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지암 화담숲
“나, 휴직할 거야.”
슬쩍 흘리던 그의 언질이 실제가 되었다. 처음 말을 꺼냈을 때 어쩐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 그렇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허투루 말하지 않는 사람이다. 실없는 말은 하지 않는이니까. 아이 둘이 한창 자라고 있고, 이런저런 고정비용이 나가며, 그 혼자 수입을 책임지는 외벌이 가정이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그래, 사람이 살아야지.’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이미 오래전에 나가떨어진 회사 생활을, 묵묵히 10년 이상 계속해온 것만으로도 그 사람이 기특하고, 어쩌면 부담스러울 수 있을 무턱대고 그 사람을 믿는 마음이 괜찮다고 해주었다.
“네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해야지.”물론 구구절절 그의 사정은 있다. 하지만 나에게 이 문제는 내가 허락하고 말고의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의 일방적인 통보를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다. 그냥 알 것 같았다. 일을 하는 사람이 일을 쉬겠다는 선언. 그나마 퇴직이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더 이상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이런 결정도, 저런 결정도 당신이 깊이 생각하고 내린 것이라 무엇이든 괜찮다는 마음이었다.
휴직을 기정사실화 하고 나서부터 무엇을 할 것이라 재잘거릴 때, 어쩐지 그 사람이 좀 신나 보였다. 나한테 그만 좀 말하라고 했다가, 금세 마음을 가다듬었다. 20년도 넘게 그이를 안 시간 동안, 이미 반평생을 함께한 그가 이렇게 미주알고주알 무엇을 하겠다고, 계획을 들떠서 말한 적이 있던가?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긍정하고 듣는 것이라면, 그의 계획을 들어주는 것이 지금 내 역할이다.
휴직 기간 동안 그가 하고 싶은 것들을 들으며, 별것도 아닌 것들인데 이렇게 올스톱이 필요한가 라는 생각이 슬며시 들었다. 휴직기간, 혹은 회사 생활을 하면서도 이것저것 개인적인 성취를 하는 이들이 떠올랐다. 무엇인가 해야만 가치 있는 시간이라는 생각이 잠시 나를 또 사로잡았다. 다행인 건 이 말을 내뱉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오랜 시간 일해왔고, 앞으로도 일과 떨어져 살 수 없을 우리들은 잠시의 쉼표도 용납하지 못 한 채, 불안감에 떨고 만다. 목까지 차오른 말에 내 입술이 달싹였지만, 다행히 삼켰다. 내가 말을 더하지 않아도, 가장 많은 생각을 할 사람은 그 자신일 테니까.
글과 그림을 움켜쥐고 무엇인가를 해보겠다고, 다음 꿈이랍시고 실속 없이 아등바등하는 나를 늘 지지하는 그에게, 나는 그러면 안 되는 것 아닌가라는 죄책감이 고개를 내민다. 하지만 쓰라린 것은 나는 여전히 당장 그의 결심에 아무런, 실직적 도움이 되지 못하고, 경제적인 부분에서도 별 대책이 없다는 것이다. 내가 그 대신 가장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 서글프지만 시간을 갈아 넣는 소소한 알바들을 더 늘이고, 불안감을 달랬다. 그러면서도 결국 괜찮다는 방향으로 생각을 매듭지었다. 우리는 괜찮을 거라고. 나는 대책 없는 낙관주의자다. 어쩌면 기간이 한정적인 휴직이기 때문에, 결국 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마음이 천하태평, 현실을 회피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괜찮을 것이라는 긍정으로 이 날들을 채운다.
거기에 그 사람과 다시 함께 있는 시간이 좋기도 하다는 생각이 비집고 들어왔다. 잠시 어쩌면 좋을까 물음표를 던지고 답을 찾지 못한 채, 옛날처럼. 우리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늘 함께 했던 그 시간이 돌아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20살, 그때처럼 오랫동안 그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좀 설레기까지 했다. 다시 우리의 동행이 시작됐다. 따로, 또 같이 하던 10년이 일단락되며, 바야흐로 상시 함께 하는 생활체제가 시작된 것이다.
