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너를 닮은 사람> 11-14화에서 안현성 캐릭터를 중심으로
드라마 <너를 닮은 사람>이 이번주에 방영될 15,16화를 끝으로 막을 내린다. 극이 클라이막스에 이르기 전에 11화부터 14화까지의 이야기들을 정리하는 글을 쓰고 싶었다. 그러던 차, 회차를 거듭할수록 안현성이라는 인물이 눈에 띄었다. 안현성은 주인공 희주의 남편으로 희주에게는 구원자와 같은 존재이다. 가난했던 희주의 삶은 부유한 집 자제인 현성과의 만남을 계기로 완전히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10화까지는 크게 해원과 희주, 그리고 그들과 얽혀있는 우재까지는 주목할 만 했지만 현성의 존재가 독단적으로 부각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후 회차들에서 희주와 현성의 아들 호수가 납치되었던 사건과 아일랜드에서 현성이 우재와 있었던 일이 본격적으로 드러났기에 안현성 캐릭터를 중심으로 해당 회차들을 살펴보는 시도가 꽤나 유의미한 작업이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이번 글에서는 안현성과 주변 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살펴보고 이를 중심으로 지난 이야기들을 정리하고자 한다.
안현성 캐릭터가 가진 여러 특성들 중 지속적으로 드러난 건 그의 권위적이고 일방적인 모습이다. 겉으로는 친절하고 교양있는 어조로 스스로를 적당히 포장하고 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이러한 모습들이 숨김없이 드러난다. 특히 호수가 납치된 사건으로인해 은폐되어있던 현성의 권위적인 모습이 선명하게 나타난다. 그가 의존하는 힘의 논리는 대화 곳곳에 들어 있어 그가 어떤 사람이고 어디에 얽매여 있는지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다. 당장 아들이 없어져 반패닉상태가 된 희주와 달리 현성은 소중한 아들이 사라졌다는 사실보다는 당장 자기의 자존심과 절차 및 제도적 당위성이 더 중요해보인다. 그리고 그러한 당위의 중심에는 가장 힘이 센 혹은 세야할 자기 자신이 있다.
<11화>
- 안현성과 이일성(주영의 아빠)의 대화
안: 돈이 필요해요? 드리죠. 아이는 어디있습니까?
이: 내가 세계 챔피언을 이겼다고 아시아인 최초로
안: 말돌리지 말고 우리 호수 어딨어! 어딨어!
이: 이사님, 지금 뭔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지금 말을 하는 쪽은 나야. 당신은 내 말 잘 들어야지.
안: 됐죠. 듣겠습니다. 대신 내가 듣고 싶은 말만 해야 될거야. 구질구질한 거까진 참고 봐주겠는데... 내꺼 건드리는 건 못 봐주니까.
이: 염병...지도 좋은 아빠 아닌 주제에 지금 이 상황에도 넌 네 애보다 네 자존심을 먼저 생각하잖아. 네가 나랑 뭐가 다른데 네가 나랑 뭐가 뭐가 다르지 뭐가 다를까!
처음에 현성은 고상하게 존댓말로 시작하지만, 급박한 순간에 이르자 어조를 바꾸고 자기의 본심을 드러낸다. 아들을 납치한 혐의를 받고 있는 일성에게 '내가 듣고 싶은 말만 해야 한다', '내꺼 건드리는 건 못 봐준다'라는 말을 하는 것은 아들을 지키고 찾겠다는 목적 보다는 숭고한 자기의 영역에 '감히' 침범한, 자기보다 아래 계급인 이일성을 향한 경고적 성격이 더 강력하다. 다분히 계급성을 드러내는 표현으로 일관하자 이일성은 이를 알아차리고 당신도 좋은 아빠가 아니라며 '넌 네 애보다 네 자존심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니 아래 계급에 있는 자기와 다를 바가 없다고 그 계급 논리를 타파하는 시도를 한다.
- 이일성, 안현성, 정희주, 서우재의 대화
이: 왜 나만 잘못했다고 합니까 애초에 잘못은 이 인간이 했는데 대한민국 법은 사람 골라가며 잘잘못 따집니까
안: 우리 호수가 무사히 돌아오길 아주 간절히 바라야 될거야
정: 아버님 제가 다 보상해드릴께요 제가 다 해드릴게요 그러니까 호수 호수 어디있는지만 그것만 좀 알려주세요
이: 몰라요..
