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두 주인공 핼리와 무니의 삶을 중심으로
디즈니랜드 근처에 있는 오래된 모텔 ‘매직 캐슬’에서 장기 투숙 중인 젊은 댄서 ‘핼리’와 그의 딸 ‘무니’가 있다. 이 모텔에는 이들 모녀 이외에도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 비록, 마땅한 놀이 공간이 없지만 무니를 비롯한 모텔의 아이들은 주변 환경을 놀이터 삼아 하루하루를 만끽한다. 때때로 위태로운 순간들도 찾아온다. 라이터를 잘못 사용하는 바람에 옛날 콘도에 큰 불이 붙게 하기도 하고, 무방비의 상태에서 소아성애자로 추정되는 남성이 아이들에게 접근하기도 한다. 이러한 크고 작은 위기 때마다 나타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매직 캐슬의 매니저 ‘바비’이다. 바비는 잠잠할 날이 없는 매직 캐슬의 일상을 살뜰히 보살핀다. 특히, 의지할 때 없는 핼리와 무니에게도 꽤나 큰 힘이 되어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핼리와 무니의 삶은 녹록치 않다. 댄서였던 핼리는 2차 성매매 자리에 참석을 거부하였다는 이유만으로 일자리에서 해고당한다. 생계를 위해 정부 보조금을 얻으려 해도 30시간 일하는 직장이 없어서 거절당한다. 별 다른 뾰족한 수가 없자 망가진 향수를 싼 값에 얻어 모텔 근처 고급 리조트의 손님들을 상대로 판매한다. 이마저도 변변치 않자, 결국 핼리는 생존을 위한 성매매를 감행한다. 나는 춤을 추는 사람이지 그 딴 짓은 안한다고 완강히 거절했던 핼리는 결국 공고한 자본주의적 구조 앞에 어쩔 도리가 없다. 그리고 살기 위한 몸부림의 순간 마다 그의 딸 무니가 함께한다. 정부 보조금을 얻으러 갈 때에 무니는 모든 언쟁의 상황을 지켜보고, 엄마 핼리의 향수 판매를 함께 거든다. 마지막으로 핼리가 함께 살고 있는 모텔 방에서 성매매를 할 때 무니는 바로 옆에서 목욕을 하고 있다. 핼리가 성매매한 사실이 모텔 전체에 소문이 나고 결국 아동국에 이 사실이 신고된다. 결국, 핼리와 무니 모녀는 서로 떨어져 살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핼리와 무니의 삶은 세상 밖으로 재현되지 못한 삶이다. 그들은 분명히 현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존재 자체를 인정받으면서 살아갈 수 없다. 재현되지 못한 그들의 삶은 왜 재현될 수 없는지, 더 나아가 그들의 현존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을지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재현은 미학적 개념이지만 핼리와 무니가 현존함을 드러내는 것은 미학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어쩌면 핼리와 무니에게 있어서 재현이란 생존을 위한 존재론적 및 정치적 투쟁 차원에서의 이야기일 것이다.
