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우리 집 밭둑에는 옥수수가 있었다. 옥수수가 긴 수염을 축 늘어트리면 손바닥으로 머리를 쓸듯 어루만져도 보고 가끔 심술을 부리며 뺨을 치듯 옥수수수염에 싸다구를 날리기도 했었다. 언니의 "뭐 하는 거냐?"는 질문에 텔레비전에서 본 드라마를 따라 하는 거라고 대꾸를 했었다.
언니는 "꼭 싸우는 연습하는 것 같구나!" 그랬었다.
그 수염의 끝이 윤기 없이 까맣게 말라버리면 옥수수가 잘 여물었다는 알림이었다. 뭐든지 귀하던 그 시절에 옥수수는 최고의 먹거리였는데 우리 집 옥수수는 찰옥수수였다. 그것도 까만 찰옥수수였기에 그 쫀득하고 고소한 그리고 입속 낮은 곳에서 느껴지는 단맛은 일반 옥수수와 견줄 수가 없었다.
내 옥수수 사랑은 특별하다. 막내를 임신 중에 옥수수가 먹고 싶었는데 얼마나 궁금하던지 자다가도 생각이 날 지경이었다. 마침 남편이 직원들과 무슨 꽃놀이 행사장엘 다녀온 날, 거기에 옥수수가 없었냐고 물었더니 왜 없겠냐고 같이 간 사람이 사줘서 먹고 왔단다. 그럼 내 생각이 안 나더냐고, 임산부가 먹고 싶다고 했는데 그냥 왔냐고, 섭섭하고 속상한 마음을 알아달라며 한참 동안 토라져 있었다.
나의 유별난 옥수수 사랑은 웬만한 주변 사람들도 알고 있다. 뭘 사다 줄까 고민 없이 옥수수를 사 온다든지, 옥수수 먹다가 내가 생각이 나서 가져왔다든지, 하다못해 옥수수가 듬뿍 들어간 빵을 봐도 내가 생각난다고 한다. 그래서 옥수수 철엔 이런저런 이유로 풍성하게 누리고 있었지만 요 며칠 동안은 옥수수를 자제하고 있다.
남편 때문이다.
(아는 분들은 아실... 글을 썼다가 삭제한 그 일들과 여러 가지 심정, 그 복잡한 마음을 다 전할 수 없고 남편도 나름 힘들거라 조금 이해를 해 보려는 그 상황)
지난주 수요일, 저녁 준비를 마치고 잠시 여유가 있었다.
슬그머니 남편이 분주하게 움직이더니 옥수수를 삶았다. 어릴 적 엄마의 까만 찰옥수수는 댈 봐 아니지만 그래도 대략 까만 알갱이가 대충 보이는 찰옥수수를 내게 내밀었다. 속으로 헛웃음이 나왔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어릴 때 옥수수수염을 상대로 싸움을 연습할 때 그 순간은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몰입했었기에 어쩌다 속마음 감추는 게 가능하다.
민망해진 남편이 혼자 옥수수를 대충 먹고 남은 것은 내 눈에 보이도록 놓아두었다. 그 옥수수는 일에 방해되지 않게 한쪽으로 치워졌다가 냉장고로 들어갔다가 다시 냉동실로 옮겨졌고 주일이 지난 뒤에 아침식사로 먹었다. 자다가도 일어나서 먹을 옥수수를 곁에 두고 오래 참느라 고생했다.
엊그제, 저녁 준비를 하는 중에 남편은 또 옥수수를 삶았다.
"이거 먹어봐."
"됐어요. 나중에 먹을게."
음식 준비를 마치고 옥수수를 보았다.
오래 참을까 말까 하는 내 맘이랑 닮은, 군데군데 까만 알갱이가 보이다 말다 하는 찰옥수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