정: 아버님 이렇게 부탁드릴께요 호수 어디있는지만 알려주세요 제가 다 해드릴께요 정말로 제가 다 해드릴께요
이: 나 진짜 몰라요 진짜 몰라요
정: 아버님 아버님
안: 서우재 당신도 이 시간에 왜 여기있었는지 정확히 설명해야 될거야
정: 주영 아빠 혼자 이런 일을 저질렀을리가 없어. 해원이가 시킨거야. 구해원이야 .너도 알고 있었지? 해원이 만나러 가기로 했으면서 왜 여기있어?
서: 저도 찾아볼께요 해원이한테 물어볼께요 저도 걱정되어요 믿어주세요
안: 경찰이 알아서 조사할거야 일단
정: 당신이 그랬잖아 해원이나 주영이나 ...(중략)...저런 사람들 관심 가져주면 맹목적이라고 당신이 그랬잖아. 호수 어떻게 해. 호수 미안해서... 호수 찾아줘 호수 어떻게 해. 우리 호수 미안해서 어떻게 해
- 구해원, 정희주, 안현성의 대화
안: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
구: 주영이 아버님한테 간곡히 부탁을 드렸어요. 아이는 죄가 없다구요.
정: 그 입 다물어.
안: 내가 상가로 갔을 때 호수 없었어요. 그건 구선생이 애를 먼저 데리고 갔다는 얘기인데...
구: 경찰서에 얘기 듣고 나와 바로 주영 아버님께로 찾아갔었어요. 갑작스러운 철거로 많이 흥분하신 상태라 혹시나...
안: 그러면 우리나 경찰한테 미리 연락을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해당 장면들에서도 아들 호수를 잃을까봐 이성을 잃은 채 가해자들에게 애원하고 화내는 희주와 달리 현성은 그의 밑에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일성과 우재)에게 그 계급성을 인식한 태도를 일관적으로 취한다. 물론, 희주를 진정시키고 상황을 정리하기 위한 태도일 수 있으나, 이러한 현성의 힘의 논리를 향한 집착은 경찰을 언급하며 절차 및 제도적 당위에 의존하는 것으로 마무리 짓는다. 해당 장면에서 호수는 부부의 아들이 아니라 희주의 아들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호수가 현성의 아들인지 아니면 우재의 아들인지 여부가 극 중에서 중요한 화두이므로 의도된 연출일 수 있으나, 호수가 명백하게 현성의 아들이었다고 할 지라도 현성의 태도가 크게 달라졌을까? 일성의 지적대로 현성은 아들 보다는 자기 자존심이 더 중요한 사람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희주, 호수, 그리고 리사를 포함한 가족 구성원들은 현성의 영역 아래 있는 현성의 사람들일뿐이다. 현성은 그들을 독립적 존재로 존중하며 사랑하고 있을까? 가족들은 내게 소중한 타자가 아니라 나의 영역에 귀속된 개체들에 불과하다는 것. 그들을 건드리는 건 곧 나를 건드리는 것이니 그래서 참을 수 없다는 것. 은폐되었던 현성의 무서운 이기심이 돋보였던 장면이 아닐까 싶다. 이게 무서운 이유는 이후에도 언급하겠지만 현성이 그토록 증오하던 어머니가 자기를 대하는 방식이었다는 것에 있겠다.
- 정희주, 안현성, 안리사(딸), 안호수(아들)의 대화
리: 넌 바보냐 모르는 사람을 왜 따라가
호: 모르는 아저씨 아니야 드라큘라야 그리고 나 바보 아니거든
정: 맞아, 우리 호수 바보 아니야. 그래도 다음 부터는 조심하자. 아는 사람이라도 엄마 아빠 없을 땐 함부로 따라가는 거 아니야. 응?
리: 쌤이 너 구해줬다며 어떻게? 너한테 뭐래?
안: 리사 다먹었으면 그만 올라가
리: 아 왜 궁금하잖아
안: 올라가
리: 뭐야 왜 말도 못하게 해
안: 호수도 먹었으면 올라가서 양치하고 아빠가 동화책 읽어줄께
정: 리사 말대로 우리가 호수한테 먼저 물어보는게...
안: 함부로 물어서 괜히 덧날까봐... 내일 심리치료 받기로 했으니까 전문가한테 맡기자
정: 그래도...
안: 호수 아직 어리니까 잊을 수 있을지도 몰라. 애써 일부로 기억나게 할 필요 없잖아.
