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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vannah Jul 12. 2020

털이 많은 소녀

탈코르셋 도전기


넌 여자가 왜 콧수염이 있어?

거침없는 남학생들은 여자가  털이 있냐며 낄낄대기 일쑤였다. 나는 내가 털이 많은지 몰랐다. 하지만 이제는 나한테 콧수염만 보였다. 나는  여자에게 털이 있으면  되는지 의구심을 품지 않았다. 그냥 털이 많은  자신이 싫었다.  털들을 없애기 위해 별의별   해봤다. 탈색 약을 사서 염색도 해보고 엄마 몰래 제모기를 사서 제모도 해봤지만 털들은 다시 조용히 머리를 내밀었다. 책상 위에 팔을 올릴  항상 안쪽 팔이 보이도록 뒤집어 놓았다.

이제는 세상이 변했다. 래디컬 페미니스트의 필두로 많은 여성들의 가치관이 변했다. 남자에게  보이기 위한 삶은 치워버리고 나를 위한 ,  몸을 위한 삶을 살기 시작했다. 남자들이 좋아하는 와이어 속옷을 찾던 여성들은 몸이 편한 브라렛을 입었다.

그리고  가치관도 변했다. 그러자 의구심이 들었다.  남자들은 있어도 되는 다리털, 겨드랑이 , 콧수염이 여자들은 있으면  되지?


겨드랑이 제모 5 29900!

여름이 되면 온갖 부위에 대한 제모 광고가 쏟아진다. 매체가 만들어낸 아름다운 여성상은 털 없는 매끈한 몸매라서 여성들은 아름다워지기 위해 기꺼이 29900원을 지불한다. 여성은 매체와 상품에 희생양이 된 것이다. 이 악순환이 너무 싫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털 따위 신경 쓰지 말자고.

하지만 나는 탈코르셋에 실패했다. 한 번은 다리털 제모를 하지 않고 외출을 했는데, 누군가 내 다리를 볼까 봐 두려웠다. 지하철에선 다리가 안 보이도록 다리를 최대한 안으로 밀어 넣었다. 겨드랑이 제모를 안 한 날이면 내 겨드랑이가 보일까 봐 온종일 팔을 몸에 딱 붙이고 다녔다. 이미 세뇌당해버린 나는 코르셋을 벗을 수 없었다.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안된 세상이 나에게 던지는 시선을 견딜 수 없었다.

탈코르셋을 포기해버렸다. 사람들은 중학교 남학생들보다 성숙했을 뿐 그들의 시선은 변함이 없다.
나 혼자 세상과 맞서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못난 사람이 될 뿐이라서, 그래서 다시 주섬주섬 코르셋을 입었다.

우리는 많이 변해왔지만, 세상을 바꿔왔지만 아직 가야 할 길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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