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을 출근하지 않고 늦잠자며 오롯이 내것으로 할수 있다니! 대학교 졸업이후로 근 십년만에 느껴보는 자유로움이었다.
처음 일주일간은 정말 휴가를 즐기는 직장인 같이 보냈다. 자고 싶은 만큼 늦잠자고, 그동안 못 만났던 사람들을 만나고, 가보고 싶었던 전시회도 방문하고, 오랜만에 교보문고 가서 책도 사고, 낮술도 원없이 마시고... 그런데 무엇도 하지 않아도, 해낼 필요도 없는 하루 하루를 사는건 꿈같이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점점 머리가 복잡해져갔다.
결국 난 성격상 아무계획없이 삶을 사는 것을 못견디는 사람이었다. 백수생활에도 매일의 to do list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 전엔 항상 해야될 일들이 내앞에 이미 있었는데(심지어 많았는데!) 무엇을 할지 내가 매일을 계획하고 설계해야 하루가 제대로 굴러갈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 이 시간이 다시 없을 귀한 시간일것 같아 일분 일초도 허투루 허비하면 안될것 같았다. 그래서 그동안 못하고 미뤄놧던 것들을 하나 하나 클리어 하기 위해 일단위, 주단위의 계획을 짰다. 해야만 할것 같았다. 고장난 시계고치기나 식탁조명 고치기와 같이 사소하지만 귀찮아서 안했던 것들부터 못읽었던 책들 다 읽기, 운동하기, 글쓰기, 공연하기 등 마음에 담고 있었던 나름의 버킷리스트까지. 심지어 그 와중에 직장인으로서 업무의 감이 떨어질것이 우려되어(!) 시사영어사에 영어회화수업도 등록했다.
난 쉴때도 그냥이 아니라 '잘' 쉬어야만 했다. 사실 딱히 아무것도 하지않아도 오롯이 나를 충전하는 시간이 바로 '쉼'인것 같은데, 나는 그 시간조차 무언가로 어떻게든 채우려고 했다. 그냥, 그래야만 내 삶이 무가치하지 않다고 누군가에게 인정받기라도 하는것처럼...
결국 815집회발 코로나 2단계와 함께 생산적인(?)삶도 조금 멀어지게 됐다. 영어학원이 문을 닫고 운동도 못가게 됐다. (다행히 그 와중에 간발의 차로 아슬아슬하게 공연은 했다.)
그래서 어쩌다보니 산을 다니기 시작했다. 집에만 있으면 병이 나는 병이 있는(?) 밖순이라서 어떻게든 밖에 나가고 싶었나보다. 그런데 사실 어렸을때부터 본의아니게 '등산 친화적인' 아파트에 살았던 나는 등산을 정말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등산 친화적이라는 말은 곧 아파트가 거의 산중턱 또는 엄청난 오르막의 끝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그놈의 오르막길이 너무 싫었고 그래서 등산도 싫어했다. 이런 내가 내발로 등산을 하다니! 천지개벽할 일이다. 항상 우리집 바로 뒤는 등산로와 연결됐었다. 그리고 어쩌다보니 지금 사는 집 뒤도 바로 인왕산 등산로 입구가 있었다...
가족도 친구도 없이 혼자 산을 올라가본건 처음이었다. 뭐가 나올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이정표를 따라 한참을 올라가봤다. 중간중간 슬쩍 보이는 동네의 전경이 내가 얼마나 올라왔나를 가늠하게 해줬다. 그리고 마침내 기차바위 정상에 올라 내려다본 종로와 서대문구의 전경은 가슴이 뻥 뚫리다 못해 시린 느낌이었다.
이걸 보려고 내가 올라왔구나.
등산의 진짜 맛을 처음 봤다.
사실 무엇보다 등산하고 내려와서 마시는 시원한 생맥은 진짜 천국의 맛이다. 이것을 마시기 위해 그 후로도 친구들을 꼬시고 남편을 꼬셔 목적이 불순한 등산을 여러번 했더랬다.
그리고, 어느 정도 인왕산 지리가 눈에 익었을 때 쯤, 다시 취직이 됐다.
지금 나는 세번째 직장으로 출근한지 두 달 쯤 됐다. 새 회사는 어떤지 다들 물어보지만 아직은 섣불리 판단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회사를 판단할수 있는 만큼 회사도 나를 판단할 권리가 있으니까. 그저 처음 주어진 환경처럼 적응해나가는 중이다.
얼마 전 입사 10주년이었다. 정규직 취직(?) 10주년 이라 해야 하나. 공채로 들어간 나의 첫 회사는 입사할 때 신문 1면에 이름을 내줬다. 그래서 그런가 아직도 그 날짜가 머리에 박혀있다. 어쨌든 뭐 백수로 맞이하진 않아서 다행이다. 10년전에도 이제 나는 학생이 아니라 직장인이었다니, 새삼 세월을 가늠하게 한다.
어렸을 때 자주 하던 '나는 원래 이런사람이야' 라는 정의는 어리석은 것이었다. 이런 저런 조직과 경험과 사람을 거치며 그 조각 조각의 부분들이 결국 나를 만들어간다. 나는 아직도 낮술을 즐기고 아저씨들 장단을 잘 맞추는 아재문화에 익숙한 최인아지만, 케이팝과 트렌디한 문화(?)에도 눈을 떴다. 연말 가요시상식도 챙겨보고 몬스타엑스 신곡을 들으며 출근한다. 그리고 요즘 여기로 옮겨서는 안보던 유튜브 디지털 컨텐츠를 섭렵하고 있다. 모르던 세계를 하나씩 공부해가며 '나'라는 사람의 스펙트럼을 늘려가는 중이다. 내가 아마 첫 회사에 머물러 있었으면 절대 깨닫지 못했을 것들이다.
인생이 한편의 비디오 테이프여서 보고 싶은 장면은 언제든 돌려보기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러면 가끔 힘이 들 때마다 즐거웠던 백수 시절의 기억을 꺼내 돌려볼텐데. 언젠가 내가 하는 일에 너무 지칠때면 처음 시작 했던 반짝반짝 신입사원의 기억을 꺼내 돌려보면 좋을텐데 말이다.
하지만 인생은 언제나 재방도 없는 생방이라네.....
대관 형님의 옛 노래처럼...
인생은 생방송, 홀로 드라마 되돌릴 수 없는 이야기 태어난 그날 부터 즉석 연기로 세상을 줄타기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