권위적인 현성의 모습은 가족들간의 대화에서도 나타난다. 현성은 리사, 호수, 그리고 희주의 말까지 차례로 자르며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았으면 하는 사건들을 원천봉쇄한다. 주변의 상황과 자기 마음을 있는 그대로 직면하지 못하는 현성의 모습은 희주의 모습과도 많이 겹친다. 희주와 마찬가지로 현성 또한 보고 싶지 않은 진실을 외면한다. 특히나, 호수를 방에 보내며 곧 동화책을 읽어주겠다고 하는데 동화책이 현성에게 상징하는 바는 그 전에 해원의 대사를 통해 설명된다. 현성이 호수에게 읽어주는 동화의 내용은 악인과 선인이 화해하고 갈등이 사라지는 식의 해피엔딩으로 종결된다. 이를 놓고 해원은 잘못하면 반드시 혹독한 댓가를 치룬다는 걸 알려주는 게 차라리 도움이 되지 어설픈 해피엔딩만을 듣고 자라면 더 실망하지 않겠냐며 반문한다. 진실을 있는 그대로 직면하는 해원은 설령 가혹하고 무자비할지라도 현실을 외면할 수 없을 것이다. 반면에 현성은 자기가 직면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철저히 외면한다. 마치 직면하지 않으면 없는 일이 되는 것처럼.
- 구해원과 안현성의 대화
구: 무슨 일이세요? 이 시간에 여긴 저밖에 없는데 절 찾아온 거 같진 않고...
안: 서우재 서우재...서우재...서우재 어디있어요?
구: 선배를 찾는 거에요 아님 언니를 찾는 거에요? 뭐야 혼자 쿨한 척은 다하더니 많이 급하셨나봐요? 이제 좀 친근하고 사람 같네요. 잠깐만요...이사님 마음 누구보다 제가 이해하니까... 선배 거기있대요. 누구하고 있는지는 저도 모르지만. 안좋은 일이 생길거라는 예감은 무시하는 경향이 있잖아요. 믿고 싶지 않고 모른척하고 싶은 마음이야 이해하지만... 내가 안본다고 그 일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가서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세요.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 척 할 수 있을지 저도 궁금하네요.
<11-12화>
- 안현성과 정희주의 대화
안: 어디갔다왔어?
정: 몇시에요?
안: 어디있었니?
정: 어?
안: 어디갔었어? 이 밤에 누굴 만나러 어디갔었냐고!
정: 가긴 어딜가...
안: 대답해봐...또 어디가려고
정: 가긴 어딜가...
안: 무슨 말이라도 해봐
정: 무슨말?
안: 거짓말이라도! 차라리 거짓말이라도 해! 최소한 그런 성의라도 보여 나한테!
안: 서우재랑 같이 있었니? 다시 만나는거야? 그래? 무슨 말이라도 해봐.
정: (무슨 말을 해야될까? 아무데도 가지 않고 밤새 여기 있었다 말한들 당신이 믿어줄까?)
안: 말해. 아무말이라도 말해봐!
정: (아님 언제부터 어디까지 알고 있냐고 물을까? 그걸 알면서도 어떻게 아무렇지 않은 척 날 대할 수 있었냐고 당신 속셈이 뭐였냐고 물을까?)
안: 변명이라도 하라고!
정: 거짓말이고 변명이고 다 못해. (하고 싶은 말 대신 해야할 말을 한다.) 내가 잘못한 걸 아는데, 뻔뻔하게 어떻게 그래. 어리석었어. 너무나 끔찍한 일을 저질렀어. 다 내 잘못이야. 해원이가 내 주위를 맴돌면서 당신까지 불안하게 만든거. 리사한테, 호수한테까지도. 다 내잘못이야. 다 나 때문이야. 내가 다 망쳤어.
안: 왜 그랬어?
정: 실수였어. 그 말외에 다른 말은 다 하찮은 변명이지 이유같은 건 없어. 당신하고 아이들한테 항상 속죄하고 살고 있어. 후회해. 매일 후회해. 후회해도 어쩔 수 없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이것만은 알아줘요. 돌이킬 수 있다면 내가 무슨 짓이라도 하고 싶어. 용서하기 힘든 일이라는 거 알아. 나라도 그래. 당신이 하라는대로 할게. 어떻게든 날 못참겠으면 내가 떠날게...조금만 시간을 줘요. 미안해요. 미안해.
안: 이럴거였으면 미친놈처럼 널 찾아다니지도 않았어. 내 평생 싸워서 이룬 건 당신하고 내 가족 뿐이야. 난 그걸 놓칠 생각이 없어 ...다시는 내 눈 앞에서 사라지지마.