역시 평화는 길지 않았다. 3주가 지나자 우리는 까칠하고, 부대끼고, 서로가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툭툭 튀어나왔고, 짜증 섞인 목소리가 잦아졌다. 너는 왜 그러냐고, 제발 성가시게 굴지 말라는 메시지가 쌓이고 쌓였다. 절반은 혼자, 절반은 같이에서 온종일 함께로 생활이 바뀌자 또다시 서로의 결을 맞추는 적응이 필요해졌다. 이런 시간이 처음은 아니다. 우리가 한 명 한 명의 개인에서 가족이 된 후에도 느꼈던 불편함이다. 우리는 10년을 알았는데, 결혼을 하고 함께 살자 또 몰랐던 상대를 알게 되고, 겨우 서로에게 적응하고 거기에 더해 10년을 애도 낳고 살았다. 그런데 회사를 쉬면서 같이 있으니 또 다른 생활양식이 시작된 듯 우리에게 다시 시간이 필요해진 것이다. 20년을 알아도 이런 신선함이 아직 남아있다니 그것도 의외였다. 이런 걸 보면 사람이 나를 알고 한 사람조차 제대로 알기가 얼마나 힘든 것인지 새삼 느낀다.
어른인데 그냥 내버려 두고 각자 지내던 대로 지내면 되는 것 아닌가? 할 수 있지만 나는 같이 있는 게 좋기도 해서 뒤로 미루고 싶지 않고, 아이가 어리다 보니 저녁에는 함께 있을 수밖에 없고, 함께 있는 이 시간을 더욱 같이 하고 누리고 싶기도 하다. 누군가는 말한다. 은퇴 후 함께 붙어있는 시간을 연습하는 것이라고. 아아, 그런데 평온하지만은 않다.
우리는 매일 삐걱이고, 동시에 가을의 절정이 다가오고 있었다. 평일 나들이가 자유로운 휴직자의 특권을 이용해, 아이들이 학교를 간 사이, 그가 화담숲 티켓을 기어이 예약했다. 우리는 하루하루 으르렁거리고 서로를 할퀴는데, 숲으로 가는 티켓을 기어이 예약했다.
벌써 휴직을 하고 4주가 지났고, 우리의 불안은 각자의 불안이 더해진 결과물로 서로 충돌하기 시작했다. 화담숲에 가는 날 또 한 번 일렁이고 커졌다. 작게 작게 부딪히며 타올랐다. 오래전 나는 화가 나면 초가삼간을 다 태워야 직성이 풀렸다. 나와 다른 그가,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처음 화난 이유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저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다는 이유만 남아 연소했다. 나조차 그가 이해하지 못하고 알지 못할 방식으로 분노하는데, 그 사람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폭주하곤 했다.
오래전 나라면 이 숲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약속도 일정도 그 기분 앞에서는 무조건 엎어야만 했다. 청개구리처럼 반대로 행동하며 그 사람 속을 뒤집어야 했다. 하지만 그날, 나는 대신 숲을 묵묵히 걸었다. 실은 안에서 탈것은 예약 못해 걷고 말았다. 그 사람도 동글동글, 나도 동글동글해진다. 마음이 먼저 동글해지고, 말을 건네고, 사과의 말을 하고, 화담숲 한 바퀴를 오로지 걸어서 돌며 우리는 동글어졌다.
이제는 잔잔해질 수 있다. 그 사람에게 배운 것이 있다면 그런 것이다. 다 태우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그렇게 불길이 치솟을 것은 없다는 것. 우리 사이의 일이란 게 그렇게 대폭발을 일으킬 필요가 없다는 것. 다 별것이 아니라는 것. 우리 서로보다, 우리 아이들보다 더 중요한 건 없다는 것 같은 것.
우리는 앞으로도 내내 다른 사람이겠지. 그래서 그 사람은 늘 나를 배우게 해 주고 나와 다른 모습을 보이고, 나와 달라서 그 사람이 좋았으니까. 또 어떤 부분 서로를 닮아가기도 하지만 그러나 미래에도 우리는 각자 그 자신이기를. 앞으로도 우리는 각자 달라져, 다음에 오는 또 다른 선택, 각자의 더 나은 선택에 신선함을 느끼고, 서로를 또다시 알게 되고, 그 폭을 넓혀갈 수 있기를 바란다. 결코 우리가 우리를 다 안다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서로에게 겸손하기를 바란다.
화담숲에서 우리는 동글동글, 좀 더 동글해진다. 그렇게 우리가 또 조금 맞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