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아빠~” 먼저 걸어가겠다고 뒷모습도 보이지 않게 앞서가던 아이가 나에게 뛰어왔다. “왜 그렇게 헐떡이면서 거꾸로 뛰어왔어?” 잠시 숨을 고르게 하고 자초지종을 들어보았다. “아빠! 내가 앞서서 걸어가다가 어떤 할아버지를 만났는데, 그 할아버지가 우리나라가 왼쪽에 있는지 오른쪽에 있는지 물어봤어. 우리나라가 어느 쪽에 있어, 아빠?”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린지 도통 감이 오질 않았다. “음.. 그 할아버지한테 우리 같이 가볼까? 아빠가 다시 한번 물어볼게!” 아이 손을 잡고 학교에 늦은 학생들처럼 우리는 빠른 걸음으로 할아버지를 찾으러 갔다. 파란 배낭에 지팡이를 짚으며 걸어가시는 할아버지는 멀지 않은 곳에서 혼자 걷고 계셨다.
“헬로(안녕하세요?)~” 할아버지 옆으로 가서 인사를 했다. 할아버지는 독일에서 오신 백발머리의 키 큰 키다리 아저씨 같은 느낌이었다.
(한국어 패치 작동!)
“아~ 안녕하신가요?” 할아버지는 인자한 미소를 띠며 인사하셨다. “네, 저는 이 아이 아빠입니다. 아이가 갑자기 저한테 뛰어와서 할아버지께서 우리나라 위치를 물어보셨다고 하길래 다시 여쭤보러 왔어요.” 친절하신 분 같아서 편안하게 묻고 싶은 것을 여쭤보았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껄껄껄~ 웃으시면서 아이의 어려웠던 질문을 해석해 주셨다. “아, 제가 길을 가는데 아이가 빠른 속도로 오길래 길을 비껴주었죠. 근데 문득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한국에서는 좌측통행인지 우측통행인지 말이죠!” 나 역시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박장대소하며 웃었다. 아이는 영어로 대화하는 내용을 몰라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나와 할아버지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독일 할아버지는 추월하려는 뒷사람에게 길을 비껴주면서 궁금해서 물어본 것이었고, 아이는 영어 표현 중에 “Korea~ (블라블라) ~~ left? ~~ right?” 이 세 단어만 알아들었던 것이다. 한참을 박장대소하고 나서 할아버지께 한국은 우측통행이고 자동차 운전석은 왼쪽에 있다고 말씀드렸다. 할아버지와 한참을 대화하고 나서 아이 손을 잡고 다시 걸으면서 하나하나 대화 내용을 해석해 주었다. 아이는 그때서야 “아~ 그런 말이었구나!” 하고 씨익~ 웃으면서 걸어간다. 그 순간 문득 또 다른 깨달음이 뒤통수에 노크를 했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이 이제 부끄러워하지 않고 외국인들의 영어 질문을 듣기 시작하네?’
그렇다. 아이는 온통 외국인들뿐인 밀포드 트레킹 코스에서 영어를 들으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난 그냥 아이 손을 잡고 함께 걷기만 했을 뿐인데..
시대가 변해 이제 일방적인 주입식 교육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다. 디지털 시대에는 더욱더 그렇다. 아이가 스스로 선택하고 결과에 책임질 때 학습효과는 극대화된다. 바로 자기 주도 학습이다. 스스로 하는 자기 주도 학습은 적절한 플랫폼을 제공할 때 가능하다. 아이가 재미나 필요를 느껴서 스스로 하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여행은 아이의 성장을 위한 완벽한 플랫폼을 제공한다. 여행의 환경에서 스스로 하는 재미와 즐거움이 아이를 주도적으로 만들어 준다. 낯선 문화와 처음 만나는 여행지는 아이의 성장을 견인하는 원동력이 된다.