1) 재현(representation)개념을 통해 바라본 핼리와 무니의 삶과 정체성
핼리와 무니는 사회에 “현존”하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존재이다. 두 모녀가 현존하지 않는 존재로 여겨지는 이유는 이들의 삶을 제도적 차원에서 “재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들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고 이들답게 살아갈 수 있는 어떠한 짜임새 있는 방편도 없다. 이들은 그저 사회가 꾸려나가고자 하는 제도적 이상에 어울리지 않는, 그래서 삭제되어야 하는 존재일 뿐이다. 영화는 그들의 순탄치 않은 인생과 대비되는 밝은 음악과 화려한 색감으로 전체적인 분위기를 조성한다. 주인공들의 처참한 현실이 고조될수록 여러 겹의 밝은 음악과 색감들이 덧입혀진다. 마치 재현될 수 없는 삶을 사는 그들의 운명을 암시하는 것처럼 말이다. 핼리와 무니의 현존은 그와 이질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는 음악과 색감으로 인해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이를 기반으로 영화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형형색색의 보라빛 페인트로 칠해져 있는 모텔 매직 캐슬이다. 핼리와 무니의 조력자 역할을 하는 모텔 매니저 바비가 수시로 이 모텔 외벽을 페인트칠한다. 오래된 건물을 보수하는 여러 작업들 중 페인트칠이 가장 용이하다. 많은 비용을 들이지 않으면서도 그 낡음을 그럴듯하게 가릴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들이 살고 있는 매직 캐슬을 멀리서 비추어 볼 때, 아름답다는 감상까지도 들게 한다. 하지만 아무리 수없이 덧칠해도 그 오래된 건물의 본 면모는 아예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덧입혀 색칠된 파스텔 톤의 페인트 색 때문에 건물 자체가 어색해 보인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매직 캐슬은 핼리와 무니의 현존을 상징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건물 외벽의 파스텔 톤 페인트 색깔은 이들의 처참한 현실을 이질적인 밝음으로 가려서 현존의 재현을 막는 요소이다. 그래서 바비가 수시로 건물 외벽을 페인트칠하는 것은 핼리와 무니를 도와주면서 이들의 비참한 현실을 피상적으로 가려줄 순 있지만 이들의 근본적인 문제, 즉 재현될 수 없는 삶을 살고 있어 현존을 인정받지 못하는 문제는 해결할 수 없음을 상징한다. 영화 중간 즈음, 바비는 사다리 위에서 건물 외벽을 페인트칠하다가 소아성애자로 추정되는 남성이 모텔 아이들에게 접근하는 것을 보자 페인트 통을 바닥에 떨어뜨린다. 이는 바비가 모텔의 삶을 살뜰히 보살피는 것은 맞지만, 모텔의 구성원들이 안고 있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줄 수 없으며, 바비가 나름대로 이룩한 조력의 구조는 사실 너무나도 허술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장면 이후로 바비가 페인트칠 보수를 하는 장면은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그와 동시에 핼리와 무니의 삶은 이전보다 더 비참하게 흐르게 된다. 주변의 도움만으로는 핼리와 무니의 재현되지 못하는 삶, 그래서 현존한다고 여겨지지 않는 삶을 현존하게 하여 존재 그 자체만으로 지니는 가치를 회복 할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무니를 비롯한 모텔의 아이들은 대부분 학교에 다니지 않는다. 모텔 주변에는 마땅한 놀이 시설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이 아이들은 위태로운 모텔 시설 곳곳에서 싱그러운 에너지를 뽐내며 스스로의 존재를 발현한다. 주차된 차에 누가 멀리까지 침을 뱉을 수 있을지 경연하고,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서 죽치고 있다가 손님들이 준 동전들을 모아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서 셋이 나누어 먹기도 하고, 벌거벗고 수영하는 알콜 중독자 글로리아를 훔쳐보며 낄낄대기도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이 놀이터 삼는 곳에서 몇 발자국만 이동하면 디즈니랜드가 있다. 하지만, 모텔의 아이들은 디즈니랜드와 주변 기념품 가게 등 아이들에게 어울릴만한 시설에는 전혀 눈길을 주지 않는다. 아이라는 현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철저히 주변적 위치에 놓여 있다. 이들의 현존이 부정되고 있다는 것은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주인이 내쫓으려는 장면을 통해 알 수 있다. 아이들은 “우리도 손님이에요.”라고 말하며 그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린다. 하지만, 주인은 “우리 손님을 귀찮게 하지나 마.”라고 받아친다. 주인에게 있어서 모텔의 아이들은 손님의 범주에 들어갈 수 없는, 즉 손님으로서 재현되지 않고 그래서 현존하지 않는 존재일 뿐이다.
