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산책
멈췄던 산책을 다시 시작했다. 처음에는 달리기라고 말하려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이 달리기인가?라는 질문에서 걸림을 느꼈다. 페이스가 11 아래로 내려가지 못하는 달리기, 잠시간의 뜀발질에도 헐떡이며 부대낌을 느끼는 이 것이 아직은 달리기가 아니니 산책이라 결정했다. 잠깐 달렸다가 이틀정도를 시큰거리는 발목과 발바닥에 절뚝였다. 거의 1년, 걷지 않고 내내 앉아 지낸 자의 최후다. 이동할 때도 거의 차를 이용해서 그야말로 앉아서만 지낸 시간이었다. 계절이 바뀌고 시간은 흘렀으니, 몸은 그대로가 아니었다. 앉아만 있는 동안 흘러간 시간을 체득하지 못한 것은 정말 내 몸이 그것을 느낄 새가 없었기 때문이다. 쓰지 않는 몸은 퇴화 그러니까 노화했고, 나는 1년 전 멈춰있던 내 몸에 대한 기억대로 시간과 시간을 가로질러 몸을 썼다. 제법 달리기를 좋아하던 그때처럼 다리를 굴렸더니,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두 다리는 바로 주저앉고 말았다.
물론 1년 전 그때 그 뜀박질이 달리기였을까? 오늘도 내 옆을 스쳐간 러닝크루들과 수많은 러너들을 보면 의문이 생기지만, 전력질주는 아니었어도 나만의 페이스, 내 몸의 기준에서 분명 걷기와는 다른 달리기였다. 다시 밖에서 눈으로 풍경을 담으며 몸을 움직이다 보니, 그리고 무리한 달리기로 이어진 통증에 끙끙대다 보니 그 달리기를 시도하기 전 매일 동네와 집 앞 천변을 산책하던 기억이 몰려왔다. 달리기에 앞서 일 년 가까이 거의 매일 산책하고 걸었다. 한걸음 한걸음 꼭꼭 땅을 밟아가며 실은 달릴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도 5분, 10분 조금씩 달리는 시간을 늘려 겨우 달리는 시늉정도를 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들었다. 달렸다는 기억에 멈춰있던 뇌가, 마침내 그 과정까지 기억해 내는 데 성공했다. 폐잔병이 되고 나서야 말이다.
다행히 삼일째가 되니 발바닥도 발목도 좀 나아졌다. 단계에 도달하기 위해 다시 과정을 거쳐야 하겠지만, 기꺼이 조급 함 없이 다시 걸을 마음이 들었다. 몸을 움직여야 머리도 구른다. 적어도 나는 그러하다. 내 몸이 움직이는 속도만큼만 눈으로 담을 수 있고, 가까이 오래 보아야 새겨진다. 그때 흘러가는 시간 말고 진정한 나의 시간이 다시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