자기 주도 학습의 핵심은 플랫폼에 달려 있다
4차 혁명 디지털 시대에 들어서자 모든 사업의 형태가 플랫폼 비즈니스로 변화하고 있다. 사람들의 대화와 채팅의 플랫폼인 ‘페이스북’, 숙박을 공유하는 플랫폼 ‘에어비앤비’ 등 그 종류와 분야는 수없이 많다. 기존의 비즈니스들도 사람들이 스스로 자유롭게 활동하는 플랫폼 형태로 바뀌고 있다. 아이 교육도 일방적인 주입식 교육이 더 이상 효과가 없다는 것을 많은 사람이 공감하고 있다. 자기 스스로가 흥미와 필요를 느껴 공부하고자 할 때 성과가 나오는 것이 자기 주도 학습이다. 사실 모든 부모들의 궁극의 교육목표가 아닐까? 이제 아이 교육도 학원과 같은 일방적인 주입식 교육이 아닌 자기 주도적 플랫폼으로 접근해야 할 시대가 도래했다.
자기 주도 학습의 핵심은 스스로 한다는 것에 있다. 스스로 선택하고, 그 결과에 책임을 지는 것이다. 자신의 결정에 따른 성과와 실패에 기쁨과 반성을 느끼는 것이 자기 주도 학습이다. 아이가 스스로 선택하고 시행착오를 거쳐 성공을 경험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주는 것이 핵심인 것이다. 환경 조성은 다른 말로 ‘멍석을 깔아주다.’ 또는 ‘플랫폼’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아이의 공부 방법에 하나하나 간섭하거나 코칭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고 깨닫도록 최적의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멍석을 깔아주고 신발까지 준다면 최고가 아닐까? ^^
뉴질랜드 밀포드 트레킹에서는 전 세계에서 온 다양한 나라의 50여 명과 하루하루를 함께하게 된다. 대부분 고등교육을 받은 부모, 인성이 훌륭하고 자연을 사랑하는 가족들이다. 가장 많은 직업은 교사였다. 미국팀에는 영화감독과 대학생도 있었다. 유럽팀에는 80대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계셔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여기에 뉴질랜드의 젊은 가이드팀은 활기를 더했다. 모두가 훌륭한 지성인들이었고, 그 자체로 집단지성의 모임이었다. 이런 그룹 속에서 어울리며 4박 5일 간을 함께 먹고, 자고, 걷는다는 건 큰 행운이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이에게도 부모에게도 최고의 교육 플랫폼이었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한국형 Garage 문화가 필요하다
올해로 85세이신 아버지의 소원을 풀어드리려고 40년간 못 만나셨던 미국의 고모님을 뵈러 LA로 갔다. 삼대(Three Generation)가 함께 하는 멋진 추억을 위해 13살 아들도 함께 데려갔다. 이산가족 상봉 수준의 극적인 만남에 나 역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LA에서 멀지 않은 세계 자연유산 그랜드 캐니언도 삼대가 함께 갔다 왔다. 말로만 듣던 그랜드한 캐니언의 모습에 감동이 식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저녁 LA 근처에 사는 친했던 학교 선배를 찾아가 아이와 함께 하룻밤을 자고 온 날이었다. 그 날 선배 집의 Garage(차고)를 보고 나는 그랜드 캐니언보다도 더 큰 깨달음의 충격을 받았다.
대학생 시절 스티브 잡스가 그 유명한 애플컴퓨터를 창조해 낸 것은 그의 집에 딸린 Garage에서였다. 미국 일반가정의 Garage는 차고이면서 모든 연장, 수리 기구들이 쌓여있는 창고이기도 하다. 그 집안의 만물상 같은 공간인 것이다. 선배네 Garage를 들어가는 순간 내게 ‘아하! 모멘트(Aha! Moment, 영감을 얻는 순간)’가 왔다. 그 Garage 한쪽 귀퉁이에서 애플컴퓨터의 프로토타입(최초 샘플)을 만들고 있는 스티브 잡스의 모습이 연상되었던 것이다. 전 세계 인류를 놀라게 한 애플컴퓨터는 미국 집집마다 하나씩 있는 그 흔한 Garage에서 시작되었다.
