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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채원 Jan 03. 2023

당신의 에우리디케는 무엇입니까

의심과 믿음의 경계에서

 그리스 신화 속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를 아시는지. 나 또한 한참을 잊고 지내다가 재작년 11월 말에 발매된 자우림의 곡 <EURYDICE>를 통해 그 이야기를 다시금 상기했다. 가사와 멜로디 그리고 이에 대해 소개하는 자우림의 곡배경까지 모두 훌륭하니 아래 링크를 통해 이 곡은 꼭 감상해보길 추천한다. 해당 곡이 자우림을 대표한다고 말하긴 어려우나 자우림이라는 밴드가 대중가요라는 범주 안에서 이 정도까지 작품성을 갖출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https://youtu.be/5YRLgLCvzjg 


 사랑하는 아내, 에우리디케를 찾아 이편에서 저편으로의 초월을 한 오르페우스. 오르페우스의 절절한 사랑은 저편의 여왕 페르세포네의 마음을 움직였고 둘을 이편의 세계로 보내는 것을 허락한다. 다만, 저편의 왕 하데스는 영특한 오르페우스에게 한 가지 금기를 조건으로 내건다. 이편으로 갈 때, 뒤따라가는 에우리디케를 절대 돌아보지 말라는 것. 그러나 오르페우스는 이 금기를 깨고 뒤를 돌아보고, 이편의 빛을 앞에 둔 채 저편의 동굴로 빨려 들어가는 아내 에우리디케를 보며 절규한다. 에우리디케를 두 번 잃었다는 슬픔을 극복 못한 오르페우스는 곡기와도 같은 음악을 끊어버리고, 결국 주변의 분노를 사서 몰매를 맞고 죽음을 맞이한다.


 이 곡을 들으며 내게 풀리지 않는 의문은 다음과 같았다. 오르페우스에게 에우리디케란 무엇인가. 우리가 각자마다 품고 있는 에우리디케는 무엇인가. 이편에서 저편으로 초월할만큼의 엄청난 힘을 발휘하게 하나 동시에 사소해 보이는 금기를 지키지 못하게 하는 양가적 존재는 무엇인가. 훨훨 날아오르게 하다가 이내 발목 잡히고야 마는 오르페우스. 그리고 이 모두의 계기되는 에우리디케. 둘은 어떤 관계일까.


 그러던 와중 작년 2월에 같은 이야기를 모티브로 하는 뮤지컬 <하데스타운>을 보았다. 시대적 배경이 고대 그리스에서 대공황 미국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오르페우스는 순수성을 담지한 젊은 음악가로, 에우리디케는 뉴욕 거리를 떠돌아다니는 가난한 여인으로 바뀌었다. 저편의 세계는 광물이 묻힌 지하 도시로 전환하였다.

 생활력 강한 에우리디케는 오르페우스와 함께하는 삶에 다가올 가난을 두려워하나, 이내 어두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꿈꾸는 오르페우스의 순수함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고 영원히 함께할 것을 약속한다. 광물로 인해 굶진 않으나 순수한 꿈을 상실시키는 하데스타운의 주인인 하데스는 가난한 여인 에우리디케를 유혹한다. 생활고로 인해 에우리디케는 하데스타운의 노예적 삶에 굴복하고 만다. 이 과정에서 오르페우스는 지상을 구하고자 사랑의 노래를 만드는 데 정신이 팔린 나머지 생존을 요청하는 에우리디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 뒤늦게 에우리디케가 사라졌다는 것을 안 오르페우스는 아내를 찾으러 지하도시 하데스타운으로 떠난다. 알려진 대로 오르페우스의 노래에 감동한 페르세포네는 에우리디케를 풀어줄 것을 하데스에게 요청하고, 하데스는 에우리디케를 잡아둘 마지막 방책으로서의 금기를 설정한다. 뒤따라오는 에우리디케를 오르페우스가 절대 뒤돌아봐서는 안된다는 것. 만일 에우리디케가 잘 따라오는지 의심하여 뒤를 돌아본다면 에우리디케는 영원히 하데스타운에 갇힐 운명이었다. 오르페우스는 운명의 여신들이 부추기는 의심을 극복하지 못한다. 지상으로의 출구 바로 앞에서 뒤돌아보고, 오르페우스의 의심과 달리 잘 따라오고 있던 에우리디케는 영원히 하데스타운에 갇히며 극이 끝난다.

