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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채원 Nov 15. 2021

진실된 언어의 조각들

드라마 <너를 닮은 사람> 10화에서 해원의 말들을 곱씹으며

 드라마 너를 닮은 사람을 7편까지 봤던 즈음에 희주, 우재와 달리 해원에게는 존재를 긍정하는 힘이 있다는 글을 썼다. 거기에 덧붙이지는 않았지만 해원이 스스로에게 솔직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기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준 할아버지의 사랑을 경험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이를 쓰지 않은 까닭은 사랑이 결핍된 자들은 자기 존재를 긍정할 수 없다는 식으로 무조건 단정짓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안의 오은영 선생식의 희망을 지우고 싶지 않았달까.


 저번 10화에서 해원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해원을 지탱하던 큰 기둥이 사라져서 보는 내내 안타까웠다. 한편으로는 해원에게 할아버지란 어떤 존재였는지 그의 언어로 듣고 싶었다. 그런 계기가 아니라면 그 의미가 선명히 드러나진 않을테니까. 나는 해원에게 할아버지란 존재를 긍정하는 힘의 원천이라고 생각하던 차, 할아버지를 향한 해원의 고백은 절절하기 그지 없었다. 더불어, 주변 사람들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조차 솔직하지 못한 희주와 우재를 향한 해원의 날선 분노도 할아버지를 향한 고백과는 다른 의미로 선명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직후 해원이 희주, 우재, 그리고 할아버지에게 전했던 말들을 간추려봤다.


#1. 해원과 희주의 대화


"대표님이 같이 가자고 연락 주셨어.조문은 해야 할 거 같아서. 네가 할아버지를 얼마나 생각하는지 알아. 기운내."

"기운...지금 낼 수 있을만큼 내고 있는거에요."

"그렇겠다. 미안해."

"뭐가 미안해요. 나한테 미안한 게 한두개가 아닐거라"

"싸우려고 온게 아냐"

"아님 갖잖게 위로하려고? 이제야 내가 불쌍해요?"

"내가 괜히 와서 네 맘 상하게 한 거 같다. 미안해"

"어쩌나... 언니는 이제 미안해할 자격이 없는데. 내가 언니한테 사과를 말했을 때는 어느 정도 언니를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거에요. 그런데 지금은...!"

"지금 여기에서 할 이야기 아니야 갈께”

"아니요. 지금 해야 돼요. 언니가 지금 함부로 사과를 하고 있으니까. 그동안 있었던 수많은 기회를 다 무시하고 내가 가장 무너져있는 지금 선심쓰듯이 내뱉는 그 따위 사과는 받지 않을거에요. 이렇게 가벼운 사과로 다 떨쳐냈다고 생각할 언니의 마음을 나는 절대로 허락하지 않을거에요. 나는 당신을 경멸합니다. 그런 나를 계속 보게 될 거에요. 어디에있든 내가 지긋지긋하게 따라다닐 테니까. 사는 동안 지옥이 될테니 오래오래 살다가 외롭게 죽길 바랄께요."


 희주는 일관적으로 해원과의 갈등의 본질에 무엇이 있는지 직면하지 않는다. 행여 자기가 쥐고 있는 것들을 잃을까봐 두려워할 뿐이다. 다만 심연에 해원을 가해했다는 사실을 도통 떨쳐낼 수 없으니, 앞서 보는 것처럼 해원의 곁을 빙빙 맴돌 뿐이다. 해원은 둘 사이에 할 수 있는 혹은 해야 하는 진짜 이야기를 꺼내려고 하자 희주는 중간에 말을 가로채며 매몰차게 회피한다. 그 순간 해원은 희주에게 간담이 서늘해질만한 저주 아닌 저주의 말들을 내뱉는다. 해원이 가장 연약할 때 찾아와 지나가듯이 사과를 건네는 희주가 얼마나 비겁한지 비난하고, 그런 사과는 받지 않을 것이라며 자기 입장을 주체적으로 밝힌다. 이로 인해 희주가 그토록 듣고 싶지 않았던 갈등의 본질에 있는 것들이 순식간에 수면 위로 올라온다. 다듬어지지 않고 전혀 가공되지 않은 해원의 본심은 희주를 얼어붙게 만든다. 희주는 이리 저리 에둘러 상황을 덮어두고 곤란함을 모면해보고자 했으나 해원은 그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리고는 꾸밈이 없다 못해 격식도 없는 언어들로 자기의 본심을 보여줌으로써 희주에게 경고 한다. 그 순간 희주는 진실을 더 이상 은폐할 수 없음을 깨닫고 두려움에 어쩔 줄 몰라한다. 희주는 누구에게도 해서는 안될 것 같은 말들로 가득찬 저주보다는, 오히려 자기 본심을 직면하는 게 더 두려웠을 것이다. 진실이 깃든 말이라는 칼은 이토록 날카롭고 선명하게 본질을 꿰뚫는다.


