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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채원 Dec 21. 2022

오, 나의 필레 오 피쉬!

 가까운 친구로부터 맥도날드 필레 오 피쉬 버거가 곧 단종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뿔사. 우려하던 일이 현실이 되었구나 싶어서 아찔했다. 몇 번의 검색으로 어렵지 않게 올해를 끝으로 더 이상 필레 오 피쉬 버거를 판매하지 않기로 한 것이 사실임을 확인했다. 이제 내년부터는 필레 오 피쉬 버거를 먹을 수 없다. 


 1999년 다섯 살 무렵, 집 근처 먹자 골목 중심부에 맥도날드가 생겼다. 놀이동산을 표상케 하는 도날드 아저씨가 그 앞에 우뚝 서 있었다. 멋 모르는 꼬마들에게는 너무나도 이색적인 서구식 유혹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꽤나 단호했던 나의 엄마는 저어기에 가고 싶다는 나의 요청을 "그저 그런 빵집"이니 굳이 갈 필요 없다고 받아주지 않았다. 패스트푸드에 대한 인식이 당시에는 훨씬 좋지 않았으므로 건강하게 잘 키워보겠다는 젊은 양육자의 의욕이 엿보이는 부분이다. 그땐 그랬었다. 


아무리 선한 의도를 담지하고 있다 할지라도 거짓은 오랫동안 관철되기 어렵다. 공교롭게도 먹자 골목 한복판에서 맥도날드 콜라컵을 들고 있는 옆집 친구를 마주해버렸고, 맥도날드가 역시나 내 직감대로 그저 그런 빵집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최소한 "콜라를 파는 특별한" 빵집이었던 것이다. 아직도 이름이 또렷히 기억나는 옆집 친구 덕분에 나 또한 새천년을 맞이하기 전 맥도날드에 입성해본 어엿한 꼬마로 거듭났다. 


 한편 나는 생선을 잘 먹는 꼬마였다. 섬에서 나고 자란 나의 아버지 덕에 해산물 요리를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었다. 더불어 그에게 물려 받은 유전자가 있으니 이런 저런 해산물 요리를 주는 대로 잘 먹었다. 그래서 나는 맥도날드의 "빵" 메뉴들 중 휘시 버거를 제일 좋아했다. 회색 은박지로 된 포장지를 뜯으면 따끈하고 담백한 흰살 생선 튀김과 보드랍고 고소한 타르타르 소스, 그리고 풍미 좋은 치즈가 들어 있는 버거가 있었다. 이건 내게 단지 소소한 행복은 아니었다. 아무때나 즐길 수 없는 꽤나 중대한 사치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당시에도 휘시 버거를 맥도날드 최애 메뉴로 삼는 사람을 만나진 못했었다. 그때는 그걸 크게 개의치 않았었다. 외로움을 모르는 나이였을까. 그래도 좀 신경은 써볼걸. 당시에 나는 휘시버거의 상실을 예감하지 못했었다. 하긴 그 전에 동네 맥도날드부터 사라졌으니 휘시버거의 부재까지 생각하는 건 내 몫이 아니었다. 그런 면에서는 무딘 마음으로 그저 그러려니 했던 것 같다. 그 시간으로부터 제법 멀리 떨어지고 나서야 그 일련의 것들이 추억이라는 범주 안에서 정리되고, 비로소 나는 휘시버거를 그리워하는 것들 중 하나로 인식할 수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한 2년 전인가. 한국 맥도날드 대표가 호주 출신의 엔토니 마르티네즈로 바뀌면서 휘시 버거가 '필레 오 피쉬' 라는 이름으로 부활했다. 뒤통수를 턱 하고 맞는 기분이었다. 붙잡을 수 없을 것 같았던 세기말의 조각들이 생생하게 내 손에 쥐어진 느낌이었달까. 단지 반갑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그 이후로 난 다시금 꼬맹이가 되어 최애 메뉴를 즐기곤 했다. 다만 그때보다 친구도 많아지고 말도 많아져서 주변 사람들에게 필레 오 피쉬 버거를 좀 강요하긴 했었다. 이 강요를 거창하게 표현하자면 나를 알아봐달라는 요청이요, 나의 동족을 찾는 행위였을지도 모르겠다. 반 농담 식으로 필레 오 피쉬 버거가 최애 메뉴인 타자를 찾으면 계층과 성별 상관없이 무조건 반려 삼아 결혼에 이르리라 나 자신에게 더 나아가 주변에게까지 다짐하곤 했으니까. 살면서 필레 오 피쉬 버거를 최애 삼는 사람을 한번도 만나지 못했으니, 만일 만난다면 운명이라고 단정짓는 것이 그닥 어리석은 일은 아닐 것 같았다. 지금도 그 마음은 유효하다. 아직 나의 반려를 찾지 못했다. 과연 찾을 수 있을까. 여러모로 상황이 더 어려워졌다. 역시 쉬운 게 하나도 없다. 