미국에서 Garage는 단순한 차고와 창고를 넘어, 아이들과 사람들의 상상공작소 역할을 해 왔다. 갖가지 물건들과 연장들이 쌓여있고, 모든 걸 어지럽게 던져놔도 되는 자유로운 공간이다. 어린아이에게는 모든 것이 놀이기구가 되고, 놀이터가 되는 공간이다. 대부분 아파트에서 사는 한국의 아이들은 놀이터라는 정해진 공간에서만 놀아야 한다고 배운다. 장난감을 가지고 놀아도 곧 깨끗하게 치우고 정리해야만 칭찬을 받는다. 창의성에 도움이 된다는 책을 읽고, 음악과 미술학원에 가서 돈을 주고 창의성을 배운다. 미국의 Garage와 한국의 놀이터가 비교되면서, 그날 밤 나는 제대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스티브 잡스의 성공신화를 보면서 Garage의 존재를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인지'는 못하고 있었다. 미국의 한 가정집에 와서 내 눈으로 직접 그 Garage를 보고 나서야 인식하고 깨닫게 된 것이다.(이래서 경험이 중요한가 봐요..) 수많은 미국 영화와 드라마를 보면, Garage에서 무언가를 만들고 발명하는 장면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영화 ‘백 투 더 퓨처’의 타임머신 자동차도, ‘트랜스포머’의 로봇을 고쳐준 곳도 모두 Garage였다. 미국의 수많은 SF영화에서는 발명과 창조의 공간으로 Garage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영화뿐만이 아니다. 비즈니스 세계에서도 많은 위대한 기업들이 자신들의 작은 Garage에서 첫 발걸음을 내디뎠다.
애플(Apple)은 1976년 스티브 잡스가 워즈니악과 함께 자신의 차고에서 최초의 애플컴퓨터를 개발하며 시작됐다. 퍼스널 컴퓨터(PC)의 시대를 시작하고, 스스로 PC의 시대를 끝낸 애플의 전설이 시작된 곳이다. 구글의 래리 페이지 역시 캘리포니아 멘로 파크에 위치한 Garage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자신의 소유도 아니었고, 월 1,700달러의 임대료를 내고 방과 차고를 빌려서 시작했다. 유튜브도 Garage에서 처음 사업을 시작했고, 18개월 만에 16억 5천만 달러로 구글에 매각되었다. 세계 최대의 인터넷 소매업체 아마존의 시작도 시애틀에 있는 CEO 제프 베조스의 집 Garage에서였다. Garage는 위대한 기업들의 요람인 것이다.
우리는 아이들의 창의성을 위해 레고를 사주고 학원에 보낸다. 이는 창의성에 대해 우리가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창의적이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기존의 익숙했던 생각이나 방법과 다를 때에 쓴다. 본질적으로 보면, 기존의 학습방법이나 이론을 적용하는 것 자체가 창의성을 헤치는 것이다. 학원에 보내고 똑같은 방법과 잣대로 평가하는 것 자체가 창의성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마이클 무어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다음 침공은 어디?(Where to invade next?)>를 보면, 핀란드의 뛰어난 교육체계 이야기가 나온다. 그곳 한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의 말이 인상적이다. “미국의 표준화된 시험방식은 아이들의 창의성을 헤치고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타고난 창의성을 발현하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자유롭게 해 볼 수 있는 놀이터가 필요하다. 미국의 Garage는 어른의 눈에는 연장이고 고물이지만, 아이들에게는 놀잇감이고 장난감이다. 상상도 못한 아이디어는 기존의 것들을 장난감 가지고 놀 듯 새롭게 바라볼 때 생긴다. 어지럽혀도 혼나지 않는 마음 편안한 놀이공간이 필요하다. 모든 아이들은 저마다의 독특한 창의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창의성이 없는 것이 아니라 발현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도 미국의 Garage와 같은 자유로운 놀이공간이 필요하다. 환경 조성과 플랫폼이 중요하다는 부모의 인식전환이 시급하다.
아이 교육에 있어서 나는 방목을 추구하지만 방목할 잔디가 없었다. 미국의 가정집들처럼 Garage를 만들어 선사하고 싶지만, 내 주위는 온통 빼곡한 사각형 집들과 사각형 하늘뿐이다. 내가 만들어 줄 수 없다면 그런 곳으로 아이를 데려가고 싶었다. 아이에게 가장 좋은 것, 최고라고 생각되는 걸 주고 싶었다. 그래서 아이 손을 잡고 세상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아이가 네 살 때부터. 그리고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의미 있는 추억을 만들고 싶어 전화도 터지지 않는 청정 유네스코 지정지역인 뉴질랜드의 밀포드 트레킹 코스로 갔다. 그곳에서 나는 내가 추구하던 아이를 위한 완벽한 플랫폼을 경험하게 되었다.
