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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a Mar 06. 2021

이태원 프리덤

나의 낮술 핫 플레이스

사실 나는 이태원과 그다지 어울리는 스타일의 사람은 아니다.

'이태원' 하면 생각나는 이미지는 뭔가 힙하고 외국물 먹은 애들이 모이는 동네, 라운지바나 클럽에 가서 모에샹동을 시키는 동네, 뭐 그런 이미지가 아닌가.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랬다. 해물 포차와 노가리 집을 사랑하는 소박한 아재 취향의 내가 그런 이태원에 마음의 고향같은 단골 가게들을 만들게 된 것은 2008년 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6호선의 어느 끝자락쯤에 있었다. 그래서 삼각지에서 6호선 봉화산 행을 갈아타고 올라가는 길은 항상 이태원 역을 지났다. 매일 안암골에 쳐박혀 근처 밥집과 맥주집을 전전하던 어느날, 친구와 나는 뻔한 그 참살이길이 지겨워졌다. 그래서 학교에서 집에가는 길에 있는 유일한 번화가인 이태원에 가보기로 했다.


돈없는 학생 신분으로 처음 디딘 이태원은 너무 비쌌다. 모든 가게가 기본 만오천원은 있어야 안주 하나라도 시킬수 있었다. 파스타도 한그릇에 5천원 하던 학교앞에 익숙했던 우리로서는 어마어마한 물가였다. 그렇지만 기왕 이런 힙한 동네에 온다고 칼을 빼들었으니 무 라도 썰어야지. 때 마침 역 근처 아웃백 스테이크 하우스에 '생맥주 무제한' 간판이 눈에 띄었다. 결국 이태원까지 가서 아웃백에 간 우리는 당시 9천원 하던 '오지치즈후라이즈' 하나에 생맥주 무제한을 시키고 첫 이태원 나들이를 자축했다...는 슬픈 전설이 있다.


이후로 이태원을 자주 가게 된 것은 친구들도 나도 취직을 하고 난 이십대 중반 부터다. 학교앞에 자취하던 친구 둘과 삼각지에서 갈아타는 나와 다른 한명의 친구, 우리 넷의 위치상 접접이 이태원이었다. 그리고 돈을 벌게된 우리들은 더 이상 이태원이 무섭진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이태원에서 힙하고 유명한 그런 곳을 찾아다녔던 것은 아니다. 이상하게 우리가 다니던 가게들은 뭔가 푸근함이 있었다. 한껏 예쁘게 치장한 젊은이들이 어두운 조명아래 모인 곳이 아닌, 따뜻하고 오래된 나무 인테리어와 외국 할배들이 반겨주는 동네 포차같은 펍이 우리의 주 무대였다. 가끔은 혼자 온 적적한 외국 할배들이 말을 걸어 즐겁게 실전 영어 회화를 했고, 가끔은 포켓볼도 쳤다. 다른 이태원 가게들이 한창 '핫 플레이스'로 뜨고, 사람들이 줄을 설 때에도 우리의 단골 가게들은 항상 동네 사랑방처럼 그 자리를 지켰다.


내가 이태원을 가장 좋아했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낮술이 가능하다는 점 이었다. 광화문에서 회사를 다녔던 시절, 근처가 출입처였던 친구와 날짜를 맞춰 반차를 내고 낮술 모임을 가끔 했는데 당시 회사생활 중 가장 큰 낙(?)이자 우리만의 '이태원 프리덤' 이었다. 이태원의 가게들은 대부분 점심 식사도 함께 파는 펍의 형태여서 낮부터 가도 언제든 생맥주와 안주들을 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외국인이 많은 특성상 낮에 술마시는 우리를 절대 이상하게 보지 않는다.(라고 나는 생각했다) 테라스 석에 앉아 햇살과 함께 여유를 즐기는 낮 맥주의 순간은, 내가 지금 회사에서 퇴근한 사람이 아니라 잠시 외국에 놀러온 여행객이 된 것 같은 느낌을 줬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해 떠있을 때 처음 마시는 맥주 한모금을 너무 사랑한다. 물론 숱한 낮술의 결과 깨달은 것들도 있다. 일단 낮술은 낮에 끝내야 된다. 낮술이 밤술로 이어지는 순간, 다음날은 지옥으로 변한다.