 필레 오 피쉬 버거가 워낙 비선호 메뉴니까(쓰면서도 마음이 아프지만 사실이다. 나 이외에 이 버거를 최애 삼는 사람을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 최애 삼는 건 고사하고 이 버거를 정말 맛있게 먹었다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만일에 맥도날드가 이걸 단종시킨다고 하면, 난 단종을 항의하는 전화도 하고 이메일도 보낼거다 라고 호기롭게 말하곤 했었다. 온갖 종류의 파토스를 상실한 지금의 나는 애석하게도 그럴 의욕 또한 상실했다. 내가 화를 잃을 줄이야. 지금의 내가 이러한 사람이 될 지 그땐 알지 못했다. 그저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파토스가 없으니 욕망도 꺾인 탓일까. 요새는 식욕도 예전같지 않아서 사실 맥도날드에 자주 가지 못했다. 난 마음처럼 필레 오 피쉬 버거를 잘 지키지 못한 것 같다. 상실에 대한 당위가 뚜렷해 보인다. 나 조차도 필레 오 피쉬 버거를 자주 먹진 않았으니까. 단종이 순전하게 내 탓은 아니겠으나 어쨌든 책임을 다하진 못한거지. 지나친 자기 비난 같아 보일 수 있는데 그걸 좋아하는 소수의 사람조차 자주 즐기지 않았으니 그에 관한 상실에 관해서 긴 말을 할 수 없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올해가 열흘도 채 남지 않았다. 내년이 되기 전 필레 오 피쉬 버거 단종에 관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회가 닿는다면 맥도날드에 들러 맛있는 필레 오 피쉬 버거를 먹는 것. 이는 한 번 내지 두 번 정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더불어 기약 없지만 언젠가 또 필레 오 피쉬 버거가 한국에서 부활할 것을 기대해보는 것. 혹은 다른 나라에 가서 필레 오 피쉬 버거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길 바라는 것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맥도날드 본사에 전화 혹은 이메일할 의욕을 잃어버린, 고로 파토스를 잃은 자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움, 애정, 추억 등 남아있는 마음의 잔여들을 어쩌지 못해 이러한 글을 쓴다. 다시 또 소멸의 길을 걸어갈 나의 휘시 버거, 나의 필레 오 피쉬 버거에게 헌정하는 글로 봐주면 감사하겠다. 이는 아무도 찾지 않는 맥도날드 내 최애 메뉴를 위해 기꺼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더불어 이 글을 통해, 필레 오 피쉬 버거를 최애 삼는 벗을 이제라도 만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 같다. 이름 모를 그 또한 동지를 찾았다는 사실에 감격하여 나처럼 서로가 서로를 반려 삼아 결혼에 이르는 꿈을 꾸고 싶다면, 기꺼이 손을 내밀어 달라 요청하는 바다. 나는 보기보다 이런 면에선 맹목적이다. 거리낌없이 그 제안을 받으리라. 우린 필레 오 피쉬가 맺어준 운명일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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