모든 걸 덮어둔 채 없던 일처럼 살고 싶었던 현성의 마음에 균열이 생긴다. 호수의 생일날 해원이 두고 간 사진(희주,우재,호수의 모습)을 본 건 다름 아닌 현성이었다. 희주의 외도 사실을 알았지만 자기가 이룩한 가정을 깨고 싶지 않은 현성은 이를 모른 척했다. 그러나 우재와 해원이 그 앞에 다시 나타나 마음 속 깊이 넣어두고 싶었던 일들을 들추려 한다. 특히 해원은 모른척 하고 싶은 마음이야 이해하지만 내가 안본다고 해서 그게 없었던 일이 되는 건 아니라고, 그걸 막상 눈으로 봤을 때 정말 모른척할 수 있겠냐며 현성을 자극한다. 마침내 오랫동안 숨겨두었던 외도 사실이 희주와 현성의 관계에서 드러나면서 둘은 대치한다. 인상적이었던 건 현성이 거짓말, 아무말, 변명이라도 좋으니 무슨 말이라도 해보라고 이야기하는 대목이었다. 거짓말, 아무말, 변명 모두 진실을 가리우는 말들이다. 현성은 자기의 힘만으로는 직면하고 싶지 않은 일을 외면하는게 역부족이니 희주의 말을 통해서라도 그 사실을 가리고자 한다. 그에 응하듯 희주는 하고 싶은 말 대신 해야할 말, 어쩌면 현성이 원하는 거짓말, 아무말, 변명에 수렴할만한 말들을 쏟아낸다. 그리고 현성은 희주와 우재, 그리고 호수 세 사람이 함께 있는 사진을 희주가 보는 앞에서 태우며 가족이란 내가 평생 싸워서 이뤄낸 유일한 것이라고, 그걸 놓칠 생각이 없다고 고백한다.
평생을 어머니에게 속박되어 자유의지를 발휘할 수 없던 현성은 순수하게 자기 힘으로 세운 성(Castle), 즉 가족을 포기할 수 없다. 희주에 대한 사랑보다도 어머니와 평생 싸워서 이뤄낸 유일한 것이라는 그 상징성이 현성이 희주를 포기할 수 없는 더 간절한 이유이기도 하겠다. 평생을 어머니의 굴레 가운데 갇혀 살았으나 결국 현성 또한 어머니처럼 자기만의 성을 구축하고 그 안에 있는 가족들이 그 밖을 벗어날 수 없게 한다. 애석하게도 거기에 갇혀 있는 것은 아내와 자식들 뿐만 아니라 현성 자신도 포함된다. 어머니가 이룩한 성에서 나온 현성은 자기가 만든 성에 한번 더 갇힌다. 어쩌면 평생을 성 안에서 살고 있는 셈이 되겠다. 어머니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가정을 꾸리면 자기 힘대로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어머니가 가족들을 대하는 방식을 아내와 자식들에게 다시 한 번 반복함으로서 그 폭력을 계승하고 재생산한다. 현성은 아직도 어머니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지금의 가정은 순전히 자기 힘으로 이뤄낸 유일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오히려 어머니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살고 있는 것이다.
- 안현성과 박영선(현성의 엄마)의 대화
안: 당분간 유치원 보내기 힘들 거 같아요. 선생님들도 괜히 눈치보는 것 같고
박: 바꿔. 아니다. 개인 교사 붙여서 영어 위주로 바짝 가르쳐 내년에 유학 보내게. 리사애미?
안: 리사 오늘 실기시험이잖아요. 거기 갔어요.
박: 걔도 바꿀 수 있음 바꿔.
안: 엄마.
박: 애들 엄마자리 네 와이프자리 무엇보다 내 며느리 자리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어.
안: 애 들어요. 무슨 말이 그래요.
박: 살면서 제일 계산기 두들겨야 하는게 결혼인데 네가 다른 여자하고는 죽어도 결혼 안한다 애도 안낳는다 난리 피워서 받아준거야. 다 날 닮았는데 어찌 여자 보는 눈은 네 아빠를 닮았니?
안: 제발...제발요...10년을 넘게 같이 살았어요. 희주 어엿한 애들 엄마고...아직까지 그렇게 남처럼 대하면...제가 선택하고 지금까지 산 인생은 뭐가 되는데요.
박: 다시 리셋하면 되지 뭐가 문제야 너 아직 한창이야 왜 자꾸 걔한테 끌려다녀 짜증나게
안: 좋아하니까요. 제가 희주를 더 좋아해요.
박: 미친놈 그러게 계산 좀 하면서 살라니까.
