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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원석 Mar 26. 2020

2. 국가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그래픽디자인(2)

(2) 내국인을 위한 디자인

(2) 내국인을 위한 디자인

자국민인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그래픽디자인을 보면 외국인에게 보이고자 했던 이미지와는 대조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노력이 일관되게 나타난다.

<그림 33> 칠성사이다 광고, 산업디자인포장개발원장상II, 목진요 주명한 공동작, 1993. <그림 34> 해태 광고, 상공부장관상, 권기덕 작, 1983.
<그림 35> 공익광고, 1986.  <그림 36> 쌍용 기업이미지, 1984.


<그림 33-36>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한국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그래픽디자인에서는 전반적으로 소박하고, 근대적이며, 소시민적 삶의 면모를 부각시키는 오브제와 민족 내면에 흐르는 감성을 표출하는 이미지들이 주를 이룬다. 색감에 있어서도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한국 이미지는 화려하고 채도가 높았으나 내국인을 위한 디자인에서는 전반적으로 흰 바탕에 낮은 채도를 활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어쩌면, 이러한 이미지가 꾸밈없이 당대의 대한민국 자신을 바라보는 솔직하고 담백한 모습일 것이다. 서로가 알고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굳이 고대의 유물을 끌어올 필요성은 없기에 현재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잔잔하게 표현하고자 한 흔적이 드러난다.


물론 고대 유물이 여전히 활용되는 영역도 있었다. 특히 기업에서 과학이나 기술의 진보를 나타내기 위해, 혹은 자국민의 자부심을 드높이기 위해 자주 사용된 것이다. 80년대에 선진국과 비교해서 짧은 현대 과학기술 역사와 시작 단계에 불과한 R&D의 성과를 극복하고 진보적인 기술 발전에 대한 위상을 표현하기에 훈민정음, 측우기, 첨성대, 거북선 같은 유물은 매우 자주 사용되는 소재였다.


<그림37 > 선경 기업 이미지 광고 시리즈, 1985.
<그림 38> 스텔라 광고, 1984.  <그림 39> IBM 광고, 1986.

지금까지 관찰한 바와 같이 대조적 소재를 보면 한국적 디자인은 다소 복잡한 자세를 취해왔음을 알 수 있다. 한 편으로 외국인에게 보여주기 위해 고대 귀족적인 모습이나 신비롭고 나약한 오리엔탈리즘적인 이미지를 어필하는 반면, 다른 한 편으로는 자민족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투영할 때 근대적이고 소탈한 서민의 모습으로 친근한 감성 디자인을 표현하기도 하고, 대표적 유물을 통해 자부심을 북돋는 소재로 활용하기도 했다. 이는 한국적 이미지에 대한 고민이 주를 이루던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초반까지의 시기에 자아 정체성에 대한 확립을 이루기에는 굴곡진 근대사로 인한 문화적 정체성 단절의 골이 매우 컸기 때문이다.


동시에 현대적인 이미지로 정체성을 표현하려고 해도, 당시로서는 자신 있게 드러낼만한 변변한 문화적, 문명적 요소가 없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유로 당시 디자이너들의 한국적 디자인에 대한 정체성 표현이 현재와 동떨어진 과거의 파편들로 복원해낸 산물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지만, 이를 극복할만한 적절한 대안을 제시하기도 쉽지 않았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80년대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고도의 발전을 이룩한 90년대와 2000년대까지도 이어졌다. 외국 손님을 초대하기 위한 '한국 방문의 해'나 'G20 정상회담'등을 대표하는 디자인에서도 색동저고리, 청사초롱, 민화에서 나오는 패턴이나 그림, 고대 유물, 심지어 민속 수공예품과 같이 80년대 디자인과 다를 바 없는 과거 민족적 요소의 그래픽이 여전히 메인 이미지로 등장한다. 이는 충분히 자신을 표현할 만한 발전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뿌리 깊게 각인된 자아정체성을 극복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음을 보여준다. 과연 관광객들은 수백 년 전 조선을 보기 위해 오는 것일까, 현대 한국을 경험하기 위해 오는 것일까.


<그림 40> 94 한국 방문의 해 마스코트, 1994.  <그림 41> 2001 한국 방문의 해 엠블렘, 1999.


<그림 42> G20 Seou Summit 2010 엠블렘, 2010.  <그림 43> 2010 한국 방문의 해 스템프 디자인, 2010.




세계 디자인 역사에서 새로운 디자인 양식이 등장하고 보편화되어갈 때, 이에 반발하여 과거의 양식으로 회기 하고자 하는 역사주의는 늘 있어왔다. 특히 모더니즘 아방가르드와 역사주의와의 대립은 민속, 서민, 공예 전통 등에서 민족적 정체성을 규명하려는 부류를 통해 뚜렷한 긴장구도를 이루어왔다. 이는 세계 디자인사의 중심으로 일컬어지는 영국, 독일, 프랑스뿐 아니라 스칸디나비아, 동유럽도 다르지 않다. 물론, 모더니즘의 입장에서 평가하고자 하는 역사가는 이러한 역사주의를 퇴행적인 시도로 보겠지만, 그것은 디자인 사조가 끊임없이 발전한다는 진보적 사관의 편협한 시각일 뿐이다. 만약 세계의 디자인이 이처럼 하나의 방향성을 가지고 발전해나간다면, 동시대에는 하나의 디자인 사조 밖에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다양한 디자인 스타일과 철학이 서로 경쟁하며 공존하고 있다. 심지어 과거로 회기 하고자 하는 역사주의적 양식 역시 레트로 스타일, 복고풍 혹은 엔틱 스타일로 불리며 여전히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 챕터인 "2. 국가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그래픽디자인"은 모더니즘 시대에 수공예 전통으로 회기 하려 한다거나 역사주의 양식에 머물러있다고 당시 디자인을 비판하려 한 것이 아니다. 다만 '한국적 디자인'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던 1세대 디자이너들의 고민과 당시 상황을 분석해보고, 2020년대를 살아가는 현재의 디자이너로서 현재의 대한민국을 표현하기 위한 적절한 방향성은 무엇인지에 대한 화두를 던지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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