여행은 아이의 성장을 위한 완벽한 플랫폼을 제공한다
뉴질랜드 밀포드에서 하루하루 달라지는 아이를 보며, 플랫폼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었다. 스마트폰이 무용지물인 그곳에서 처음엔 뽀로통했지만, 트레킹이 시작되자 아이는 빠르게 적응하기 시작했다. 한국이라면 하지 않을 행동과 생각들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첫 번째로, 읽기 시작했다. 영어가 들리지 않으니까 한국인용 안내 책자를 눈여겨보며 이해하고, 기억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대에박!
두 번째로, 듣기 시작했다. “아빠, 저 아저씨가 뭐래?”라고 묻는 횟수가 잦아지기 시작했다. 네이티브 스피커들의 빠른 일상 대화를 알아듣지 못해 혼자 고립되고 우울해하면 어쩌나 내심 걱정을 많이 했었는데.. 스스로 자꾸 묻기 시작하니 신기하다!
세 번째로, 쓰기 시작했다. 매일 바뀌는 숙소에 도착할 때마다 스스로 방문록에 자신의 이름과 날짜를 쓰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썼나 보기도 하면서..
아빠가 뭐라 하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귀를 기울이고 보기 시작하는 아이
네 번째로, 보기 시작했다. 책, 안내판, 로고, 숫자, Mile-marker(거리 표시판) 등을 유심히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아이가 아직 영어가 서툴다 보니 재미있는 오역들도 있었다. 산 정상을 오르는 코스는 매우 험한 편이었다. 경사도 높고 일부 코스는 위험한 곳도 있었다. 거기서 아이는 한 팻말을 보더니 “에너지 길이 나타났다!”라고 힘이 난다고 했다. 뭔지 자세히 봤더니 길이 위험하니 조심하라는 ‘비상길(Emergency road)’과 ‘비상 다리(Emergency Bridge)’ 팻말이었다. 아이는 ‘에너지 길’과 ‘에너지 다리’로 해석한 것이다. 처음엔 제대로 알려주었지만, 계속 그러길래 그대로 두었다. 힘이 난다는 데 굳이 바로잡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처음 가보는 숙소마다 방문록에 하나하나 무언가를 쓰기 시작하는 아이
다섯 번째는 생각하기 시작했다. 길을 잃은 건지 아닌지 분간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이에게 결정을 맡겼더니 나름 그 상황에서 중요한 것과 판단할 것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결정이 틀릴 경우를 대비해 플랜 B도 고려하는 신중함을 보이기도 했다.
여섯 번째는 설득하기 시작했다. 어른도 힘든 트레킹을 이겨나가고 동기부여를 위해 스코어 체계를 만들어 매일매일 점수를 쌓아갔다. 자신의 생각으로는 오늘은 정말 잘 걸었으니 점수를 더 받는 게 맞다고 논리적으로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밀포드 트레킹이라는 시공간은 아이가 스스로 성장하도록 자극하는 완벽한 플랫폼 역할을 해주었다. 어릴 때의 공부는 부모가 시키고 가르치지만, 진정한 공부는 스스로 주도적으로 할 때 이루어진다. 최적의 플랫폼을 통해 주도적인 공부의 재미와 성과를 경험하면, 그때부터 아이는 스스로 공부하기 시작한다. 부모들에게 익숙한 앉아서 책을 보는 것만이 공부 일리 없다. 호기심을 가지고 스스로 묻고 찾아가는 것이 인생의 진짜 공부가 아닐까? 미국의 Garage문화와 밀포드 트레킹의 시공간들은 그러한 플랫폼의 한 예시일 뿐이다. 아이와 함께하는 여행은 수없이 다양한 플랫폼들을 제시해 준다. 어떤 플랫폼이 아이에게 맞고 효과를 낼지는 직접 가보고 겪어보아야 한다. 여행은 그 자체로 아이의 가능성을 높여주는 최고의 플랫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