안: 사람 마음이라는게 한쪽으로 기울 수 밖에 없잖아요. 둘이서 똑같이 주고받고 계산하고 안돼요. 그렇게.
박: 그니까 네가 왜 기우는 쪽이냐고 뭐가 모자라서.
Ep. 13
- 안현성과 박영선(현성의 엄마)의 대화
안: 호수 내 아들이에요
박: 넌 그렇게 믿고 싶겠지 그러니까 확인해보자고
안: 이딴 검사 필요없다구요
박: 너 벌써 해봤니? 내가 널 못이겨 이 결혼 허락한 거 같아? 떡하니 임신한 애 달고와 걔 아님 죽겠다고 했을 때 난 널 벌써 놨어. 글러먹은 네 놈 대신 다시 제대로 세팅해 키울 내 후손을 만들려고 널 봐준거야. 씨받이가 필요해 여태 널 봐준거라고!
안: 엄마 제발 좀!
박: 넌 뭐가 캥기는 게 있어서 미리 알아봤을 거 아니야. 네들 이러는 걸로 더 확실해졌다. 추잡한 냄새가 진동을 하네. 결과 상관 없이 이혼해!
안: 저 이제 곧 50이에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 자신 없어요. 희주가 나가면 저도 갑니다.
안: 엄마도 그랬잖아. 마지막까지 끝까지 아버지 안놔줬잖아요!
박: 괘씸하니까! 그 자리까지 올라간 게 누구 덕인데 꼴랑 머리 하나 믿고 감사한 줄 모르고 제 연민에 빠져서는... 없는 것들이 꼭 그런다. 제 능력으로 그 자리 차지했다고 착각해. 정희주라고 다를 것 같아?
안: 희주는 달라요. 제가 알아요.
박: 안다고 말하지마. 나는 네 아빠 다 안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아니더라 30년을 같이 살고도 이 사람이 누군지 헷갈릴 정도로 아무것도 모르겠더라 그 인간 때문에 내 평생에 오점이 남았어. 네 아빠가 내 존재를 하찮게 만들었다고! 넌 나처럼 안될 자신 있어?
현성이 가지는 주된 문제들은 어머니와의 대화를 통해 더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현성의 엄마인 영선은 이익계산이 철저한 사람이다. 자기에게 이익이 되지 않으면 사람조차도 얼마든 대체 가능하다고 여기는 비인간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특히나 영선에게 며느리 희주는 언제든지 대체 가능한, 어쩌면 대체하고 싶은 존재일 뿐이다. 영선은 희주가 어떤 내면을 지닌 사람인지는 관심이 없고 다만 자기의 며느리 역할을 마땅히 수행할 수 있는지 여부만 중요했을 것이다. 엄마, 아내 보다 더 중요한 건 자기의 며느리 자리라고 말하는 영선의 대사를 통해 영선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사람인지 알아차릴 수 있다. 며느리인 희주가 기준에 못미쳐서 그에게만 이런 횡포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다. 사실 상 남이라고 여기는 희주 뿐만 아니라 자식인 현성조차도 영선에게는 자기 세계의 부품일 뿐이다. 자식의 삶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얼마든 그 인생을 다시 리셋시키고 새로 시작하게 하면 그만이다. 또한 자식이 제 맘에 들지 않게 행동하면 글러먹었으니 버리고 다시 제대로 세팅해 키울 대체자를 찾으면 문제는 해결된다. 리셋, 세팅 등의 말에서 기계 부품이 연상된다. 이를 통해 영선이 매사에 자기 주변의 사람들을 얼마나 비인격적으로 대우했을지, 그 안에서 자식인 현성은 얼마나 크게 시달렸을지 알아차릴 수 있다. 이에 대응하여 현성은 이미 오랜 세월을 희주와 함께했고 이를 끝내면 어머니를 거역한 자기의 선택이 순식간에 오답이 되는 것이므로, 그렇다면 이를 지키기 위해 그동안 쏟아부었던 세월 또한 무용지물이 될테니 희주와의 관계를 끝낼 수 없겠다고 실토한다.