핼리 또한 자신과 딸의 삶을 재현하기 위해 부단히 투쟁하지만 결국 이를 관철하지 못한다. 그에게 있어 현존을 재현하는 것은 핼리와 무니가 생존하는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가능하다. 사실 이들은 제도가 보장하는 교육, 복지 등은 바라지도 않고 모녀가 함께 살 수 있는 환경만 주어진다면 그 어떤 곳에서라도 생존할 수 있는 강인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그저 함께 살아갈 수 있으면 그만이다. 따라서 함께 살아감은 핼리를 핼리답게, 무니를 무니답게 한다. 하지만 이들은 함께 살 수 없다. 둘의 존재는 재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성매매를 거부하여 일자리를 잃은 핼리가 정부 보조금, 즉 제도권 차원의 도움을 요청하지만 일자리가 있어야 보조금을 줄 수 있다는 아이러니를 제시하며 핼리의 존재를 지워버린다. 핼리는 도움이 마땅히 필요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이는 인식되지 못한다. 결국, 핼리는 생존을 위해 성매매를 감행한다. 함께 살아감은 핼리와 무니 둘 다에게 지상명령과도 같은 것이다. 엄마인 핼리는 성매매를 통해서라도 딸과의 삶을 지켜내고자 한다. 하지만, 아동국은 핼리의 성매매 사실을 이유로 둘을 격리한다. 둘은 함께 살아갈 수 없는 존재들인 것이다. 이들의 존재는 이렇게 지워진다. 영화 맨 마지막 부분에서 격리를 거부하는 무니가 아동국 직원들에게서 도망치자 직원들은 핼리에게 무니를 잡을 수 있게 도와달라고 한다. 그러자 핼리는 내 새끼를 빼앗아가게 도와달라 하는 것이냐며 절규한다. 애가 도망쳐서 어쩔 수 없다고 하자 핼리는 다음과 같이 소리 지른다. “애가 도망치게 둬? 그런데도 내가 부모 실격이냐고? 나가 죽어!” 성매매를 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 생존을 위해 성매매를 하면 둘은 함께 살 수 없다. 양자 중에 핼리의 존재를 재현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양자 모두 존재를 지워버린다. 인간으로서 생존할 수 없음과 시민으로서 제 역할을 수행할 수 없음을 이유로 말이다.
2) 인간은 비로소 “시민”의 자격을 갖추어야 “생존”할 수 있는가.
앞선 장에서 성매매를 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고, 성매매를 하면 딸과 함께 살 수 없다는 양자적 딜레마로 인해 지워진 핼리의 존재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는 결국 개인의 삶을 재현하는 문제는 사회 구조 차원에서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핼리와 무니를 꼼짝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결국 부당하고도 곤고한 사회 구조이다. 공동체는 이들에게 “시민”이라는 자격을 부여하지 않는다. 일자리를 잃은 핼리에게 보조금을 지원하지 않는다. 궁지에 몰린 핼리와 무니가 생존을 위해 전전긍긍할 때 이들을 보호하여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어떤 장치도 마련되어 있지 않다. 이들은 그저 방치된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것이 자본화된 사회 구조 속에서 핼리는 결국 자기 자신을 수단화하는 성매매를 감행한다. 핼리에겐 별 다른 선택지가 없다. 그러자 정부는 핼리에게서 부모 자격을 박탈하고 무니와 격리시킨다. 성매매로부터 아이를 보호하려는 아동국의 목적에 반기를 드는 것이 아니다. 핼리가 성매매를 감행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구조를 만들어 놓고 성매매라는 불법 행위를 저지른 핼리가 시민으로서 역할을 수행할 수 없으니 인간으로서 부모 또한 될 수 없음을 선고하는 정부의 결정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핼리와 무니는 도대체 어떤 선택을 해야 이들의 현존을 재현하여 생존할 수 있을까. 삶을 재현하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핼리와 무니만의 몫일까. 왜 구조 차원에서의 책임은 드러나지 않고 모든 것을 핼리와 무니가 감당해야 하는가.
