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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널목 Aug 07. 2020

안희연 시집,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해리 포터』 시리즈에 등장하는 패트로누스라는 것이 있다. 아즈카반의 간수인 디멘터가 곁에 다가오면 마법사들은 한기와 함께 절망을 느끼고 심지어 영혼을 빼앗기는데, 이 디멘터를 몰아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바로 패트로누스 마법이다. 초보자가 사용하면 안개처럼 흩어지는 빛이 튀어나올 뿐이지만, 제대로 된 패트로누스는 사용하는 마법사마다 다른 동물의 형상을 하고 있다. 패트로누스 마법을 사용하려면 반드시 행복한 기억을 떠올려야 한다. 그런데 행복한 기억으로 절망을 쫓는다는 패트로누스-디멘터의 관계는 곱씹을수록 의심쩍다. 슬픔에 빠진 사람에게 언제까지 슬퍼할 거냐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냐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부추기는 말들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이 시집 곳곳에도 그런 충고를 건네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이제 그만 그를 보내고 삶 쪽으로 걸어나오라는 말”(「망종」), “다른 나무가 이토록 많지 않으냐는 위안”(「미동」), “이런 슬픔으로는 어디에도 닿을 수 없어요”(「빛의 산」), “환히 지내란 말”(「앵무는 앵무의 말을 하고」). 그들은 행복한 기억을 떠올리며 주문을 외우면, 눈앞에서 절망이 물러나는 마법을 상상하는 사람들이다.

안희연은 그런 마법을 거절한다. 그는 슬픔으로 가득한 현실에서 벗어날 출구를 찾지 않는다. 대신 모두의 관심 밖으로 밀려난 “어떤 슬픔의 자리를 끝없이 되묻고 되묻는다.”(이제니, 뒤표지 글) 이 시집에는 『해리 포터』 속 패트로누스만큼이나 다양한 동물이 등장한다. 개, 양, 사슴, 토끼, 당나귀, 낙타, 도마뱀, 앵무새……  패트로누스와 달리 이 동물들은 행복한 기억만을 상징하지는 않는다. 패트로누스처럼 늠름하게 절망을 물리쳐주지도 않는다. “먼 산만 바라보는 늙은 개”(「면벽의 유령」), 덫에 걸려 “발이 검게 썩어들어”가는 사슴(「연루」)처럼 오히려 연약하고 상처받은 존재이거나 “하루하루 늑대로 변해가는 양”(「추리극」)처럼 실패로 기우는 전망에 가깝다. 그럼에도 안희연은 이 동물들을 외면하지 않는다. 그가 살고자 하는 세계는 “너를 잃어야 하는 천국”이 아니라(「면벽의 유령」), “버려진 페이지들을 주워 만든 책” 속이다. (「역광의 세계」) “만년설을 녹이기 위해 필요한 건 온기가 아니라 추위”이기 때문이다.(「추리극」) 도처에 가득한 슬픔을 외면하는 사람들에게, 안희연 그러다 마땅히 슬퍼할 일에도 슬퍼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되지 않겠냐고, 세상이 원래 다 그렇다고 체념만 할 거냐고 묻는 것만 같다.

덤블도어가 스네이프의 패트로누스를 보고 놀라는 장면이 있다. 스네이프의 패트로누스가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릴리 에반스의 것처럼 암사슴의 형상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집에 이토록 다양한 동물들이 등장하는 사연도 이와 다르지 않다. 안희연은 너무 많은 것을 사랑하고, 너무 많은 일을 자신의 일처럼 슬퍼하는 사람일 것이다. 이 시집 속 동물들은 그가 느낀 그 “슬픔을 보이는 것으로 만”든 결과물이다.(「소동」) 모든 사람이 시인의 마음으로 살 수는 없겠지만, 안희연은 분명하게 말한다. “당신에게는 사슴 한 마리가 있다. 당신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하지만 사슴은 오래전 당신을 찾아왔고 당신 곁에서 죽을 것”이라고(「연루」). 또 “누군가는 물고기를 기르고/누군가는 북금곰을 기”른다고. 이 동물들은 “한밤중에 잠에서 깨어나 소리 없이 우는 사람 곁에/새근새근 잠들어 있”다고(「양 기르기」). 시인처럼 다양하고 뚜렷한 형상은 아닐지 몰라도, 누구든 초보 마법사의 패트로누스처럼 희끗한 빛 정도는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이 빛도 없는 것보다는 도움이 된다. 적어도 나는 너무 많은 슬픔으로 가득한 “이 숲을 완성하지 않으려고 애를” 쓸 작정이다.(「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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