현성은 자기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고 받아주는 양육자없이, 오히려 양육자 마음에 들지 않아 탈락할 수 있다는 위기감과 그가 설정한 기준치에 미치지 못한다는 열등감에 시달리며 살아왔다. 그 와중에 희주의 등장은 자기를 옭아매었던 영선에게 저항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또한 희주와 현성의 사회적 지위에는 큰 격차가 있었으므로, 희주는 영선과 달리 현성을 함부로 휘두를 수 없는 여성이었다. 영선의 세계로부터 탈출하여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 자기 의욕대로 행동할 수 있으니, 현성에게 희주는 배우자로 적격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현성은 제 힘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다. 등장인물 소개에도 나와있듯이 현성의 자리는 자기의 능력이 아닌 어머니의 후광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니 결혼 이후에도 현성과 어머니의 관계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제 힘으로 가정을 이루었다고 생각하였지만 현성의 권위는 결국 어머니가 만들어준 것이기 때문에, 현성이 힘을 발휘할수록 어머니 영선의 세력이 더 강력해졌을 것이다. 오히려 외부인이었던 희주까지 영선의 세계에 귀속되어 온갖 폭언과 무시를 견디며 지금까지의 세월을 살아왔다.
현성에게 어머니 영선은 증오의 대상이다. 그렇기에 영선으로부터 벗어나서 이를 극복하고 싶다. 어머니가 틀렸고 내가 맞았음을 증명하고 싶다. 희주와의 결혼은 이러한 현성의 마음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어머니가 가장 싫어할만한 선택이 나에게는 가장 옳은 선택이었음을 증명하는 것. 그게 현성에게는 가장 중요한 삶의 과제이다. 희주와 어엿한 가정을 꾸려 행복하고 번듯하게 산다면 이를 잘 해낼 수 있다. 실제로 현성은 이러한 증명을 확실하게 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해왔다. 그런데 희주가 외도를 했다. 희주의 외도로 결혼 생활이 끝난다면 결국 '없는 것들과 상종하면 안된다'는 영선의 말이 맞게 된다. 더불어 영선은 배우자의 외도로 인해 지금까지 고통받고 있다. 그러면 현성은 어머니로부터 벗어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그토록 증오하던 어머니의 모습을 닮게 되는 것이다. 어머니 영선의 대사에서 현성이 자기와 닮아있음을 암시하는 부분들이 눈에 띈다. 영선은 외도한 배우자를 끝까지 놔주지 않고 집착했다. 어쩌면 현성 또한 앞으로 희주를 놔주지 않고 더 심하게 집착할 수 있음을 암시하는 것 같기도 하다. 현성은 어머니 영선의 모습을 닮고 싶지 않기 때문에 희주를 선택한 것이 자기 인생의 오점이 되지 않도록, 그래서 스스로가 하찮아지지 않도록 애를 쓰지 않을까. 거듭 말하지만 현성의 희주를 향한 집착은 희주를 향한 사랑 때문이 아니라 완벽하다고 믿은 자기 세계를 끝까지 지키기 위해서이다. 만일 그 세계가 파괴된다면 현성의 결말은 어떨런지.
- 안현성과 서우재의 대화
안: 희주 어딨어?
서: 어? 아 이렇게 보니까 반갑네요. 여기 우리 둘이 자주 오던 곳이었는데 그거 알고 왔어요?
안: 우리 둘은 부부야. 난 내가 본 것만 믿어. 넌 여기 지금 혼자고. 희주는 제 자리에 있는거야.
서: 당신 옆이 제자리라고 어떻게 확신하는데? 그 여자를 알량한 돈으로 묶어 놓고 새장 안에 시들어가도 모른 척 두는게 제자리인가? 당신은 영영 모를거야. 정희주라는 여자가 얼마나 뜨거운 여자인지.
