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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아트 Apr 24. 2024

저는 그림으로 사람들을 위로하고 싶었습니다.

소소한 일상 이야기

저는 화가가 되어 그림으로 사람들을 위로하고 싶었습니다.

창의적인 활동을 하는 미술 시간이 좋았고, 그림 그리는 것이 행복했습니다. 없는 형편에 바래서는 안 되는 꿈이란 걸 알았지만, 포기할 수 없더군요. 대학에 들어가 아르바이트를 해서라도 미술을 배우고 싶다는 저의 확고한 태도에 엄마는 반대하던 단호함을 거두고 꿈을 지지해 주셨습니다. 간절함과 응원 덕분에 저는 가고 싶어 했던 미술대학에 입학했습니다.


대학교 4학년 교생실습을 나갈 때만 해도 선생님을 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중등 2정 자격증도 혹시 미술 학원을 차리게 되면 액자에 넣어 걸어둘 그 이상 그 이하의 의미도 아니었지요. 그림을 그리며 살아야 하는 화가가 되고 싶은데 교사라는 직업은 창조적인 활동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교사라는 소명 의식을 가지고 사범대학에 진학하는 학생들에게 욕먹을 일이라는 것을 그때는 잘 몰랐습니다. 쥐뿔도 없으면서 그림을 그려 팔아먹고 살겠다는 오만함과 무지의 결합이 그렇게 제 눈을 가렸고, 세상 물정 모르는 애송이로 머무르게 했습니다.


졸업할 즈음에는 그림을 잘 그리고 공부 좀 한다는 사람은 다 들어간다는 대학원에 못 들어갈까 봐 노심초사했습니다. 취업 전선에 바로 뛰어들기에는 제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거든요. 대학원 수업은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교수님을 만족시키기 위한 그림이 아니라 진짜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이 숨통을 트이게 했습니다. 수박 겉핥기식에서 벗어난 깊이 있는 이론 공부도 체질에 잘 맞았고요.


하지만, 이런 행복감에 젖어 있는 건 그리 오래가지 못했지요. 졸업 후의 생계가 현실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오직 대학원만 가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 같았던 저의 미래가 저의 무지가 정확하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험난한 한국 미술계에서 전업 작가로 살아남기란 재정적 뒷받침을 해주는 후원자가 있지 않은 이상 이루기 힘든 꿈이라는 것을····.

 "졸업하면 뭐 해 먹고살지?", "그림을 그릴 수는 있을까?" 

답도 없는 물음으로 걱정만 하던 그 시절, 모두 같은 고민을 하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조교를 하면서 교수의 길, 화가의 길로 차근히 준비해 나가는 친구, 선배들은 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 사이에서 주목받지 못한 자로서의 상대적 박탈감을 견뎌내기란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그럼에도 전 계속 나아갈 수밖에 없었죠.


대학원 논문 학기를 휴학하고 고정 수입을 벌어들이기 위해 거들떠보지 않던 임용시험을 준비했습니다. 비사범대 미대 출신이 미술 임용고시를 혼자 준비하기란 녹록지 않더군요. 시험을 준비하는 선후배가 전무한 상황에서 정보를 주고받을 그 누구도 없는 외로운 수험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해야 했습니다. 실기학원을 다닐 돈도 없어서 제 전공을 가르치며 다른 실기 과목은 무료 수강을 했습니다. 학원 원장 선생님의 배려로 학생과 강사의 신분을 바꿔가며 가난한 고시생의 삶을 그야말로 버텨냈네요.


2003년 저는 임용시험에 합격해 미술 교사가 되었습니다. 선생님이 되어 아이들을 만나고 보니 없던 사명감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저를 거쳐 가는 인연들에 대한 책임이 느껴졌습니다.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 그런지 미술 교사로서는 재미있고 의미 있는 수업을, 담임교사로서는 아이들에게 선한 영향을 주는 그래서 그들의 삶에 기억될 수 있는 그런 선생님이 되고 싶어졌습니다. 미술 교과 모임에 참석해 수업 연구를 하고, 매달 단합대회를 개최하고, 매년 문집을 발행하며 열정적인 교사의 삶을 살았습니다.


2005년 그렇게 바라던 첫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전시회를 축하하러 온 교과 모임 선배 교사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선생님, 화가도 좋은데 모든 것을 다 잘할 수는 없어. 교사라는 삶을 선택했으니 훌륭한 교사가 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조언이 참 썼습니다. 

식탐 있는 사람한테 진수성찬에 나온 맛있는 음식 중 딱 한 개만 골라 먹으라고 하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욕심 많은 사람이 취사선택해야 할 때처럼 속이 쓰릴 때는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결단을 내리지 못했고, 그 뒤로도 한동안 화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전시 비용으로 많은 돈을 쓰고 나서도 저는 계속 그림을 그렸습니다. 작업실을 따로 마련할 형편은 되지 못했기에 집에서 작업을 했지요. 그즈음 유명한 화가가 되고 싶은 욕망이 좋은 선생님, 좋은 엄마가 되고 싶은 욕심과 겹쳐 충돌하기 시작했습니다. 아기가 온 집안을 기어다니기 시작하자 저절로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고민은 더 깊어졌지요.

학교생활에 허덕이고 둘째까지 태어나고 보니 저 자신을 위해서, 전시를 하기 위해서 돈을 쓸 수 없겠더라고요. 그때 알았습니다. 저의 절실함이 거기까지 인 것을. 매번 그렇게 큰돈을 들이면서 창작 욕구를 불태울 자신이 없었습니다. 아니 열정이 부족했습니다. 돈이 없다는 것은 비겁한 변명임을 스스로 알고 있었습니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현실을 마주 했을 때 그것이 욕심으로 인한 것이라면 내려놓을 수밖에 없다는 교훈을 깨우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사람들을 위로하고 싶었습니다'라는 과거형을 쓴 것은 옛날이야기를 털어놓고자 한 것만은 아닙니다. 저는 미술 교사로서 학생들의 반짝이는 창의성을 접할 때 행복합니다. 잠재되어 있는 영감을 끌어내 표현할 수 있도록 돕는 일에 희열을 느낍니다. 그들의 작품에서 위로받습니다. 가르치는 일에서 얻은 에너지들이 모여 저는 다시 새로운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화가라는 꿈과 그리 멀지 않은 그림책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요. 제가 그린 그림과 이야기로 사람들을 위로하고 싶습니다. 여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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