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세상의 중심.
어머니는 평생 거진 집을 비우시지 않으셨다.
외출이라고는 친정 남양 홍 씨 계모임 참석. 그리고 느지막하게 나가게 된 동네 교회.
교사이신 아버지의 박봉으로 다섯 자식을 대학까지 보냈다는 것. 계산이 안된다. 기적이다.
집에서 애만 키우시던 엄마가 결국 집에서 자그마한 가게를 열어 가계에 보태시기 시작하셨다.
선생님 사모에서 가게 주인이 되셨다. 물론 나는 가겟집 딸이 되었다.
가게 물건은 팔기만 하는 게 아니다. 물건을 도매상에서 가져다주는 것도 있지만 받아 와야 하는 것도 있다. 어떤 것은 집에서 만들어야 하는 것도 있다.
이런저런 일을 정신없이 하시고 틈틈이 집안일도 해야 한다.
일곱 가족 식사를 챙겨야 하고
매일, 도시락을 아버지 것까지 너덧개 싸야 한다.
음식은 화력이 일정치 않은 연탄불에.
설거지는 그릇들을 대야에 넣어 수돗가에서. 그것도 받아둔 물을 퍼다가.
그리고 빨래.
수도꼭지를 튼다고 매양 물이 나오는 시절이 아니었다. 비정기적으로 나오니 수돗물 나오는 시간이 자연히 빨래하는 시간.
요즘은 온도까지 조절되는 3구짜리 인덕션.
틀면 냉온수가 나오고 물 빠지는 싱크대.
버턴만 누르면 세탁도 되고 건조까지 되는 세탁기.
이런 놀라운 시대를 살면서도 우리는 힘드는데.
집에서 애만 키워도 우울증이 생기고 독박이라 힘들고 자아 성취를 못해 괴로운데...
지금 생각하니 참 억척같이 사셨구나.
살기도 힘든데 왜 그렇게 애들을 많이 낳으셨는지 이해가 안 된다. 그런데 그때는 집집마다 5명은 기본.
그나마 살아남은 애들만 그렇다. 집집마다 한두 명은 출산 시, 혹은 살다가 죽었다.
죽은 아이를 슬퍼하는 것도 사치인 그 시절.
자아 성취란 단어도 없었던 그 시절.
내가 대여섯 살 때 생각나는 한 장면.
그때 할머니 할아버지가 생존해 계실 때다.
고모는 교회 전도사였으나 다른 어느 가족도 교회 나가기 전이었다.
어느 날. 집 마당에서 굿이 열렸다.
엄마는 소복을 하고 앉아 계셨다. 징 징 징...
무당은 징 소리에 맞추어 두루마기를 펄럭이며 엄마 곁에서 춤을 추었다.
동생도 그때는 한 명 밖에 없어 경제적으로 아직 궁핍하지 않았을 때인데 굿을 받을 정도로 엄마는 왜 힘드셨을까? 몸과 마음이 아프셨나?
낳은 지 며칠 만에 하늘로 보낸 아기 때문? (내가 나이 들어 언젠가 죽은 동생 이야기를 언급했더니 엄마는 놀라워하셨다. 어린 네가 알고 있었구나..)
아니면 모시던 시부모님 때문? (어느 겨울 아침, 식사하시던 할머니가 갑자기 숟가락을 내동댕이 치시던 광경)
아니면 젊으실 때 자주 몸 져 누우시던 엄마의 건강 때문?
그러던 엄마가 동생을 연달아 3명을 낳으셨다.
다섯 형제 키우고 공부시키는 데는 끝없이 돈이 필요해졌으리라.
병약하고 연약한 엄마가 자식들을 위해 가게를 시작하면서 생활의 전투사가 되셨다.
5명을 키우면서? 청소는? 세탁은? 좁은 집. 그것도 반은 전세 주느라 집이 동강 나서 변변한 부엌도 없는데?
가게를 하신다고?
도대체 어떻게 감당하시려고?
자식들을 생각해서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을 하신 거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여기 슈퍼우먼이 계셨네.
다들 고생을 했지만 다행히 세월이 흘러 다섯 자녀가 다 대학을 나왔고 나름 직장들을 가졌다.
이제는 가게를 접고, 적어도 몇 명이 그럴듯한 월급을 받아 왔으니 돈 세는 재미로 사셨다.
(그때는 봉투 안에 현금으로 월급을 받았다.)
세월이 흘러 다섯 자녀가 다 품을 떠났다. 명절이나 생일날에는 전국에서 자녀들이 본가로 모였다.
거진 스무 명 가족들로 집안이 법석거렸다.
엄마는 떠나는 자식들 차 안에 이런저런 먹을 것들을 실어 넣었다.
어머니가 구순 넘어 치매기가 약간 생겼을 때에도 나름 가족 모임은 계속되었다.
살아봐야 아는 진실이 있다. 모든 것은 언젠가 갑자기 끝난다는 사실.
어머니가 갑자기 소천하셨다.
혼자되신 아버지가 어떻게 딸 집으로 오셨다.
그런데 어느샌가 가족모임이 없어진 것이다.
어머니가 연로해지시면서 이젠 식당에서 모여 식사하며 왁자지껄 이야기꽃을 피우며 가족사진도 찍던 가족모임.
그러나 어머니가 안 계시니 형제들은 각자 자기 좋은 시간에 와서 아버지를 뵙고 간다. 어떤 동생은 바쁘다며 돈만 보내기도 한다.
아하~ 나는 알게 되었다.
우리 가족의 구심점은 엄마였다.
만약 아버지가 안 계시고 엄마만 살아 계셨다면 분명 가족모임은 계속되리라.
물론 아버지는 직장 생활하시느라 평생 수고하셨지만 왠지 어렵다.
자식들과 알콩달콩 정을 나눈 사람은 엄마였다.
본가에 전화드릴 때 엄마가 받으시면 대화가 이어가나
아버지가 받으시면 '엄마 바꿔주세요'였다.
아버지가 교사로 퇴직 후 게이트볼에 몰두하셨다.
가족모임이 있을 때도 아버지는 얼른 식사하시고 게이트볼 하시러 슬그머니 빠지셨다.
언젠가 갑자기 이런 상황이 오리라는 걸 아무도 몰랐다.
TV 노인 프로그램에서 한 남자 어르신이 말한다.
"제가 애들을 좀 엄하게 키웠어요. 지금 나이가 드니 애들과 이야기하고 싶은데 애들이 어려워해요. 이젠 소통하며 살고 싶어요."
아이고~ 이제 와서 "우리 소통하자" 한다고 소통이 되나요?
예전 가족모임 때 이야기 중심은 엄마.
이런저런 것들을 챙겨 싸주시는 이도 엄마.
시간 나면 자식 네 집에 전화해서 밥은 먹고 다니는지 궁금해하시는 이도 엄마.
그런 엄마가 알고 보니 집안의 중심이셨다.
우리 집은 모계사회였다!
지난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은 윤여정 씨.
그녀는 말한다.
"오늘의 이 영광은 나로 하여금
돈을 벌지 않으면 안 되게 한 아들들 덕분"
모계사회는 힘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었다.
지극정성과 감성으로.
엄마 없는 아버지는 이리저리 쓸쓸해하셨다.
어릴 적 부르던 동요.
'까치 까치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무서웠던 아버지 순해지시고...'
명절 때나 순해지시는 무서운 아버지.
그래서 남자애들은
자기들에게 무섭지 않고 취사나 청소를 기꺼이 감당하며 원천적 도움을 주는
엄마나 누나랑 살고 싶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 모래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