현성은 희주를 잘 안다고 생각한다. 어머니 영선은 다 안다 착각하지 말라고 반박한다. 그리고 해당 대화에서도 현성은 희주를 잘 안다고 생각하고 우재는 이를 반박하며 도리어 현성을 도발한다. 이 대화에서도 보이는 것만 믿고 그 이면의 진실은 외면하는 현성의 은폐적 성격이 드러난다. 화려한 성의 주인인 현성은 어디에서도 약점이 될만한 것들을 보이지 않으려 애쓴다. 아니, 아무런 약점과 균열 없이 자기 자신과 자기로부터 비롯한 모든 것들은 다 완벽하다고 굳게 믿고 있을 것이다. 믿을 수 없다면 믿는 척이라도 열심히 하고 있을 것이다. 이를 놓고 우재는 희주가 현성에 의해 돈에 묶여 새장에 갇힌 존재라고 도발한다. 말없이 떠나가버린 희주를 향한 분노를 현성에게 옮기는 측면이 강한 대사지만, 나는 이 부분이 현성이 간과하는 바를 정확히 직시시켜준다고 생각했다. 현성의 어머니 뿐만 아니라 사실 현성 또한 희주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몰랐던 것이다. 희주 또한 스스로 힘을 갖고 의욕할 수 있는 사람임을 현성은 생각하지 않았다. 어쩌면 현성이 그렇게 살아본 적이 없으므로 자기 사람인 그래서 이미 머릿속에 자기화된 희주가 자기 생각과 다르게 살 수 있는 사람임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 같다. 그리고 희주는 현성과의 관계를 지키기 위해 현성이 원하는 역할극 수행을 기꺼이 마다하지 않았으므로 현성은 이를 알아차릴 수 없었다. 언젠가 희주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몰라도 우재한테 만큼은 자기를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 있었다고 회상한다. 더불어 희주는 무모했던 우재를 싫어하면서도 좋아했다. 우재도 희주와 긴 시간을 보내면서 현성의 곁에서 희주가 물질적 안정감을 누리고 있긴 하지만 동시에 갇혀 있기도 한 상황임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스스로의 힘으로부터 비롯된 안정감이 아니니 안정감의 주체인 자기 남편에게 의존하고 갇힐 수 밖에 없는 희주의 삶이 희주 자신에게는 가장 큰 약점이었을것. 희주에게 버려진 우재는 이러한 희주의 약점을 현성을 공격하는데 이용한다. 희주가 우재 곁에서만큼은 자유로울 수 있다는 건 우재 입장에서 희주에게 자기가 현성보다 더 나은 사람임을 보여줄 수 있는 부분이니까.
- 구해원과 안현성의 대화
구: 이사님이 공연 좋아하셔서 제작지원까지 하신다는 이야기 학교에 있을 때 듣긴 들었는데 이렇게 진심인줄은 몰랐어요.
안: 갤러리는 시작이고 갤러리에서 아트센터로 확장하면 센터 안에 극장도 들어올겁니다. 리사 엄마 덕에 뒤늦게 내 꿈을 이루고 있어요 뭐 또 궁금해요?
구: 전 교직원들 데리고 오페라 극장 갔었던 게 생각나네요. 제목이 뭐였더라. 바람난 아내를 두고 관객들 앞에서 웃어야 하는 광대 이야기였는데, 그건 이사님 이야기였어요. 그땐 전 봤어요. 이사님이 얼마나 괴로워하는지.. 차라리 팔다리가 부러졌다면 사람들이 잠깐이나마 같이 아파해줬을텐데 보이지 않는 고통을 인정받는 건 참 어려워요.
안: 서우재 기억이 돌아온게 맞습니까?
구: 이사님도 만나셨구나. 분명 기억이 돌아오길 바랐는데 내 예상과는 너무 다른 전개라... 숨기는 게 있는 사람은 더 곤란하겠어요.
태림학원의 대표이사인 현성은 의외로 연극과 출신이다. 해원과의 대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연극에 대해 나름대로 진지한 관심을 보인다. 연극과 관련된 일이 자기 꿈이라고 말할 만큼 그는 연극에 깊은 애정이 있다. 다만 나는 이 지점에서 현성의 삶이 곧 그 자체로 연극이라고 생각했다. 자기 의지를 발휘할 기회를 박탈당한 채 어머니가 바라는 모습대로 살아온 현성은 늘 역할극처럼 살지 않았을까. 이러한 역할극은 고스란히 희주에게까지 전해져서 희주 또한 그처럼 살고 있다. 현성은 희주보다 더 긴 세월을(사실 상 평생을) 연극을 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자기 내면의 진짜 모습조차 상실해버리지 않았을까. 텅 비어버린 자아를 끊임없는 역할극으로 채워넣은 것이 지금의 현성의 모습이 아닐런지.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바라는 모습들을 마치 실제인 것처럼 연기해야 텅 빈 자아를 가진 삶을 지탱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해원의 말처럼 바람난 아내를 두고 관객들 앞에서 웃어야 하는 광대가 현성이라면, 현성이 숨기고 있는게 단지 희주와의 균열 뿐일런지... 어쩌면 자기 삶 모두가 연출된 것이라 숨기고 있는 것은 자기 존재 전부가 아닐런지 싶다.
- 안현성과 정희주의 대화
안: 일년에 한 두번이야. 난 괜찮아. 내가 맘에 걸려서 연락드렸어. 내가
정: 그래봤자 우리 엄마 고마운 거 몰라요. 우리 엄마한테 잘해주지마.
안: 당신 우리 엄마한테 잘 하잖아.
정: 그거하고 다르지.
안: 뭐가 달라.
정: 아깐 같은 프로젝트 하시는 건축가 선생님이 건강이 악화되었다고 급하게 회의가 잡힌 거에요. 오해하지 말아요.
