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아의 시작, 올드 미션이야기
오늘 날 살아있는 캘리포니아 역사를 이야기할 때, 미션의 설립을 빼놓을 수 없는데 캘리포니아의 역사는 미션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다고도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션은 미국이라는 곳에서 원주민들과의 화합과 카톨릭의 포교를 위해 개척지에서의 난관을 헤치고 성장한 가톨릭 교회 프란체스코회 신부들의 낯선 땅에서의 헌신의 시간, 인디언 원주민의 삶의 터전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고난과 투쟁의 시작이 함께 있기 때문이다.
수 천년 전부터 현재의 캘리포니아 지역에는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는데, 멕시코가 스페인의 식민지 지배를 받을 당시, 1542년 스페인 탐험가 후안 로드리게즈 까브리요(Juan Rodriguez Cabrillo)가 스페인 왕명으로 배를 타고 지금의 샌디에고에 처음 상륙하여 샌미구엘 (San Miguel)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스페인 사람들은 새로운 땅을 발견하면, 그 날이나 그 날짜와 가까운 때에 태어난 성인의 이름을 따서 지명을 붙였다. 그로부터 60년 후 1602년에 스페인의 탐험가 세바스챤 비스카이노(Sebastian Viscaino)가 탐험선을 이끌고 샌디에고 만으로 상륙해서는 샌디에고(San Diego)라고 지명을 붙였는데, 이 역시 그 날짜에 가까이에 태어난 성인, 디에고였다.
스페인은 새로운 땅을 발견해서 스페인 영토임을 선언했으나, 220여 년간 방치하다가 1768년 러시아 사람들이 캘리포니아 연안에서 물개잡이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금 이곳에 확고한 자국의 영토임을 입증하려 했다.
당시 스페인의 왕이었던 카를로스 3세는 뉴스페인(현 멕시코)에 명령하여 캘리포니아에 원정대를 보내고 스페인의 주권을 확립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캘리포니아는 현재의 미국 캘리포니아와 멕시코의 바하캘리포니아를 다 지칭하는 지명이었으므로 멕시코 지역에 반도를 이루는 부분은 바하 캘리포니아(Baja California) 현 미국의 캘리포니아는 알타 캘리포니아(Alta or Upper California)라고 했다.
스페인 제국은 알타 캘리포니아를 점령하기 위해 세가지 정착 방법을 사용하였다. 가톨릭 포교로의 '미션'과 군사기지를 뜻하는 '프레시디오', 마을을 뜻하는 '푸에블로' 이렇게 정착하는 방식과 구성원은 방법이 달랐지만 캘리포니아 식민지화라는 최종목표는 같았기에 일반적으로 캘리포니아의 넓은 땅을 두고 시작된 미션 설립은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이미 바하캘리포니아에 선교의 임무를 부여받은 상태였으므로, 알타 캘리포니아에도 같이 미션을 세우고 선교를 할 것을 명하여 캘리포니아의 미션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프란치스코회 후니페로 세라(Junipero Serra) 신부가 미션 설립과 선교의 수장을 맡고, 선교팀을 보호할 군인들을 동행시키는데 군대의 책임자는 가스파르 드 포르톨라(Gaspar de Portola)였다.
이들은 다섯 팀으로 나뉘어 샌디에고를 향하여 1769년 뉴스페인(현 멕시코)을 출발을 하는데, 세 팀은 배로 출발을 한다.
1월에는 첫번째 배인 샌 카를로스(San Carlos)호가, 2월에는 샌 안토니오(San Antonio)호가 출발하여 각각 4월에 샌디에고 만에 도착하는데 첫번째로 출항을 한 샌 카를로스호에는 선원들이 괴혈병이 돌아 거의 죽고 두사람만 남았다하고 보급품을 실은 세번째 배인 산 호세(San Jose)호는 항해도중에 실종되었다 한다.
그리고 나머지 두 팀은 산맥을 넘어 육지로 이동을 했는데 나귀와 말에 식량과 농기구, 곡식의 씨앗 등을 싣고 왔지만 역시 많은 사상자가 생겼다고 한다.
세라신부는 육지팀으로 마지막인 다섯번째 팀에서 출발하여 1769년 6월 29일에 샌디에고에 도착하는데, 이때 세라신부의 나이는 56세, 키는 5피트 2인치(약 160cm), 몸무게가 120파운드(54.5kg)였다고 하며, 다리에는 만성 염증이 있어서 절뚝거리며 걸었다고 한다.
