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31일, 피그마라는 디자인 회사의 IPO는 미국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한국에서도 피그마라는 디자인 플랫폼을 사용하는 유저들이 꽤 되었던 것도 있었지만, 이 IPO는 역경을 견디고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누구나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뉴욕 타임스의 기사에 잘 나와있다시피, 피그마는 2022년에 어도비에 200억 달러 ($20 billion)에 매각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EU, 영국, 미국의 규제 당국 심사 속에서 거래가 무너졌고, 피그마가 거둘 수 있었던 잠재적 수익은 증발했다.
그리고 3년 뒤, IPO 당일 피그마의 주가는 $115.50를 기록하며 시가총액은 677억 달러를 기록했다. 3년 전 어도비가 제시했던 200억 달러의 세 배를 넘어선 것이다.
***
나 또한 이 IPO를 정말 흥미롭게 지켜보았었는데 (아쉽게도 주식은 하나도 사지 못했다), 그 이유는 3년 전 Adobe-Figma 인수 계약에 나도 참여했었기 때문이다. 나의 전 직장이었던 실리콘 밸리 대형 로펌 Fenwick & West는 피그마의 대리인으로서 이 계약에 참여했었고, 200억 달러 매각은 업계에서 역사상 가장 큰 private-sale 매각이 될 예정이었다. 워낙 큰 계약이었기 때문에 40명 정도 참여를 했었고, 난 그중 한 명이었다.
사실 EU의 규제가 아무리 심하다 해도 이 계약이 무산될 것이라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Adobe와 Figma 두 제품을 써본 사람이라면, 이리 봐도 저리 봐도 이 두 제품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명백히 알 수밖에 없다. 뉴욕타임스 기사에 피그마 초기 투자자이자 피그마 이사진 중 한 명인 Danny Rimer이 언급한 것처럼, 어도비와 피그마는 한 번도 경쟁구도에 있지 않았고, "지금도 어도비는 피그마와 경쟁하지 않는다."
그렇게 계약이 무산된 이후, 피그마는 내부 평가액을 어도비 계약 때 평가액의 절반인 100억 달러로 낮췄다. 피그마 CEO는 이렇게 말했다. "그냥 멈추고 쉬어갈 수도 있었지만, 우리는 계속 달렸다."
***
IPO 당일, Fenwick이 피그마 IPO의 대리인이었다는 내용을 확인하며, Adobe와의 계약이 무산된 상황이었다 해도 둘의 신뢰는 깨지지 않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알았다. 계약이 무산되며 어도비에게 10억 달러 위약금을 받았지만, 피그마 입장에서는 가지고 있는 현금의 한 푼도 변호사 비용으로 쓰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직원들의 기대가 산산조각이 났을 텐데, 다시 시작하는 입장에서는 가장 마지막으로 받고 싶은 것이 로펌 청구서이었을 것이다.
물론, 내 전 직장 Fenwick도 봉사로 이런 일을 해주는 건 아니라서 어느 정도 돈은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펜윅이 실리콘 밸리에서 스타트업들이 가장 먼저 찾는 로펌 중 하나인 이유가 있다.
재정이 힘들어진 회사에 돈을 빨리 달라고 재촉하기보다, 회사가 가장 힘들 때 믿어주는 친구가 되어주기로 한 것이다.
이번 IPO를 통해 공개적으로 나와있는 자료들에 따르면, 펜윅은 피그마에게 866,138주를 받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주가를 33불로 측정을 하더라도 이 금액은 M&A 계약이 체결되었을 때 일반적으로 로펌들이 받는 비용을 훨씬 뛰어넘는다. 놀라운 건 이번 IPO를 위한 로펌 비용은 $5.6 million으로 따로 기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펜윅에서 일하며 자주 들었던 생각이 있다. "유니콘" 기업들을 대표하려면 그 유니콘이 스스로가 말인지 유니콘인지 헷갈려할 때 "넌 유니콘이야"라고 말해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이건 빈말이 아니라 로펌 입장에서는 그 믿음을 보여줘야 한다. 그러려면 로펌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유니콘이 땅에 곤두박질쳐서 허우적 대고 있을 때, 이렇게 얘기를 할 수 있는 로펌이 얼마나 될까? "난 네가 유니콘인 것을 믿어. 그러니까 이번에 뿔까지 자르며 널 희생할 필요는 없어. 대신 다음에 네가 날게 될 때, 나도 등에 업어줘."
내가 알기로 펜윅은 애플 법인을 설립해 주었고, 페이스북의 IPO도 했었다고 알고 있다. 그 외에도 Oracle, Intuit, eBay, Coinbase 등 실리콘밸리에 굵직하게 자리 잡고 있는 회사들의 IPO들을 맡았었다. 스타트업은 의심과의 싸움이 힘들다고 들었다. 주변의 의심. 그리고 본인의 의심. 유니콘인지 말인지 끝없이 의심을 받고 본인도 흔들리기 마련이다. 그럴 때 옆에서 든든하게 믿어줄 수 있어야 나중에 정말 함께 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