핼리와 무니의 삶을 보면 인간은 자기 정체성을 스스로 발현할 수 없다. 사회에 의해 허가되어야만 가능하다. 그리고 사회는 구성원들의 자기 정체성 발현 여부를 허가할 때, 그들이 “시민”으로서 가능할 수 있을지 고려하고, 그들이 “시민”이 될 수 있는지 여부는 결국 자본에 달려 있다. 디즈니랜드와 매직 캐슬은 물리적으로 같은 공간 속에 있지만 전혀 다른 차원에서 존재한다. 자본을 소유한 인간은 시민으로서 디즈니랜드의 풍요를 누린다. 그들은 아이스크림 가게의 손님이 될 수 있고 기념품을 구매할 수 있다. 자본을 소유한 인간은 시민이기 때문에 자유롭고 안정적인 삶을 누리며 스스로를 재현하는 데 어떤 어려움도 겪지 않는다. 핼리와 무니는 디즈니랜드에서 흘러나오는 풍요의 찌꺼기를 겨우 수집하여 살아가는 형편이다. 디즈니랜드를 이용하는 고객들이 즐비한 고급 리조트에서 망가진 향수를 팔아 삶을 전개해나가고 가족들 몰래 성매매를 하러 온 남성의 매직 티켓을 훔쳐 이를 판 돈으로 방세를 매꾼다. 살아보려 애를 쓰는 이들의 정체성은 보호받지 못한다. 공교육, 보조금 등 제도권 내에서의 보호는 이들의 몫이 아니다. 국가는 시민이 아닌 인간을 돕지 않는다.
핼리와 무니는 디즈니랜드의 풍요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디즈니랜드의 화려한 폭죽을 그 중심이 아닌 주변에서 구경할 때조차 서로 함께할 수 있음만으로 충분히 행복함을 느낀다. 그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것, 함께 살아감을 위협받지 않는 것이 이들이 진정 바라는 바다. 핼리와 무니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공동체에서 핼리와 무니의 삶이 재현된다. 시민이 될 수 없는 자는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없는 사회가 인간의 정신을 고양하는 공동체인지 반성적 차원의 물음이 필요하다.
3) 핼리와 무니의 삶을 재현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재현은 필연적이다. 어쩌면 인간의 현존보다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어떤 존재가 재현될 수 없다면 이를 현존한다고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핼리와 무니의 삶은 현존하지만 재현될 수 없고 그 이유는 그들을 꼼짝하지 못하게 하는 사회 구조에 있었다. 사회 구조는 그들을 “시민”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시민”이 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에 자본이 있었다. 결국 “representation”은 그 의미를 이해함에 있어서 미학적 개념인 재현뿐만 아니라 정치적 개념인 대표까지 고려해야 한다. 민주주의에 있어 대표는 광범위하게 흩어져 있어 자신들의 공통의 의견을 주장하지 못하는 개인과 집단들을 하나로 묶는다. 재현되지 못한 이들의 삶이 정치적 주체로서 드러나기 위해서는 이들을 대표하여 그 삶에 제도적 권위를 부여해줄만한 장치가 필요한 것이다. 핼리와 무니의 삶을 재현할 수 있게끔 함께 연대하여 투쟁할 대표자와 체계를 어떻게 구성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이 우리가 봉착한 과제이다.
핼리와 무니가 함께 살아갈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의 삶이 재현될 수 없어서이고 재현될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이 시민의 자격을 부여받지 못한 존재자들이기 때문이다. 시민의 자격을 부여받지 못한 존재자들이 삶을 재현할 수 있도록 개인 차원에서, 더 나아가 공동체 차원에서 마땅히 수행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이들의 삶이 더 이상 지워지지 않도록, 배제되지 않도록 말이다. 페인트칠을 덧입히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들을 꼼짝 못하게 하는 구조를 대범하게 직면하여 그 부당함을 지적하고, 이들의 삶과 진실로 함께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들의 삶 또한 “대표”할 수 있어야 한다.
무니 역할을 맡아 열연한 브루클린 프린스는 그해 크리틱스 초이스에서 신인상을 수상한다. 그리고 수상 소감을 밝히며 마지막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세상 모든 핼리와 무니에게 이 상을 바칩니다. 정말로 심각한 문제에요. 우리는 그들을 도와야해요.” 브루클린의 요청에 우리는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드러나지 않은 핼리와 무니의 삶을 알아차리는 것, 즉 이들이 현존함을 외면하지 않고 인식하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선행하는 숙제가 될 것이다. “도와야해요“의 의미는 이들의 현존을 재현하는 것이다. 이들의 현존을 재현하려면 시민의 자격을 자본에 근거하여 결정하는 사회 구조를 직면하는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무화된 개별자로서, 무화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그렇기에 정신으로의 고양을 소망하는 인간으로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