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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상운 Dec 16. 2019

박정희와 한국 고고학의 태동

박통을 바라보는 고고학계의 양가적 시각

경주시내 대릉원 전경. 가운데에 있는 큰 무덤이 황남대총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국내 최대 규모의 고대무덤


  경주여행의 단골코스 중 하나인 대릉원에 들어서면 연못 옆으로 2개의 커다란 봉분이 표주박처럼 붙어있는 걸 볼 수 있다. 길이 120m, 너비 80m, 높이 23m에 이르는 국내 최대 규모의 고대무덤이자 대표적인 신라 적석목곽분인 ‘황남대총’이다.


  규모에 걸맞게 5만여 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와 신라사 해석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삼국통일 전 4~6세기 신라 마립간의 왕릉으로, 학계에서는 무덤주인을 놓고 내물마립간, 눌지마립간 등으로 의견이 엇갈린다. 사실 대릉원 내 신라무덤 중 주인이 밝혀진 것은 하나도 없다. 고대 신라인들은 묻힌 사람의 이름을 새긴 지석(誌石)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부 고고학자들은 신라인들이 지석 대신 비단과 같은 천에 인적사항을 적지 않았겠느냐고 추정하지만 유기물은 썩기 마련이므로 현재까지 전해질 수는 없다.


황남대총 북쪽 무덤에서 출토된 금관.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무덤 규모나 묻힌 사람의 신분을 짐작컨대 이 시대 진귀한 최고급품들이 황남대총에 묻혔을 것이다. 서기 4~6세기 신라가 통째로 들어가 있는 일종의 타임캡슐인 셈이다. 벌써 40년이 흘렀지만 1970년대 발견된 유구, 유물에 대한 정보가 신라 마립간 시대를 해석하는 기본적인 인식의 틀을 형성하고 있다. 최고 지배층의 장례에 쓰인 물질문화뿐 아니라 고구려와 중국 남조, 페르시아 등 해외에서 수입한 사치품의 실상도 담겼다. 고대 문명교류의 폭이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을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1975년 7월 경주 황남대총 발굴현장을 찾은 박정희 대통령(가운데)과 영애 시절의 박근혜(오른쪽) 전 대통령.


박정희와 황남대총


  황남대총 발굴은 처음부터 끝까지 박정희 정권의 국책사업 성격이 짙었다. 박정희는 1971년 경주 시내 여러 유적을 발굴한 뒤 이를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 내용의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을 세웠다. 계획도 밑그림을 손수 그렸을 정도로 박정희의 경주개발에 대한 열정은 대단한 것이었다. 여담이지만 과거 선거에서 경주시민들의 보수정당 지지율이 높았던 것은 TK(대구 경북) 지역에 속한 영향도 있었겠지만 박정희에 대한 향수도 상당 부분 작용했을 것이다. 나는 “박정희가 없었다면 오늘의 경주는 없었을 것”이라는 찬사를 경주의 처가에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아이로니컬한 것은 장모님의 생가가 황룡사지 안에 있었는데, 박정희 정부 때 황룡사지 발굴이 시작되자 제대로 보상도 받지 못한 채 집을 옮겨야만 했다는 사실이다. 경주시민들이 문화재 발굴에 비교적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이런 과거사와도 관련이 깊다.


  현직 대통령으로서 경주 발굴현장을 직접 방문한 인사는 대한민국 건국 이래 박정희와 그의 딸 박근혜 뿐이다. 박정희의 신라에 대한 높은 관심을 삼국통일이나 화랑도 정신과 연관짓는 시각도 있다. 1960~70년대 북한 김일성과 체제 경쟁을 벌이며 남북통일을 지향한 통치 철학을 삼국을 통일한 신라에서 찾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더불어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해 신라 화랑도나 무신(武臣) 김유신의 충(忠) 이미지를 활용하려 한 측면도 있다.


