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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원석 Mar 02. 2020

2. 국가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그래픽디자인(1)

(1) 외국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디자인

2. 국가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그래픽디자인


디자인은 그것을 개발하고 사용하는 집단의 문화를 대변한다. 현대 디자인의 근간을 이루어 세계 디자인의 흐름을 주도해오고 있는 철학인 모더니즘은 루이스 설리반의 명언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로서 디자인의 객관성을 원칙으로 삼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를 살아가는 당대(當代)에서는 그 명제가 유일한 진리가 아님을 보여주었다. 디자인은 역사와 정서에 나타나는 감성과 기호, 그리고 디자이너 특유의 철학이 담겨 시각화되기 때문에 문화적인 공백 속에서는 결코 탄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유로 굴곡진 근대사를 거친 후 맥락 없이 현대 디자인을 맞이한 대한민국은 디자인적 정체성으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제 강점기를 통해 언어와 전통문화를 말살당하고, 한국전쟁으로 인해 물질문명이 파괴되었으며 정신적 피폐화를 겪게 된 후, 또다시 독재정권하의 통제와 정치선전에 의해 자생적인 문화 발전을 이룰 기회를 잃게 되었다. 이처럼 빈약한 문화 속에서 디자인적 정체성을 찾아내는 것은 대한민국 현대 디자인에서 끊임없이 이어져 온 아젠다였다. 본격적으로 현대 디자인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1980년대부터 90년대 초까지 대한민국 디자이너들이 찾으려 했던 한국 디자인의 정체성은 외부인에 대한 자신의 모습과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의 차이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1) 외국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디자인

한국의 1세대 디자이너들이 정체성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외국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목적으로 한국의 현대 디자인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 뿌리는 일제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침략국인 일본인들이 피 지배국인 한국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자신을 해석하고 디자인에 적용하던 뿌리가 굳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습관은 미군정 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져서 한국 민속 상품이나 관광포스터 등 한국을 표현할 때 연약하고, 여성적이며, 전근대적인 모습으로 표현되는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이 드러나게 되었다.


때문에 본격적인 현대 디자인이 발현되었던 80년대에도 한국 디자인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별다른 변화 없이 한복을 입은 여성, 춤을 추거나 놀이를 즐기는 서민, 심지어는 무녀의 모습을 한국적 정체성으로 표현하는 그래픽으로 대부분을 채웠다. 더군다나 86 아시안게임과 88 올림픽을 통해 세계인 앞에서 한국의 이미지를 각인시켜야 하는 상황을 갑작스레 맞이했던 한국은 디자인과 철학에 대해 깊이 고민할 겨를 없이 무비판적으로 과거 방식을 이어갔다는 것이 당시 여러 작품에서 확인된다.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으로 한국의 정체성을 표현했던 현대 그래픽디자인 작품들이 대부분 외국인을 위한 디자인 결과물이었다는 것은 디자인 속 텍스트가 거의 영어로 되어있음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림 19-23>은 1980년대 월간《디자인》에 개제 된 작품으로서 영어 텍스트, 한복을 입은 여인, 춤을 추는 서민이라는 전형적인 특징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그림 19> 올림픽기념 민속무용 축제 포스터, 김영기 작, 제20회 산업디자인전 특선, 제1회 국제 포스터 살롱전  우수포스터, 1985.
<그림 20> 올림픽기념민속무용 축제 포스터, 1985.  <그림 21> 올림픽 문화 포스터, 포스터살롱전 입선, 김현 작, 1988.
<그림 22> 마스터카드 해외 광고, 경석주 작, 1989.  <그림 23> 김교만 작, 1988.


이러한 특징은 당시 대한민국디자인전람회 수상작에서도 동일하게 드러난다. <그림 24-27>에서 보는 것처럼 1984년과 1988년 대한민국디자인전람회 수상작들은 월간《디자인》의 <그림 19-23>과 소재면에서 완전히 동일함 알 수 있다. 한복을 입은 여성이 부채춤 혹은 탈춤을 추고, 남자는 항상 상모를 돌리고 있다. 이와 같이 정형화된 소재는 한국을 표현할 이미지가 춤추는 조선시대 백성뿐인가 하는 질문 남긴다.


<그림 24> 한국 민속춤 축제, 조기정 작, 한국방송공사사장상, 1984.
<그림 25> 신세계광고, 김상천 작, 대한상공회의소장상, 1993.  <그림 26> 한국의 이미지, 1984.
<그림 27> 올림픽 민속춤, 박용 작, 산업디자인포장개발원이사장상, 1988.

외국인에게 소개하기 위한 한국적 이미지 속의 또 다른 특징으로는 그 소재가 주로 왕관, 왕족이나 양반들의 의복 같은 상류계층의 유물 혹은 문화재들이라는 점이다. <그림 28-32>


<그림 28> 해외용 화장품 포스터, 1980.
<그림 29> 올림픽 문화예술 축제, 1987.
<그림 30> 해외용 패션 광고, 1981.
<그림 31> 아시안게임 문화 포스터, 1986.

이와 같은 그래픽에서 등장하는 주요 소재들은 고급스러우며 과거에 화려했던 문명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 이미지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외국인을 대상으로 제작된 한국을 대표하는 이미지는 여성적이고 현대화가 이뤄지지 않은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의 이미지이거나 과거의 화려했던 문화유산을 보여주는 상류층을 위한 오브제들이 대다수를 차지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두 자세는 매우 상충되는 자아 정체성인데 어떻게 양립할 수 있을까? 이는 외국인 앞에서 느끼는(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서양인에게서 느끼는) 컴플렉스의 발로일 것이다. 세계화(Globalization)라는 용어의 시작과 영향은 학자마다, 그리고 분야마다 다르겠지만, 한국에 있어서는 세계인의 이목이 집중될 행사인 86 아시안게임과 88 올림픽을 앞둔 1980년대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한국은 세계인에게 당당히 자랑할만한 유형적 사회 인프라나 무형적 문화 요소가 빈약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때문에 비록 현재 대한민국의 모습은 아니지만, 민족적 유산을 통해 정체성을 표현하려 했던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세계인에게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디자인에 정작 현대 대한민국의 모습은 사라지고, 과거의 민족적 정서가 담긴 유물이나 풍습으로 가득 차게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하게 되었다. 아시안게임 문화 포스터와 서울 올림픽 대회 기념 문화 포스터는 이러한 당시 디자인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림 31, 32 >

<그림 32> 서울 올림픽 대회 기념 문화 포스터,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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