도착 후, 세라신부가 작성한 1769년 7월 3일자의 편지에는 뉴스페인에서 219명이 출발했지만, 도착한 때는 그 반이 조금 넘은 인원으로 사상자가 많았음을 적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라 신부와 그의 일행들은 샌디에고 만이 보이는 지점에 1769년 7월 16일 미션 설립을 시작한다.
미션을 찾아가는 길에는 101번이나 5번 등 프리웨이 뿐만 아니라 주로 해안도로 곳곳에서 '엘 까미노 레알/El Camino Real' 이라는 팻말을 붙이고 서 있는 종을 볼 수 있다. 이 종들은 1683년부터 1834년까지 당시 멕시코와 캘리포니아 일대를 다스렸던 스페인의 종교적 전초기지로 세웠던 미션(Mission)과 요새(Presidios), 원주민 부락들(Pueblos)을 연결하였던 '왕의 도로'를 표식하는 것이다.
샌디에고부터 샌프란시스코까지의 21개 미션들은 총 600마일(miles)/965km의 거리로 미션은 곳곳에 대략 30마일(48km)의 거리를 두고 세워졌다고 하는데 이 거리는 미션에서 미션으로 말을 타고 하루를 달릴 수 있는 거리, 도보로는 3일이 걸리는 거리를 계산한 것이라고 한다.
미션을 따라 주위에 군사전초기지가 세워지고, 그들의 목표인 전도를 통한 식민지화가 된다면 많은 여행객들이 생길것을 대비해 도로의 표식을 그들이 지나온 흔적을 따라 겨자씨를 뿌려 밝은 노란색 꽃으로 표시했다. 그때 노란꽃들로 만발했던 이 길이 현재는 캘리포니아의 남북을 가르는 프리웨이 중 하나인 101 프리웨이가 되었다. 그리고 1906년 프리웨이에는 450개의 종들이 들어섰다. 101번 프리웨이는 원래의 '엘 까미노 레알'을 따라서 건설하였다는데, 1902년 ‘LA 여성 클럽’이 원래의 '왕의 길'에 표시를 하자는 의견이 제시되고, 1906년 '엘 까미노 레알 협회'가 설립되어진 그 해에 '프란시스코의 지팡이'로 명명된 양치기용 지팡이에 종을 달아 1마일마다 세우기로 하여 450개가 되었다. 한때는 도둑들의 손을 타 그 수가 매우 줄었지만, 지금은 밑받침을 잘 세워 도난은 줄었다고 한다.
종의 제작사는 '캘리포니아 벨 컴퍼니'이다.
캘리포니아는 지역에 따라 우기가 시작되는 12월부터 새순이 돋으면서 겨자꽃이 피기 시작한다. 처음에 유채꽃이 피었다고 아는 척을 했으나, 유채꽃이 아니라 같은 종인 겨자꽃이라는 걸 미션을 다니며 확실히 알게 되었다.
첫 번째로 지어진 미션은 1769년에 샌 디에고에 설립한 샌 디에고 드 알칼라(San Diego de Alcala)이고, 마지막 미션은 샌프란시스코에서 한 시간 정도 북쪽에 있는 소노마(Sonoma) 라는 지역의 미션 샌프란시스코 솔라노(San Francisco Solano) 이다.
21개의 미션은 캘리포니아의 제일 남쪽에 위치한 샌디에고에서 북쪽으로 차츰 올라가면서 지어진 것이 아니고, 첫 미션 설립 후 일년 후인 몬트레이만에 두번째로 샌 까를로스 보로메오 델 리오 카멜로(San Carlos Borromeo del Rio Carmelo) 미션을 설립했다.
내가 처음 방문한 미션은 산타 바바라 미션이었고, 당시에는 몰랐던 101 프리웨이의 종이 너무 궁금했다. 그후 미션을 방문하면서 21개의 미션을 다 돌았다.
미주 중앙일보의 J 블로그에서는 방문 순서대로 글을 올렸으나, 미션 여행을 다 마친 지금 다시 쓰는 미션 여행기는 샌디에고의 첫 미션을 따라 설립 순서대로 차례를 정했다.
캘리포니아의 프란시스코회 미션 엘 까미노 레알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