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추억을 많이 숨겨야 하는 때
거의 10년을 타고 다닌 자가용을 처분했다. 친척이 해외로 발령이 나서 다른 사람에게 넘기기 아깝다며 내가 산 자가용이었다. 나도 친구가 아내의 운전 연습용으로 중고차가 필요하다고 해서 그 차는 다시 친구에게 넘겼다. 그렇게 그 차는 서로 아는 사람들의 자가용으로 계속 이어져 가고 있다.
차를 팔기로 결정하고 나서 아이들은
'우리의 추억이 깃든 차인데 오늘이 마지막이야?'라고 하면서 무척 섭섭해했다. 아이들의 감성을 어른들은 따라가지 못하는 가 보다. 난 그냥 어떻게 차를 처분해야 하는지 에만 신경을 썼는데 말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 가족과 많은 시간을 함께한 소중한 차였다.
매년 한두 번씩은 다녀왔던 강원도 여행을 함께 했었다.
먼 부산 친척집을 방문했을 때도 함께였다.
주말마다 어디든 우리 가족의 발이 되어 함께 했었다.
가족이 아플 때 병원에도 함께 했었다.
둘째 태어날 때 그 갓난아기의 첫 이동수단이기도 했었다.
예전의 다른 친척의 추억을 담았었고, 우리 가족의 추억을 담고, 내 친구 아내의 차로 그 가족의 추억도 담을 것이다. 그렇게 그 자가용은 가족의 추억을 담아가고 있다.
사실 추억은 우리들 각자의 기억 속에 있다. 그러나, 그 추억을 우리의 기억 속에서 끄집어내는 것이 있다. 함께한 장소 또는 물건, 사람, 향기 등이다.
큰 아이 방에 있는 조그마한 인형이 있다. 지금은 책상 한 켠에 놓여 있다. 사실 그 인형은 큰 아이가 태어날 때 마련했던 인형이다. 그 조그마한 갓난아기가 물고 빨고 하던 애착인형은 아직도 큰 아이와 함께 하고 있다. 아이는 기억하고 있다. 그 인형에서 풍기는 향기를 통해 그 갓난아기 시절의 부모의 사랑을 말이다. 물론 나도 기억하고 있다. 이젠 색이 바래졌지만 그 인형의 모습을 통해 그 갓난아기의 사랑스러운 눈빛을 말이다.
다 찢어진 책 한 권이 있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아이는 그 책을 너무 좋아했다. 책을 읽어 주면 까르륵까르륵 웃었다. 그 웃는 모습이 너무 이뻐서 계속 읽어주다 보면 아이는 어느새 책 안의 곰돌이를 조그마한 손으로 쥐어 뜯고 있었다. 책은 스카치테이프 붙인 자국으로 너덜너덜했지만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아주 오래전 대학 1학년 때 사귀던 여자친구와 헤어졌던 때가 갑자기 생각이 난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별이 처음이라 좀 힘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녀와 관계되는 모든 것을 없앴다. 사진과 주고받았던 편지등 모두를 없앴다. 마음속의 추억들을 버리지는 못해서 추억이 깃들어져 있는 모든 것을 버렸다. 혹여나 그 물건들을 보고 다시 헤어진 여자친구를 기억해 내면 마음이 힘들어질 것 같아 서였다. 결국엔 뭔가 기억이 나더라도 추억할 물건이 모두 없어져 버려서 기억 속에서도 마음속에서 조금씩 희미해져 갔다.
가장 큰 헤어짐은 가족의 죽음일 것이다. 예전에 시골에서는 가까운 친척어른이 돌아가시면 쓰시던 물건을 태웠던 기억이 난다. 망자가 이승에 미련을 두지 말고 하늘나라고 가라는 의미 일수도 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돌아가신 분과 이별하는 하나의 과정이었던 것 같다. 물론 추억을 하나 둘 끄집어낼 수 있는 사진이나 쓰시던 물건을 한 곳에 잘 두고 기억하고 싶을 때 꺼내 보는 경우는 있다. 그러나, 돌아가신 분의 옷가지나 물건들은 대부분 정리한다. 보이는 곳에 물건이 있으면 내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 물건을 통해 슬픔이 밀려오는 경우가 있어서인 것 같다. 돌아가신 분을 추억할 준비를 하고 그 물건을 꺼내 보는 것과는 차이가 나서 일 것이다.
글을 쓰며 주위를 둘러본다. 하나 둘 그 물건 속에 담겨 있는 추억이 떠오른다.
그러나, 그 추억이 깃든 최고봉은 함께 한 가족인 것 같다. 아이들 웃음소리에 문득 함께 재미있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아이들 재잘거림에 함께 했던 그 순간순간들이 떠 오른다. 그 추억들은 또 꼬리에 꼬리를 물고 웃음보따리가 된다.
아이들도 언젠가는 곁을 떠나 독립을 하겠지. 그때 아이들의 물건을 통해 추억을 끄집어내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이들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하며 이 공간과 물건들에 추억을 심는 일을 해야겠다.
지금은 추억을 최대한 많이 숨겨야 하는 때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