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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영 Sep 16. 2020

빈민촌이 된 보물섬, 트레저 아일랜드

샌프란시스코의 시간

오전 7시가 조금 넘은 시간, 넓은 창가로 환하게 비추는 따스한 햇살에 몸을 부스스 떨며 잠에서 깼다. 장시간 운전에 꽤 고단했는지 침대에 눕자마자 스르르 감았던 눈을 떴을 땐 이미 아침이었다. 모처럼 불면증에서 벗어나 숙면해서인지 몸이 개운했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 엎드린 채 방 안을 둘러봤다. 전날 밤늦게 이곳에 도착해 대충 확인했던 것처럼 방은 넓었다. 옅은 신음과 함께 기지개를 켜며 고요한 적막을 깨는 순간 옆방에서 드르렁거리며 누군가 코 고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렸다. 어제 거실에서 열심히 게임을 하던 이들 중 한 명이겠거니 생각했다. 벽은 합판으로 만들었는지 방음이 전혀 되지 않았다. 얇은 나무로 만든 방문을 열고 1층으로 내려갔다. 거실 테이블 위엔 빨간색 플라스틱 종이컵들이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고 먹다 남은 과자 부스러기들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것들을 피해 조심스럽게 부엌으로 발을 옮긴 뒤 별생각 없이 냉장고 문을 열었다. 갖가지 양념들과 채소, 반찬거리들이 가득했다. 남자 셋이 사는 집치곤 나름 잘 챙겨 먹는 듯 보였다. 낡은 서랍장 안엔 식기도구들이 가지런히 정돈돼 있었다.

야경 명소인 트레저 아일랜드

리저리 고개를 돌려가며 구석구석 집을 살피는데 꽤 가까운 거리에서 흑인들이 주로 쓰는 슬랭이 들려 흠칫 놀랐다. 그 소리가 향하는 거실 창문으로 자연스럽게 시선을 옮겼다. 창문에 내걸린 블라인드 뒤로 사람들이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제야 방뿐만 아니라 집 전체가 얇은 합판으로 지어진 사실을 알았다. 나는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아침 이슬을 머금은 습한 바닷 공기는 산뜻했다. 만성 비염을 앓고 있는 나로서는 최적의 환경이었다. 사방이 2층 주택으로 다닥다닥 붙어 둘러싸인 그곳은 생각보다 꽤나 낡아 보였다. 천진난만한 미소를 보이며 신기한 듯 날 훔쳐보는 어린 흑인 아이들을 보며 소박한 동네 정취가 느껴졌다. 낯선 곳이 주는 두려움을 안고 동네를 둘러보기 위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주택이 즐비한 곳을 빠져나와 왕복 2차선의 좁은 도로로 걸어 나왔다. 차 한 두대가 간간히 지나다닐 만큼 마을은 한적했다. 커다란 야자수가 넓게 심어진 도로를 따라 10여분쯤 걸어 나오자 오른쪽으로 광활한 바다가 펼쳐졌다. 섬과 도시를 잇는 베이 브리지 옆으로 샌프란시스코의 도심이 선명하게 펼쳐졌다.


트레저 아일랜드


나는 아름다운 전경에 넋을 잃고 한참 동안 멍하니 서있었다. 시간이 흐른 뒤 철썩거리는 소리에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출렁이는 파도는 방파제에 부딪히며 하얀 포말을 만들었다. 트레저 아일랜드, 샌프란시스코의 랜드마크가 된 인공 섬의 첫인상이었다.


트레저 아일랜드(Treasure Island)
: 샌프란시스코와 오클랜드를 잇는 베이 브리지 가운데 위치한 섬. 원래 샌프란시스코의 제2공항으로 SFO를 증축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1997년까지 미 해군 군사 시설로 사용됐다. 각종 레이더 기지 등 핵전쟁에 대비한 주요 교육 훈련 센터로 사용되면서 방사능 수치가 환경 보호청 기준 인간 수용 제한치의 400배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인디애나 존스와 행복을 찾아서 등 한국에서 잘 알려진 영화 일부 장면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키아누 리브스가 주연한 영화 매트릭스에서 그가 총알을 피하는 장면 역시 이곳에서 촬영됐다.
영화 매트릭스 중 총알 시간 장면


"일찍 일어났네요?"

"네."


한 시간 정도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땐 룸메이트 세 명 모두 깨어있었다. 어젯밤 주차장에서 집으로 안내했던 K가 물었다.  


"몇 살이에요?"

"스물일곱입니다."

"그럼 여기서 제일 막내네."

은근히 서열을 나누려는 그의 속내를 알아챈 나는 서둘러 말했다.

"말씀 편하게 하세요."

"그래. 같이 살아야 하니까 말 편하게 놓을게."


그들은 모두 같은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이었다. 한 명은 대학원을 다녔고 두 사람은 나이가 나보다 많았음에도 학부생 신분이었다.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뒤늦게 미국 학부로 유학 온 상태였다.


"근데 여기는 어떻게 알고?"

"SF 코리언 사이트 보고 왔어요."

"야. 그런 걸 왜 물어? 우리도 그랬잖아."

"하긴."

"근데 그거 알아? 여기 별의별 범죄가 다 일어나는 곳인 거. 어제 우리 집에 놀러 왔던 친구 봤지? 걔도 이 동네 사는데 지난주에 유리창 깨고 누가 들어와서 컴퓨터랑 골프채랑 싹 다 쓸어갔잖아."

"작년인가? 살인범이 섬에 숨어있다가  잡히기도 했어."


아침 산책을 하며 느꼈던 조용하고 평화로운 동네 분위기가 순식간에 살벌한 범죄현장으로 바뀌던 순간이었다. 그의 말이 사실인지 알 수 없으나 내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유학하던 시기에도 어린 여자 아이 유괴범이 트레저 아일랜드에서 붙잡히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최근에도 살인이 벌어진 것으로 확인됐다.)


"근데 왜 여기 살아요?"

"렌트가 싸잖아. 도시 가봐. 스튜디오 천 불은 그냥 넘어가. 여긴 400불이면 내 방 하나 충분히 얻으니까."


2009년 샌프란시스코 도심의 스튜디오(원룸)의 한 달 렌트 가격은 최소 1000불에 달했다. 미국에서 가장 물가가 비싼 도시로 유학을 온 것이었다. 나는 트레저 아일랜드에서 도심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나서야 내가 사는 동네가 어떤 곳인지 비로소 깨달았다. 버스 안은 언제나 코를 찌르는 악취가 진동했고 마리화나와 알코올 냄새가 진동하는 눈 풀린 중년 백인들이 가끔씩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동네 한 바퀴를 돌아 베이 브릿지로 넘어가기까지 남루한 차림의 히스패닉 사람들과 흑인이 탑승객의 대다수였고 나머지는 한국인 유학생과 중국인 유학생들이었다. 재밌는 사실은 베이 브릿지를 지나 트레저 아일랜드로 가기 직전에 위치한 예르바 부에나 섬엔 멋진 저택들이 즐비해 있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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