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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by 제이

장애인복지관에서 돌아온 아들에게 엄마가 묻는다.
"오늘 점심 뭐 먹었니?" "그냥."
"오늘 야외 활동 시간에 어디 갔다 왔니?" "그냥."
질문을 잘해야 한다. 선택식으로. 예컨대 "오늘 점심, 미역국 먹었니? 된장국 먹었니? 아니면 다른 국?"

'그냥'
말을 잘 못하는 아들은 복잡한 상황을 설명할 땐 그냥 한 마디로 "그냥"이라고 말한다.
세상에 이 한마디 말보다 아들에게 유용하게 쓰이는 단어는 없다.

외국인과 영어나 불어로 이야기할 때 머리가 복잡해진다. 이럴 때 한국말로 "그냥" 하면 참 좋겠다.

미국에서 잠깐 체류할 때 일이다. 처음으로 아들 다니는 특수학교 자모모임에 참석한 날. 모임이 있는 방에 들어가니 수십 명의 엄마들이 여기저기 모여 왁자찌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계속 만나는 분과는 그래도 눈치 보면서 무슨 말 뜻인지 감을 잡는다. 그런데 수십 명의 외국인들 사이에 있으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리가 하얗게 되었다.
아하~ 우리 아들이 말할 때 상태가 이렇구나. 처음으로 아들의 마음을 이해한 날이었다.

어느 날 저녁, 남편이 퇴근하는 길.
걸어서 집 쪽으로 오고 있었다.
그때 마침, 태권도 학원수업을 끝낸 아들이 저 앞서 집으로 가고 있더란다.
아들 앞에, 같은 체육관 도복을 입은 어린 여학생이 가고 있더란다. 아들은 그 애에게 다가가서 "안녕" 인사를 하더란다.
그런데 그 여학생은 들은 척 만 척, 자기 갈 길로 가더란다.
남편은 이 상황을 뒤에서 보았지만 모르는 척했다.
집에 들어온 아들, 화가 잔뜩 나서 씩씩거린다.
"왜 그러니?" 묻는 엄마 말에 아들은 대답한다. "그냥"
그 여학생에게는 아들이 무서울 수도 있겠다. 덩치는 작지 않은데 말도 못 하는
좀 이상한 오빠, 아저씨.
그런데 아들은 자기 조카뻘 되는 애들이 자기를 아는 척해주길 원한다.
그러다가 화도 내고 그러다가 이런저런 바람도 포기하고 상황을 설명할 수도 없으니 그냥 "그냥" 하고 포기한다.
'그냥'이라는 말에는 하고 싶은 말과 하지 못한 말과 해야 할 모든 말이 숨어있다.

그냥 그러려니 그냥 그러려니.
많은 걸 마음에 품고 사는 아들.
道人이 아닐까?
그나마 아들은 그림이라도 그리면서 자기 마음을 조금이라도 표현할 수 있으니 다행이다.
두 번째 전시회를 소개하면서 방송은 '그림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장애인화가'라고 했다.

어릴 땐 별명이 '영국신사'였던 아들.
남 해코지 않고 조용조용하던 아들이 어느 날 180도 바뀌었다.
늦게 이른바 사춘기를 만난 것이다.
때도 시도 없이 심기가 불편해진다. 물론 이유는 꼭 있다. 대부분, 사랑을 거절당하거나 하기 싫은 일 시킬 때다.
고함을 지르고 눈물도 흘린다.
아들의 두 번째 전시회를 방송한 KBS기자가 인터뷰를 하면서 '나는 못 알아듣는 작가의 말을 찰떡같이 알아듣는 어머니'라는 나도 아들의 마음을 다 읽어내지 못하니 안타깝고 속상하다.
누군가가 그랬는데 지능이 낮은 이들은 암이 없단다. 신경 쓰는 일이 없어서란다. 아이고.
어느 날, 엄마는 기도하다가 하나님께 항의도 해봤다. "주님, 지능은 안 주시면서 감성은 왜 주시나요?"
시간이 흐르니 고비는 지났다. 그러나 예전의 그 아이는 아니다.
그러나 아들아 너는 엄마에게
'그냥' 사랑스러운 아들이란다.

생각해 보면 그냥, 그냥 이 세상을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많은걸 가슴에 묻어 주고 그냥.. 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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