안: 오해 안해. 당신 얼굴에 그 친구 불편하다고 다 써있던데. 장모님 이번 가게에 애정이 많으신 거 같아. 메뉴도 직접 다 선정하시고... 이것 저것 챙기시는 거 보면은...열정이 넘치셔. 이럴 때 우리도 잘해드리면 좋잖아. 잘 됐으면 좋겠다.
정: (엄마한테 잘하는게 아니야)
안: 호수야. 잘 시간인데 작업 밀렸다며. 가봐 내가 챙길께. 자 올라가서 잘까?
정: (지금 이 사람 내 약점을 하나하나 확인시켜주고 있는거다)
Ep. 14
- 안현성과 정희주의 대화
안: 몰랐다고? 그런 사진은 왜 찍었어?
정: 사인회였어. 공개된 장소라 누구라도 올 수 있었고. 사람들 앞에서 거절하는 게 더 이상한 일이야.
안: 그렇게 안일하게 구니까...서우재가 저렇게 제멋대로 행동하는거 당신이 여지를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정: 그런 적 없어. 그러고 싶지도 않고.
안: 앞으로 엮일 일 다 차단해. 애초에 빌미를 주지 말라고.
정: 그게 무슨 소리야? 당신 설마 이번 프로젝트까지?
안: 엄마까지 알았어. 그거 무슨 소리인지 몰라? 지금 몸을 사려도 모자랄 판이야.
정: 그래도...
안: 네가 포기 못할 걸 아니까 더 날뛰는거야. 거부당하면 당할수록 더 미쳐서 흥분하는게 사람이고!
정: 이제와서 전시에 빠지는 건 너무 민폐야. 우선생님 마지막 전시를 망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
안: 그게 그렇게 중요해?
정: 그 얘기가 아니잖아.
안: 그럼 선택해봐. 우리가족이야? 아님 빌어먹을 그새끼야?
정: 여보...
현성은 은밀하게 희주와의 파워게임을 시도한다. 부드럽고 자상한 모습으로 '좋은' 사람 역할 정도야 거뜬히 해내는 현성은 역시나 대놓고 칼날을 들이대지 않는다. 희주 또한 이러한 현성의 시도를 단박에 알아차린다. 현성은 사실 순전한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는 희주에게 선택받을 수 없음을 알고 있다. 자기가 희주에게 줄 수 있는(사실 어머니로부터 파생하고 있는) 모든 물질적인 풍요를 다 제거하고나면, 희주는 현성이 아닌 우재에게 뜨거울 사람이다. 현성도 인정이 안될 뿐이지, 사실 그걸 인지하고 있다. 그래서 현성은 희주의 삶을 지탱해주는 존재가 누구인지 희주에게 자각시켜주는 것이다. 희주가 자기를 떠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현성이 힘을 발휘할 때는 늘 배후에 어머니가 있다. 어쩌면 희주를 잡아둘 힘의 근원은 자기가 아닌 자기 어머니에게 있는 것이다. 현성 자신만으로는 희주에게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 없다. 그래서 현성이 어머니 영선에게 희주를 향한 자기의 마음이 더 기울어져있다고, 자기가 희주를 더 좋아한다고 표현했을지도 모른다. 현성과 희주의 관계에서 표면적으로 약자는 희주처럼 보이지만 현성은 희주가 떠나가면 정말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는 존재이다. 이런 의미에서 진정한 약자는 현성이다. 현성은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완벽한 가정 혹은 자신이 이룩한 화려한 성의 지배자처럼 보이지만 결국 자기가 세운 성 안에 갇힌 자이다. 현성은 그 성 밖을 빠져나갈 능력도 용기도 없다. 희주가 현성을 떠난다면 현성에게 남은 선택지는 어머니 영선에게 다시 종속되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해원의 말대로 이 이야기의 끝이 절대 해피엔딩일 수 없다면, 현성에게 가장 비극적인 결말은 자기가 선택한 아내 희주가 떠나고 그 자리에 영선이 흡족해할만한 여자를 아내로 맞는 것이 아닐까. 잔인한 말이지만 현성같은 캐릭터에게는 가장 흔한 결말이겠다. 약점이 잡힌 자는 희주가 아니라 현성이다.
드디어 내일과 모레 드라마 <너를 닮은 사람>의 절정을 맞이하겠다. 지금까지의 극의 흐름으로 봐서는 인물들마다 마땅히 할당되어야 할 고통의 몫이 공평하게 배분될 것 같기도 하다. 확실히 어설픈 해피엔딩일 순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