#2. 해원이 우재에게 한 말


"가. 네 맘이 괴로워 죽겠다는 그런 얼굴로 그딴 마음으로 여기있을 생각하지 말고 가."


 일전에 우재는 해원에게 희주를 향해 마음이 있음을 암시했다. 우재 역시도 희주와 마찬가지로 해원과의 관계를 회피로 일관하는 캐릭터이다.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꾸역꾸역 원하지 않는 해원의 옆자리를 지킨다. 해원을 향한 미안함, 나쁜 사람이 될 것 같은 두려움 중에 우재를 사로잡은 건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둘 다 였을지도. 그런 우재의 마음을 직시한 것은 오히려 해원 쪽이었던 것 같다. 희주나 우재 둘 다 지독한 회피형들인 것 같은데, 그래도 최소한 희주는 자기가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잃고 싶지 않은지가 명백하다. 이를테면, 물질적으로 넉넉한 가정, 자기 커리어로 쌓은 명성 등 결국 남편으로부터 파생한 것들이겠다. 그래서 해원은 희주한테 남편이란 소중한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이라고 직언한다. 해원다운 통찰에 감탄했던 대사였다. 하여간 우재는 어딘가에 늘 끌려다니는 느낌이다. 그 와중에 순간 순간 솟구치는 감정대로만 행동하고. 우재는 드라마에서는 자주 보기 힘든 전형적인 회피형 남자 캐릭터라고 생각한다. 반대로 현실에서는 꽤 많다고 느껴진다. 그래서 보는 내내 여러 탄식이 나왔다. 아, 내 주변에 회피형 인물들이  많은 것일수도 있다. 주워 들은 지식에 대입해보면 경계성 성격 장애 같다. 드라마를 보는 내내 느끼지만 내게 우재는 늘 진단명이 뭘지 궁금한 캐릭터다.


#3.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회상하며 해원이 남긴 말


"나한테 아직 선한 것이 남아있다면 할아버지. 그건 다 할아버지한테 받은 거야."


 마음이 저릿했던 해원의 말. 해원이 자기 존재를 긍정할 수 있는 힘이 할아버지로부터 왔다면, 그 힘은 해원에게 선한 것이었구나 싶었다. 해원은 여러 상처들로 인해 더 이상 스스로가 예전 같지 않음을 알았고, 그 때문에 자기 안에 선한 것들이 남아 있는가 의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선한 것이 있다면 그건 할아버지로부터 온 것이라는 해원의 말은 할아버지란 그가 솔직하고 순수하게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임을 고백하는 것이었으므로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할아버지를 상실한 것이 해원의 존재 상실을 의미하는가 라는 의문을 제기한다면, 나는 꼭 그렇지는 않을 것이라고 대답하고 싶다. 할아버지의 존재는 더 이상 물리적으로 감각될 수 없지만, 그가 남긴 사랑은 해원에게 남아서 어떤 힘을 낼 수 있기를. 사랑을 경험했다는 사실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테니까.


 의도된 연출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나만이 가지는 어떤 다른 이유 때문인지 몰라도 드라마를 보면 볼수록 해원의 감정선에 집중하게 된다. 광기 어린 그에게 애정의 시선을 쉽게 거둘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일각에서는 해원의 행보의 결말을 자기파괴로 단정 짓는 경우가 많았다. 자기를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에게 집착하는 징그러운 여자로 보기도 하더라. 지나친 반응 같긴 한데, 요새 식의 소위 말하는 쿨한 캐릭터는 아니니까 머리 복잡한 거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수도 있겠다 싶었다. 저번 글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좀 통쾌하지 않더라도 해원은 부정적인 자기 모습까지 다 끌어안을 수 있는, 스스로를 기만하지 않는 캐릭터라 더 눈길이 갔다. 그렇기에 나는 해원을 믿는다. 더 정확히는 해원이라는 존재가 가진 힘을 믿는다. 설령, 해원이 자기파괴에 귀결하더라도, 그러한 믿음을 가진 내가 좌절하거나 실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해원의 힘을 향해 가지는 믿음은 그와 주변인물들의 미래를 예견하고 이를 확신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저 서늘할 정도로 스스로와 주변에게 솔직할 수 있는 그를 향한 존경을 의미한다. 그가 어떤 선택을 하든 나는 아무렴 상관이 없다. 나는 그를 존중하고 그 차원에서 그를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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