1970년대 황남대총 발굴 당시 모습. 절단된 봉분 가운데로 사람들이 보인다. 문화재청 제공


"황남대총 발굴은 겁 없는 짓"


  약소국의 콤플렉스가 발현된 때문일까. 박정희 정부는 고고 발굴에서도 사이즈에 유독 집착했다. 이왕 발굴하는 거면 적석목곽분 중 가장 큰 황남대총을 파보라는 게 정권의 요구였다. 그러나 누구보다 일머리를 잘 알았던 발굴단장 김정기는 이와 같은 발상 자체가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당시 열악한 발굴기술과 일천한 경험으로 황남대총을 발굴하는 건 유적 파괴라고 봤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의 생전 회고 대담집에는 황남대총 남쪽 무덤 발굴에 대해 “겁 없는 짓”이라고 언급한 내용이 나온다.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 등 당시 발굴단원들에게 “황남대총 발굴은 미친 짓”이라는 격한 표현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실제 당시 문화재위원들과 학계 인사들도 황남대총 발굴에 적지 않은 우려를 표시했다. 고고학계 석학으로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를 지낸 삼불 김원룡(1922~1993)조차 경주 황오리의 소형 무덤만 겨우 발굴해 봤을 정도로 발굴경험이 부족한 시절이었다.


  그러나 서슬 퍼런 군사독재 시대, 최고지도자가 직접 챙기는 사업에 감히 ‘아니오’라고 반박할 수 있는 공무원은 거의 없었다. 김정기는 대신 꾀를 냈다. 본 사업에 착수하기 전 일종의 ‘테스트 베드’ 성격으로 황남대총보다 작은 천마총 발굴을 먼저 시도해보자고 제안한 것. 천마총 발굴로 시간을 끌면서 황남대총 발굴을 최대한 늦춰보려는 속내였다. 그러나 속도전에 익숙한 박정희 시대의 조급함은 이마저도 용납지 않았다. 천마총에서 신라 금관 등 기대치 않은 성과를 올리자 정부 관계자들뿐만 아니라 문화재위원들까지 덩달아 들썩거렸다. 일종의 집단 열기에 휩싸이면서 천마총에 이어 황남대총 발굴도 삽시간에 결정되고 만다.


고고학 유튜브 채널 '발굴왕'에 출연해 황남대총 발굴 당시를 회고하고 있는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가운데). 최 교수 좌우로 강인욱 경희대 교수와 필자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발굴왕의 솔직 고백

  당시 발굴조사 실무자였던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는 최근 유튜브 채널 '발굴왕'에 출연해 “지금이라면 황남대총 발굴에 섣불리 뛰어들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황남대총 발굴은 천마총보다 더 급하게 진행돼 토층도조차 그리지 못할 정도였고, 칠기(漆器)와 금속 등 출토 유물들의 손상도 피하지 못했다. 최 교수는 “김정기 선생은 천마총에서 유물이 많이 나오면 황남대총까지 파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내심 기대했다”며 “황남대총은 지금이라면 발굴에만 최소 10~15년이 걸릴 엄청난 현장이었다”고 회고했다.


  가난했지만 인정이 있던 1970년대를 겪은 사람들이 그렇듯 최병현도 박정희에 대해 양면적인 기억을 갖고 있었다. 독재자이기는 했지만 한국 고고 발굴을 지원한 공을 지우기 힘들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발굴현장에 내려오면 금일봉을 항상 건네줬는데 당시로선 거금이었어요. 한번은 7월에 경주 천마총에 오셨는데 돈 100만 원을 쥐어주더라고. 그때 은행원 월급이 4만 원이던 시절이야. 집 한 채 정도 살 수 있는 큰 돈이었는데 경주시 공무원, 경찰들과 나눠 갖고도 그때 월급의 절반쯤 되는 1만 원이 내 손에 들어오더라고요. 참 고마웠습니다….”


이밖에 황남대총 발굴현장의 흥미로운 이야기들은 필자가 진행하는 유튜브 <발굴왕> 3회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qJcgDggfwAQ

#발굴왕 #황남대총 #박정희 #고고학 #최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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