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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포니아 올드 미션 1st - 샌 디에고 알칼라

미 서부 최초의 교회

by SUMMER


하얀 건물의 종탑이 있는 외곽은 내가 생각하는 오늘날의 성당의 모습이나 유럽의 웅장하고 화려한 외관과는 사뭇 다르다.

단순하면서도 소박하게 보이는 미션은 그 당시 1760년 후반, 아무것도 없는 아메리카 원주민이 살던 곳에 어도비형 건물로 건립당시 스페인에서 제대를 가져오고 종은 멕시코에서 만들어 와 미션을 채워 포교의 꿈을 가졌던 원대한 소망과 함께 위대한 첫삽으로 시작되었을 것이다.


미션 바실리카 샌디에고( Mission Basilica San Diego de Alcala)는 캘리포니아 21개의 미션 중 첫번째로 설립되었으며, 선교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성 후니페로 세라(Junipero Serra)신부에 의해 설립된 이 미션은 미국 서부에서의 최초의 교회로 1769년 7월 16일 설립되었다. ( *2015년 프란치스코 교황은 후니페로 세라 신부를 성인으로 선포하였다.)


현재는 가톨릭 샌디에고 교구의 소교구성당으로 되어 있고 1976년 교황 바오로 6세는 이 성당을 Basilica로 지정했다. 바실리카(Basilica)는 역사적으로 중요하다고 인정이 되는 성당을 교황이 지정하는데, 캘리포니아의 21곳 미션중에는 바실리카로 지정된 곳이 4곳으로 San Francisco de Asis(샌프란시스코 미션), San Carlos Borromeo de Camelo(카멜 미션), San Diego de Alcala(샌디에고 미션), San Juan Capistrano(샌후안 카피스트라노 미션)이다.





미션 제대상



묵상 정원에서 볼 수 있는 미션의 종각. 스페인 건축에서는 종각벽을 성당벽에 이어서 만들고 종을 매달아 종각을 대신한다. 5개의 종이 울리는 날은 1년에 한번 미션 설립날이다.




샌디에고 미션 (Mission San Diego de Alcala) 의 이름은 디에고 성인에서 가져온 이름이다.


- 성 디에고(San Diego)는 1400년에 스페인에서 태어났다. 가난했지만 신앙심이 좋았던 가정에서 자란 디에고(Diego 또는 Didacus)는 수행하는 성직자에게서 교육을 받게 되었고,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들어가 수사가 되었다.

그후 디에고 수사는 스페인령인 카나리아군도의 섬에 가서 그곳 원주민들을 가르치고 선교하였다.

1450년에는 로마교황청에서 열리는 시성식에 알론소 드 까스트로(Alonso de Castro)신부와 같이 가게되었다.

로마에 몇 달동안 머물게 되었는데, 그 동안에 아라 까엘리 (Ara Caeli) 수도원 병원에서 병든 수사들을 간호하도록 지시받았고, 그가 간호했던 몇몇 사람이 신기하게 병이 낳았다.

그는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왔고, 알칼라( Alcala)타운에서 13년을 살다가 병을 얻어 1463년11월12일 선종했다.

스페인왕 필립2세는 성인품에 올려줄 것을 교황청에 간청하였고, 여러번의 기적이 그로 인해 일어났다고 인정되어, 1588년 시성되었다. -


미션 건립의 수장을 맡은 프란시스코회 신부인 세라신부와 그 일행은 1769년 6월 29일에 샌디에고에 도착하는데, 이때 세라신부의 나이는 56세, 키는 5피트 2인치(약160cm), 몸무게가 120파운드(54.5kg)였다고 하며, 다리에는 만성 염증이 있어서 절뚝거리며 걸었다고 한다.

도착 후, 세라신부가 작성한 1769년 7월 3일자의 편지에는 뉴스페인에서 219명이 출발했지만, 도착한 때는 그 반이 조금 넘은 인원으로 사상자가 많았음을 적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라 신부와 그의 일행들은 샌디에고 만이 보이는 지점에 1769년 7월 16일 미션설립을 시작한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의 미션은 물부족으로 인하여 농사에 부적합한 땅임을 알고 5년 뒤에 샌디에고 강 가까운 자리로 이동을 한다.








아래의 사진은 세라 신부의 방이다. 세라 신부는 캘리포니아 미션 설립과 선교의 총 책임자였으므로 한곳에 머물지 않았다. 다른 곳에의 미션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사용했던 방으로 침대와 책상이 있다. 옹이가 박힌 나무들이 기둥이 되고 천정을 연결하고 있다. 사다리가 보이는데 그의 일이 많았던 것을 짐작케 한다.


미션 주위의 땅은 경작하기에 척박하고 물도 부족하여 어려움이 많았으나 5마일 떨어진 곳에 댐을 건설하고 수로를 만들어 물을 끌어들였다. 그리하여 미션 설립 후, 20여년 뒤인 1797년은 원주민 565명이 세례를 받았고, 5만 에이커의 땅에서 옥수수. 보리, 콩, 밀 등의 수확과 포도밭에서는 포도주를 만들기에 충분한 포도까지 수확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선교회팀의 도착 당시를 비교하면 상당한 변화였다.

원주민들은 가축과 더불어 농사짓는 방식도 알게 되었으며, 식생활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콜럼버스가 발견한 신대륙이 인도인줄 착각하고 인디언이라 불리게 된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겐 문명과 바꾼 참담한 역사의 시작이었다.


1800년에는 미션과 더불어 생활하는 원주민들이 1,500명 정도였다고 하는데, 1803년 지진 피해를 겪은 후 건물을 증축하는데 1813년에는 현재 규모와 모습인 건물로 완성되었다.

세라 신부는 캘리포니아의 여러 미션을 순회하면서 선교를 지도하는데 샌디에고 미션은 세라신부의 후임으로 루이스 하이메(Luis Jayme) 신부가 책임을 맡고 운영해 나갔지만, 미션에 사는 두 원주민이 미션내에서의 생활 규칙에 불만을 품고 멀리 사는 원주민 수백명을 불러 들여 폭동을 일으켜 하이메신부를 살해하고 만다. 스페인 선교사가 들어온지 6년 만에 벌어진 일이다.

하이메신부는 캘리포니아에서 처음 순교한 사제로 샌디에고 미션의 성당 제대 아래에 모셔져 있다. 하이메 신부는 미션내의 여러 원주민들과 사이가 좋았지만 이런 안타까운 일이 생겼다. 미션에는 하이메 신부의 추모기념비가 있는데 미션에서 생활했던 원주민들의 후손들이 1924년 9월 9일 살해당한 지점에 세웠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



미션 설립 초기 당시의 종



박물관안에 있는 원주민들의 생활 도구들.



1821년 멕시코가 스페인으로 부터 독립하고 나서 미션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았던 그들은 1833년 세속화법을 만들어 미션의 관리권을 프란치스코회로 부터 빼앗아 산티아고 아구에요(Santiago Arguello)에게 주어버리자 미션에서 생활하던 원주민들은 미션에서 나와 흩어졌다.

1847년 이 지역이 미국영토로 바뀌고 1853년 11월 부터 미군대가 주둔하면서 성당의 일부 건물들이 개조되었지만, 몇 년간은 방치되어 있다가 1892년 성요셉수녀회가 이전하여 원주민 어린이를 위한 학교로 사용하기 시작하여 17년간 운영되었다.

1931년 미션은 1813년의 성당 모습으로 재건되었고 가톨릭 교구내 소교구로 운영하게 되어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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