최근 코로나 사태로 인해 이태원 상권이 거의 다 죽어간다는 뉴스를 봤다. 이십대 중반부터 삼십대 초반까지 사회생활 초년병의 애환을 받아줬던 그 동네가 망해간다니 참 안타까운 소식이다. 결혼을 하고, 회사를 옮기고, 각자 삶에 바빠 우리의 '이태원 프리덤'도 뜸해지며, 그곳에 가본지가 꽤 오래됐다. 낮이나 밤이나 우리를 맞아주던 그 푸근한 가게들이 아직까지 잘 있기를, 올해 까지 잘 버텨내기를 바라며 단골집 몇개를 소개하고자 한다.


1. 팻 알버트 (Fat Albert)

십년쯤 전에 이 집의 이름은 'Three Alley's Pub었다. 한국말로 번역하면 '삼거리 포차' 정도.(얼마나 푸근한가!) 이름이 바뀌었지만 내부의 인테리어나 분위기는 바뀐 것이 없다. 여전히 이태원에서 가장 편하고, 혼자가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1순위 단골집이다. 외국 할아버지들이 고향이 그리워서 찾는 사랑방 같은곳이라 언제나 혼자 온 외국 할배들이 있다. 가끔 적적하면 말을 걸기도 하고 포켓볼을 함께 치게 되기도 한다. 그러고보니 항상 여길 간 날은 누군가와라도 이야기를 하게 됐던 것 같다. 혼자가도 절대 심심하지 않은 집.


2. 게코스 테라스 (Gecko's Terrace)

이태원역 3번출구 바로 앞 기업은행 건물 2층에 자리한 이 펍도 오래된 펍이다. 여기는 2층이라 테라스 자리가 있는데, 이태원 사거리의 경치가 한눈에 보여 아주 술맛이 좋다. 그리고 맥주 외에도 다양한 양주들을 샷으로 팔아 정신 못차리고 마시다가 기억을 잃은적도 꽤 있는 것 같다. 또, 이 집은 안주가 정말 맛있는데, 특히 갈릭크림파스타는 내 '최애'다. 사실 맥주보다도 이 파스타가 먹고싶어서 여길 갔던적도 많다. 맥주는 거들뿐...


3. 베이비 기네스 (Baby Guiness)

정통 아이리시 펍으로, 한창 영국 교환학생을 끝내고 돌아왔을때 추억을 되새기고 싶어서 많이 갔다. 겨울에 가면 뜨거운 와인인 글뤼바인(또는 뱅쇼)을 파는데, 브랜디를 넣어 아주 맛이 진하고 도수도 쎄다. 멋모르고 낮에 마셨다가 부모도 못알아보는 사태가 일어날수도 있다. 이름에 기네스가 붙은 만큼 기네스 생맥이 아주 맛있다. (그러나 비쌈...)


4. 울프 하운드 (Wolf hound)

해밀턴 호텔 건너편 작은 골목에 있는 이곳도 꽤나 오래된 동네 펍이다. 가끔 해밀턴호텔 뒤쪽 메인거리가 지겨워 지면 길 건너 편인 이 골목을 갔다. 그래봐야 가게 분위기는 거기서 거기지만 말이다. 여기는 '아이리시 카밤'과 '커리 부어스트'로 기억한다. '아이리시 카밤'은 기네스 맥주에 베일리스와 제임슨 위스키를 넣어 한번에 원샷하는 아주 무서운(!) 영국식 폭탄주다. 그렇지만 맛은 너무나도 달콤해서 이걸 몇 잔 먹고 친구와 함께 꽐라의 밤을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여기는 독일에서 유명한 요리인 '커리 부어스트'를 파는데, 맥주 안주로 아주 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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