 저편의 세계를 꿈과 이상이 사라지고 물질만 남은 노예적 세계로 해석한 것이 흥미로웠다. 이상주의자 오르페우스와 물질적 세계인 하데스타운 사이에서 갈등하는 현실주의자 에우리디케의 열연도 돋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르페우스에게 에우리디케는 어떤 의미인지에 대한 의구심은 풀리지 않았다.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를 향한 사랑의 힘으로 그 험난한 길을 온갖 재주를 발휘하여 견뎠는데, 왜 결국 하데스의 금기에 굴복하고 말았을까.


 에우리디케에 관한 질문은 답을 알려주지 않은 채 자꾸 나를 어딘가로 데리고 가는 것 같았다. 종종 이 질문이 생각나면 주변 친구들에게 답을 구해보았으나 다들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잘 모르겠다는 의미였다. 어쩌면 그들에게는 질문의 답을 구할 동기가 없어 보였다. 내가 대답해야 하는 질문이었기에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한 번에 풀리지 않더라도 인내하고 기다려보기로 했다.


 마침내, 작년 7월에 영화 <헤어질 결심>을 보았다.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물에 잉크가 퍼지듯이 서서히 물드는 사람도 있다"는 영화 대사처럼 나 또한 이 영화에 서서히 물들어 이내 헤어 나오지 못할 것 같았다. 처음에 볼 때는 "대중적으로나 예술적으로나 참 준수한 박찬욱식 미장센" 정도로 감상평이 마무리되었는데, '붕괴'라는 해준의 고백이 내 것이 되는 순간, 더 나아가 해준이 극복 못한 '의심'의 궤도에 나 또한 서 있음을 깨닫는 순간, 영화는 완전히 나의 것이 된 느낌이었달까. 사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영화가 나의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오히려 영화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서래를 찾아 헤매며 바다 한가운데 묶여버린 해준처럼 말이다. 그 덕에 에우리디케가 오르페우스에게 어떤 의미인지에 대한 모종의 답을 획득하였지만.

 유능한 형사 해준은 내게 오르페우스로 보였다. 그리고 해준의 재능이자 동시에 덫은 결국 의심이었다. 오르페우스가 금기에 굴복한 까닭은 에우리디케를 향한 그의 사랑은 명료했으나, 오르페우스를 향한 그녀의 사랑은 그에게 불분명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에우리디케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의심을 거둘 수 없었을 것이다. 에우리디케로 인해 이편에서 저편으로의 초월을 경험하는 오르페우스처럼 해준 또한 서래로 인해 형사로서의 자아가 해체되는 '붕괴'를 경험하지만, 끝끝내 서래를 피의자라는 굴레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다. 서래는 이러한 해준을 잘 아는 까닭이었는지 그의 미결이 되고 싶어 한다. 의심의 대상이 되더라도 그를 떠나고 싶지 않았겠지.

 박찬욱 감독과 더불어 공동 극본 제작에 참여한 정서경 작가 또한 해준에게서 오르페우스를 보았다는 인터뷰를 보고 어찌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특별히 마지막 장면에서 서래를 찾아 헤매는 해준을 보고 오르페우스를 연상하였다고 했는데, 이러한 해준의 모습이 결국 자기 자신을 찾아 헤매는 것처럼 보였다는 인터뷰 내용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해준이 사랑하는 서래는 해준에게서 결핍된, 어쩌면 해준이 열망하였지만 이내 발휘되지 못한 야성을 담은 사람이라는 점에서 또 다른 해준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해준 발 밑에 있는 서래는 더 나아가 해준 안에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 라는 부분에서 오르페우스에게 에우리디케는 오르페우스가 갖지 못한 또 다른 자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흔히 서로의 결핍에 끌려 사랑의 관계를 맺는다는 건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다. 어쩌면 그 결핍은 나에게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비존재적으로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존재를 가장 강력하게 각인시키는 것은 결국 부재이기 때문에 상대를 향해 느끼는 강력한 끌림을 나의 결핍에서 찾을 수 있다면, 사랑하는 이는 내 안의 일부로서 가장 강력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이윽고 의구심에 관한 퍼즐이 맞춰졌다. 에우리디케는 오르페우스가 사랑한 여인. 사랑의 힘은 오르페우스를 초월하게 하고 해준을 붕괴시킨다. 이전의 세계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랑을 거두고 관계를 단절시킨 것은 의심이었다. 그렇다면 오르페우스, 더 나아가 우리는 사랑을 가능하게 할 무엇을 담지하고 있어야 했을까. 소박한 대답일 수 있겠으나 에우리디케는 날 사랑하고 그렇기에 날 잘 따라오고 있다는 '믿음'이었겠지. 서래는 나와 대립하는 용의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 사랑한 그 마음은 진실되어 있다는 것을 해준은 안개 속에서도 믿었어야겠지. 해준이 서래의 마음을 똑바로 직시할 수 없는 까닭은 서래의 잘못으로 인함이 아니요, 뿌연 안개 가운데 놓인 우리의 운명 탓일 테니까.


