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남대총 남쪽 무덤의 피장자가 묻힌 자리. 바닥에 놓인 금제 허리띠가 보인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신라 최고 사치품 ‘비단벌레 장식’
1975년 8월 중순 경주 황남대총 남쪽 무덤. 목곽 안에서 말띠드리개(행엽·杏葉)와 더불어 엎어진 채 땅에 묻힌 안장 뒷가리개가 살짝 모습을 드러냈다. 숭실대 사학과를 갓 졸업하고 조사보조원으로 일하던 최병현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꽃삽과 대나무 칼로 흙을 걷어낸 뒤 안장을 살짝 들춰본 순간 숨이 멎었다. 1600년간 깊은 어둠 속에 갇혔던 영롱한 빛이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비단벌레 2000마리의 날개를 일일이 뜯어내 붙인 신라시대 최고 사치품 ‘비단벌레 장식 금동 말안장 뒷가리개’였다.
1975년 8월 황남대총 남쪽 무덤에서 출토된 ‘비단벌레 장식 금동 말안장 뒷가리개’. 비단벌레 2000마리의 날개를 붙여 만들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순간 발굴 현장에 긴장감이 흘렀다. 황남대총 북쪽 무덤에서 비단벌레 장식 파편을 발굴한 경험상 비단벌레 장식이 빛과 습도에 취약하다는 걸 발굴단원들은 알고 있었다. 즉시 물을 묻힌 커다란 솜을 비단벌레 장식 위에 덮고 발굴을 중단했다.
화학자이자 한국원자력연구소 부소장이던 김유선이 현장으로 달려왔다. 그는 비단벌레 날개 파편을 서울로 가져가 보존방법을 알아내기 위한 실험을 서둘렀다. 김유선이 실험실에서 고군분투한 1주일 동안 유물은 물에 젖은 솜을 뒤집어쓴 채 무덤에 그대로 놓여있었다. 마침내 “햇볕을 차단한 채 글리세린 용액에 유물을 넣어 보관하라”는 김유선의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최병현은 비단벌레 장식을 무덤에서 꺼내 나무상자에 넣고 글리세린을 부었다. 발굴단원이 유물 보존처리까지 직접 해결해야 하는 열악한 시절이었다.
1973년 5월 경주 천마총 발굴 현장. 김정기 발굴단장의 불호령에 최병현의 낯빛이 사색이 됐다. 두 달 동안 봉토를 걷어낸 끝에 드러난 내부 석렬(石列)의 성격을 제대로 규명하지 못했다는 호통이었다. 발굴로 손상된 유구는 복원이 불가능하기에 웬만하면 현장에서 흥분하는 법이 없던 김정기도 화를 쏟아냈다.
최병현은 그날 밤 발굴단원 합숙소로 돌아와 몰래 보던 서양사 원서를 책상에서 치우고 일제강점기부터 당시까지 발간된 신라 적석목곽분 보고서들을 밤을 새워 통독했다. 마음속 깊이 존경하던 김정기로부터 실력으로 인정받고야 말겠다는 오기가 발동한 것이다.
20대 청년의 열정은 곧 인정을 받았다. 최병현은 그해 천마총 발굴에 이어 곧바로 황남대총 발굴현장으로 투입돼 인부들을 감독하고 보도자료를 작성하는 책임을 맡았다. 한때 서양사학자를 꿈꾼 청년은 이로부터 39년 뒤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이 됐다.
황남대총 북쪽 무덤에서 출토된 금귀고리.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경주 발굴현장이나 경기도 안양시의 개인 사무실에서 만난 최병현은 소박하고 투박하면서 동시에 할말은 다 해야 직성이 풀리는 딸깍발이 학자였다. 고고학계에서 다변으로 유명한 그이기에 한번 붙잡히면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장광설을 들어야했지만 쏟아내는 지식의 폭과 깊이에 놀라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칠순이 넘은 나이에도 끊임없이 현장을 찾고 논문을 쓰는 그의 열정에 놀라는 후학들도 많다.
최병현은 나와의 인터뷰에서 천마총과 황남대총 발굴에 참여한 것이 자신의 운명이자 인생 최대의 행운이었다고 술회했다. 그는 황남대총을 함께 답사할 때 “학자의 양심에 따른다면 이뤄져선 안 될 발굴이었지. 그때야 대학 졸업하자마자 현장에 와서 그걸 판단할 위치가 아니었고 그저 꼬박꼬박 월급을 준다고 해서…”라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대학 등록금을 제때 내지 못해 두 번이나 제적된 것이 오히려 행운이었다고 말했다. 예정대로 졸업했다면 경주 발굴의 기회를 놓칠 뻔했다는 것이다.
※고고학 유튜브 채널 <발굴왕> 2화에서 경주 황남대총 발굴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를 시청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