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계에서 선화공주 실존 논란이 지속되는 가운데 올 9월 공개된 익산 쌍릉 소왕묘 재발굴에 많은 관심이 쏠렸습니다. 사실 1917년 야쓰이 세이이쓰(谷井濟一)가 이곳을 먼저 발굴한 바 있지만 이미 고려시대부터 도굴이 이뤄진 상황. 그래도 '꺼진 불도 다시보자'는 심정으로 광복 후 첫 재발굴이 이뤄졌습니다. 앞서 지난해 발표된 대왕묘 재발굴에서는 무왕으로 추정되는 60대 남성의 인골이 발견돼 혹시나하는 마음이 컸던 것이지요.
익산 쌍릉 소왕묘 석실 내부. 가운데 바닥에 길쭉한 관대가 보인다. 문화재청 제공
미궁에 빠진 선화공주 미스터리
결론만 먼저 말씀드리면 사람들이 기대했던 선화공주의 흔적은 소왕묘 재발굴에서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이미 무덤이 여러 차례 도굴돼 유골 등 남아있는 유물이 별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성과가 아주 없지는 않았습니다. 1m 남짓의 묘표석(墓表石) 두 점이 한국 고대무덤에서 처음 발견된 겁니다. 적외선 조사결과 묘표석에 글자가 새거진 흔적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묘표석 중 하나는 비석처럼 생겼는데 석실 입구에서 1m쯤 떨어진 곳에 세워져 있었다고 합니다. 크기는 길이 125㎝, 너비 77㎝, 두께 13㎝였지요. 석실을 향한 쪽만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었습니다. 나머지 하나(길이 110㎝, 너비 56㎝ )는 봉토 쪽에서 발견되었는데 마치 원뿔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발굴단에 따르면 원뿔 모양 묘표석은 중국 지안(集安)의 고구려 무덤(우산하 1080호)에서 비슷한 유물이 출토된 바 있다고 합니다. 발굴단은 "석실과 봉토를 지키는 진묘(鎭墓)처럼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는 벽사용 물건인 것 같다"고 추정하였습니다.
소왕묘 재발굴에서 발견된 석비형 묘표석(위 사진)과 원뿔형 묘표석(아래). 문화재청 제공
결국 소왕묘의 주인공은 선화공주 혹은 사택왕후 혹은 제3의 인물 중 하나라는 가능성만 남긴 채 미스터리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소왕릉 축조 기법(내부의 육각형 석실 양식, 판축식 봉토)이 대왕릉과 유사하기 때문에 두 무덤의 피장자가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입니다.
선화공주 실존설 뒷받침 소왕묘 출토품?
이와 관련해 이병호 국립중앙박물관 전시과장이 소왕묘 출토품의 시기를 근거로 선화공주 실존론을 지지하고 있어 눈길을 끕니다. 4년 전 국립중앙박물관은 출처가 알려지지 않은 금동 유물을 보존처리하는 과정에서 이것이 소왕묘에서 출토된 ‘금동 밑동쇠’(金銅製座金具·목관 뚜껑과 측판에 붙는 널꾸미개를 고정시켜 주는 장신구)라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일제강점기 촬영한 유리건판 사진과 당시 작성된 유물 목록을 확인한 결과였습니다.
쌍릉에서 출토된 '금동 널꾸미개'. 1번(소왕묘 출토)이 2번(대왕묘 출토)에 비해 문양이 더 입체적이고 세련돼 고고학적으로 볼 때 더 앞선 시기로 추정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병호 전시과장은 이 밑동쇠와 딱 들어맞는 소왕묘 출토 ‘금동 널꾸미개’(金銅製棺裝飾·목관의 뚜껑과 측판을 연결해주는 장신구)를 찾아냈으며, 이것이 무왕이 묻힌 대왕묘의 널꾸미개에 비해 문양과 제작기법에서 시기적으로 더 앞선다는 사실을 주장하였습니다. 왕비가 묻힌 소왕묘가 무왕의 대왕묘보다 먼저 만들어졌다는 뜻이죠.
이는 무왕과 함께 쌍릉에 묻힌 왕비가 미륵사지 사리봉안기에 나오는 사택(沙宅)왕후가 아님을 방증합니다. 왕후가 왕보다 나중에 죽었는데 묘가 먼저 만들어질 순 없기 때문입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사택왕후는 무왕보다 1년 뒤인 서기 642년 세상을 떠난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이 과장은 “쌍릉 소왕묘는 사택왕후의 것은 아닌 게 분명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미륵사지 서석탑 사리봉영기를 근거로 선화공주가 실존하지 않는다고 단언하기는 아직 이르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겁니다.
※고고학 유튜브 채널 <발굴왕> 14화에서 선화공주와 쌍릉 재발굴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를 시청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