 언제까지고 의심 많은 오르페우스로 살 수 없겠다는 생각을 요즘 많이 한다. 작년 내내 이 질문에 잠식된 까닭이었을까. 올해로 바뀌는 지점에서 나는 영화 '헤어질 결심'을 꺼내 보았고 영화가 끝나고 나서는 말러 교향곡 5번 4악장을 들었다. 해의 첫날 보는 영화나 곡이 그 해 전체를 암시하는 경향이 있는 탓에 작품 고르기를 신중하게 하려고 했으나(웬만하면 순전히 낙관적인 것을 고르려고 했다.) 이내 나는 헤어질 결심을 고르고 말았다. 나는 무언가와 헤어질 결심을 할 수 있을까. 말러식의 집요하고도 촘촘한 사랑을 구사하는 나로서는 단절은 참 힘든 일이다. 쉽게 빠지지 못하나 빠지면 헤어 나오질 못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나는 의심도 참 많은 사람이다. 그러니 쉽게 빠지지 못하겠지. 여러모로 내겐 믿음은 참 어려운 일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결국 맹목적인 믿음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믿음을 결심한다. 좌절하다 못해 낭떠러지로 떨어진다 하더라도 사랑을 믿어보기로 말이다. 상처가 아파서 덧나더라도 믿음을 거두지는 말자고. 의심의 늪에서 헤매는 결말을 맞이하지는 말자고. 믿음으로 인한 좌절이 비극일지 의심으로 인한 단절이 비극일지 모르겠으나. 이상하던 무지개는 없을 수 있겠지. 지상에서 이상을 실천하는 방법이 사랑이라고 한다면 결국 실천적 차원에서라도 익숙치 않은 믿음을 구사해야겠지.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하던 작년 가을 즈음에 오르페우스에게 건네었던 말들이다. 어쩌면 나 자신에게 하는 말들일 수 있겠다. 이 말들에는 지상에는 없을 영원이 가득하네. 우리가 돌아갈 별에는 뿌연 안개가 걷혀 있겠지. 고로 사랑을 끊임없이 확인하고픈 우리의 소망도 이루어져 있겠지.


 "오르페우스여 왜 뒤를 돌아보았는가. 어째서 에우리디케를 믿지 못하였는가. 그가 당신 뒤에 있었다오. 그 또한 당신이 그를 사랑하는 만큼이나 그에 못지않게, 어쩌면 당신이 그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당신을 사랑하였을지도. 당신처럼 이편과 저편을 허물 재주와 의욕을 가지진 못했으나, 당신 만큼이나 그도 아름다웠다오. 저편의 세계에 꼼짝없이 갇혔다만, 그의 마음은 이편에 있는 당신에게 언제나 닿아있었다오. 오, 오르페우스여. 심장이 조각나 고통스러워하는 오르페우스여. 영원이라는 약조를 지키시게나. 이편에 관한 미련 없는 가련한 자여. 그대의 세계를 허무시게나. 그대의 세계를 허물어 철문같이 굳건한 에우리디케의 세계의 문을 한번 더 여시게나. 다시는 뒤돌아보지 말고 그대의 사랑 에우리디케에게 가서 미처 못다 한 사랑을 마음껏 쏟아내시게나."


당신을 도약하게 하였으나, 뒤돌게 하여 기어코 심연의 좌절에 이르게 하는 에우리디케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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