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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바람 Nov 11. 2023

"우리는 패티처럼 차곡차곡 엎드려 울기 시작했다."

오늘의 밑줄 08 - 임솔아의 <최선의 삶>

비행청소년. 일진. 학교폭력. 따. 매춘.


내가 걸어온 길과 많이 다른 삶의 갈래라고 생각했다. 저런 단어들이 연관되는 이야기를 들으며 혀를 끌끌 차거나 고개를 젓는 그런 행동은 하지 않으나, 그 세계 자체에 대해 큰 생각이 없었다. 그냥 너무 멀어서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세계.


임솔아의 <최선의 삶>은 사회적인 시선으로 저런 단어들에 묶인 이들의 삶에 이름을 붙여주었다. 본명, 즉 "진짜 이름"을 서로에게 알려주는 게 의미 있는 삶들을, 가명을 쓰며 독자에게 마치 본명을 알려주듯 이야기한다.


이 소설을 읽으며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소설을 읽으며 다른 삶을 "더 불행한 삶"이라 여기며 위로받는 건 좋지 않은 독서 태도라고 생각한다. 이 소설을 통해 위로를 찾으려 하지는 않았으나, 읽으며 누군가는 위로를 받을 거라 확신했다. 소설 끝에 실린 작가와의 인터뷰에서 "바람이 있다면 저와 비슷한 악몽에 시달리는 아이들에게 읽혔으면 좋겠어요."라고 쓴 부분에서, 역시 - 라고 느꼈다.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길, 하는 마음이 녹아있는 책은, 반드시 그 마음이 전달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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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나오는 인물들을 동정하는 것도 실례라 여겨서 어떤 감정으로 책을 읽었는지 설명하기는 복잡하다. 


다만 책을 다 읽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강이일수도 있고, 나도 아람일 수도 있다. 내가 이런 길로 가게 되었다면, 나는 누구의 형태를 띠게 될까? 내가 소영은 아니길 바라지만, 소영의 한때는 무해했던 부분이 어느 순간 잔인함으로 변질되는 걸 보며 결국 누구에게나 그런 면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비행청소년"이라 해서, 혹은 술집에서 일한다고 해서, 다 비슷하고 같은 사람이 아닌, 다 제각기 다른 사람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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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입이 잘 되는 소설이었다. 어느 순간에는 나도 소영이 뭔가 "있어 보였다". 어느 순간에는 아람이 이해가 되었다. 그러다 아람이 미웠다. 강이가 바보 같았다. 그러다 강이가 안쓰러웠다. 아이들이 연약해서 울었다. 그러다 아이들이 너무 연약해 잔인해져 미웠다. 강이를 응원했다. 강이를 응원하는 내가 낯설지도 않았지만, 익숙하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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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이의 이름을 선물 같다며 수첩에 적어놓고선, 성추행을 하는 아저씨.

그 아저씨의 돈을 훔치는 아이들. 그리고 강이와 마주 앉아 우는 아저씨.


"잠시 사람이었던 아저씨는 그렇게 사라졌다. 아저씨와 우리는 서로를 불쌍하게 여겼지만, 서로를 도울 수는 없었다. 아저씨는 그래도 아저씨였고, 가출 청소년은 그래도 가출 청소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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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출을 하고 집으로 돌아간 아람에게 죽여버리겠다며 부엌에서 싱크대를 뒤져 부엌가위를 꺼낸 아버지. 

그러다 하늘색으로 염색한 그녀의 머리를 남학생처럼 자른 아버지.


"아빠는 쥐어뜯듯 머리를 자르면서도 귀 같은 부분은 피해가며 가위질을 했다고 했다. 무서웠던 아빠가 그 순간 우스워졌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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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하게도, 이 소설의 가장 아름다웠던 부분은 소설의 1인칭 주인공 강이와 소영의 잠시 스쳐갔던 좋은 시절이었다. 가출을 하고 아저씨들과 어울려 지내며 삶에 대한 다정함이나 낭만을 다 잃어버릴 때 즈음, 대가 없이 서로의 몸을 밀착시킨다.


"밤이 되면 소영과 나는 당연하다는 듯 옷을 벗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을 때에나 펴보는 일기장처럼 한정된 시간에만 펼쳐지는 비밀 이야기가 되어갔다. 소영은 다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팬티까지 벗고 알몸으로 잠들기 시작했다. 소영의 몸에서도 내 몸에서도 시큼한 냄새가 났다. 끈적이는 소영의 살을 나는 꼭 끌어안았다. 소영은 내 손을 꼭 쥐기도 했고, 끈적인다며 내 손을 쳐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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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영이라는 아이는 모든 게 당연한 특권이 있는 아이였다. 그중에 가장 큰 특권은 어느 무리에서나 관계적인 "갑"이 자연스레 되는 특권이었다. 처음엔 소영은 보호자 같았다. 그러다 소영은 폭력적인 군주가 되었다.


