 살짝 부딪히더니 온갖 짜증을 내며 심하게 오랫동안 울었다. 달래다 지쳐서 한쪽으로 물러나 앉았다가 걱정에 빠져들었다. 이런 면이 안 고쳐지고 계속 이렇게 크면 어떡하나, 어린이집 선생님에게 미움받으면 어떡하나, 사회생활은 잘할까 생각이 꼬리를 물다가 아차 하고 시계를 확인했다. 9시 30분이었다. 9시 통금시간을 떠올리며 나는 걱정 스위치를 꺼버렸다. 엄마니까 걱정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게 옳지 않을까 하는 찝찝함이 들었지만 통금시간까지 설정했던 자신을 믿기로 했다. 아이를 재우고 나와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를 봤다. 다음 날 낮에 어젯밤 일을 떠올렸을 땐 그냥 별 거 아닌 일이 되었다. '저러다 크면서 좋아지겠지 뭐'가 끝이었다.

  

  약 보름간 걱정 통금 시간을 실천한 후기는 별 다섯 개이며 타인에게 추천할만하다. 여전히 걱정 스위치를 끌 때마다 약간의 심리적 저항이 있긴 하지만 습관이 되면 줄어들거라 본다. 심야에 쓴 연애편지는 부치지 말라는 말은 진리이지만 애초에 심야에는 편지를 안 쓰겠는 규칙을 정해놓으면 더 안전하지 않을까.


피곤할 때에는 사고를 멈춰라 - 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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