"방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나는 마음속 방 한 칸을 들여다 보았다. 스노볼이 있는 집에서 팔베개를 하고 있는 소영, 경찰에게 당당하게 다가가는 소영, 손톱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소영, 안갯속을 성큼성큼 걸어가는 소영. 빨간 캐리어를 끌고 유유히 전쟁터를 빠져나가는 소영. 내가 상상해낼 수 있는 온갖 소영이 그 방안에 있었다. 그 방을 나는 '소영'이라 불렀다. 소영의 모든 모습을 그 방에 들여놓을 생각은 없었다. 그 방에 들어올 수 있는 소영은 진짜 소영이 아니라 내 상상에 걸맞는 소영이어야 했다. 우리집 초인종이나 누르고 있는, 한껏 휘어져 있는 소영 따위는 내 알 바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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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영의 폭력은 결국 강이에게까지 이어진다. 가장 가까웠던 사람에게 가장 잔인한 폭력을 행사한다.


소영의 발길질을, 아람이 중간에 강이를 껴안으며 대신 맞아준다. "소영은 아람의 머리채를 잡고 내팽겨쳤다. 나의 찢어진 체육복을 더 찢어 벗겼다. 바지를 벗기고 팬티를 찢었다."


그러다 다른 누군가가 (소영과 강이를 동그랗게 둘러싼 뒤 이 싸움을 "승인"한 아이들 중 한 명) 강이를 껴안은 아람을 껴안았다. 


"남은 친구들이 차례차례 그 위로 뛰어들었다. 아이들은 여러 장의 패티를 겹쳐 놓은 햄버거처럼 엎드렸다. 소영은 포개어진 우리에게 한꺼번에 발길질을 했다. 우리는 패티처럼 차곡차곡 엎드려 울기 시작했다. 발길질을 하는 소영이 가장 큰 목소리로 엉엉 울었다."


싸움을 끝낸 소영은 친구들에게 누구를 선택할지 고르라고 한다. 엉엉 울며 강이를 보호하던 아이들 한 명 한 명 다 소영을 선택한다. 그리고 소영이 일어서서 떠나자 모두 소영과 함께 떠난다. 그 폭력을 목격하고서도. 혹은 그 폭력을 목격했기 때문에. 혼자 남은 강이는, 아주 오랫동안 모든 곳에 칼을 들고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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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이는 본인에게 그 칼을 사용할 수 있는 용기조차 없다는 것을 직면한다. 오히려 삶이 달콤할 때마다 용기는 사라져 간다. 작가의 글체를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구간이다.


"화장실에 가기 시작했다. 밥을 먹으면 예전처럼 졸음이 오기 시작했다. 수업시간에 선생이 던지는 농담에 아이들을 따라 웃기 시작했다. 최악의 병신이 될 희망은 점점 사라져 갔다. 가짜 희망들이 몸을 간질였다. 웃지 않은 것 같았는데 입이 먼저 웃었다. 병신이 된 후에도 일상을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간다는 것이 진짜 병신이었다. 급식으로 특식이 나오는 날에는 기분이 나아졌고, 엎드려 잠이 들었을 때 등에 떨어지는 햇살은 포근했고, 아람이 가끔은 괜찮은 아이로 느껴졌고, 하루하루가 그렇게까지 최악은 아니었다. 나는 최악의 병신이 되는 일에도 실패한 최악의 병신이 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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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의 모든 이야기들 또한 심장을 후벼 파는 이야기다. 그라나다라는 술집에서의 이야기들. 집에 다시 돌아온 이야기. 물고기 강이에 대한 이야기. 아람과의 통화. 소영과의 대면. 그 대면의 끝. 


"나는 최선을 다했다. 소영도 그랬다. 아람도 그랬다. 엄마도 마찬가지다. 떠나거나 버려지거나 망가뜨리거나 망가지거나. 더 나아지기 위해서 우리는 기꺼이 더 나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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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어렸을 때 - 내가 중학생이 되기 전, 교보문고에서 어떤 책의 제목을 보았다. <인생은 10대에 결정 난다>. 어떤 청소년 상담가/교육가가 쓴 책처럼 보였고 부모들을 위한 책이었는데, 그 책 제목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나는 인생에 최선을 다하는 길은 항상 공부라고 생각했다. 공부는 부모님에게 효도를 하는 최선이 되기도 하고, 나에게 원하는 삶을 가져다줄 가능성이 가장 높아 보이는 최선이었다. 인생은 아직 길게 남았지만, 30대 초반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삶, 그리고 그전에 내 앞에 놓여있던 최선을 보고 있자니, 나에게 주어진 최선이 얼마나 안락한 최선이었는지 다시 한번 곱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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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수상소감, 그리고 세명의 심사위원들의 심사평, 그리고 수상작가 인터뷰까지 정말 재밌게 또 감탄하며 읽었다. 


"어떤 때에는 그때의 나, 그 상처 많은 아이가 선명하게 내 옆에 앉아 말을 해요. 저는 그 시절 그 아이와 언제까지나 함께 있고 싶어요. 지금의 나와 그 아이는 많이 다르지만 항상 만나야만 한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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