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폼페이 나성리유적 上
“1600년 전에 거대한 도심 호수공원이라니….”
2010년 10월 초 충남 연기군 나성리(현 세종시 나성동) 발굴현장. 밤새 내린 가을비로 유적이 물에 잠겼다는 보고를 듣고 부랴부랴 현장을 찾은 이홍종 고려대 교수(고고학)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백제시대 도시유적 한가운데 U자형의 거대한 호수가 주변 언덕 위 집터와 더불어 장관을 이뤘다. 비가 내리기 전에는 한낱 구덩이로밖에 보이지 않던 유구였다. 호우로 인해 갑자기 생긴 1.5m 깊이의 호수는 너비 70m, 길이 300m에 달했다. 도시 한가운데 자리 잡은 모습이 마치 현재의 경기 고양시 일산 호수공원을 연상시켰다.
출토 양상도 이 구덩이가 도심의 경관용 호수라는 판단을 굳히게 했다. 당초 이홍종은 이곳을 강물 근처 단구(段丘)에 있는 저습지로 보고 목간(木簡)과 같은 쓰레기가 잔뜩 쌓여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발굴조사원들에게 “유기물이 나올 수 있으니 주의하라”고 지시했는데, 정작 구덩이 속에서는 토기조각 몇 점만 나왔다. 이 교수는 “도시의 핵심 경관인 만큼 호수를 깨끗하게 관리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와 함께 답사한 나성리 발굴현장은 행정중심복합도시의 일부로 변한 지 오래였다. 주변에 고층 건물이 대거 들어선 가운데 도시유적 위로 아파트를 짓고 있었다. 현존하는 백제 유일의 지방도시 유적은 그렇게 사라지고 있었다.
나성리 유적은 백제의 지방 거점도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 로마의 경우 폼페이나 헤르쿨라네움 등 여러 지방 도시들이 발굴됐지만, 우리나라는 발굴로 전모가 드러난 고대 도시유적이 별로 없다. 고고학자들이 지방 도시유적에 관심을 갖는 것은 도성-지방 거점도시-농경취락으로 이어지는 지배구조를 이해하고 왕경이 아닌 지역에 살았던 귀족, 서민들의 생활상을 규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서구 고고학계가 오랜 세월에 걸쳐 심층연구를 거듭하고 있는 폼페이는 인구가 최대 3만 명을 넘지 않는 고대 로마의 소도시였다. 폼페이에 세운 각종 도심 건물이나 조각들은 로마를 본뜬 것이었다. 학계는 폼페이 같은 지방 소도시 발굴조사 결과가 고대사 규명의 핵심 열쇠라고 본다. 로마시대 역사가들이 제대로 주목하지 않아 기록에 전하지 않는 사각지대를 조명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나성리 유적이 특히 흥미를 끄는 건 넓은 부지에 도로망을 먼저 깐 뒤에 건물을 올린 계획도시라는 점이다. 실제로 도로 유구 안에서 건물터가 깔려 있거나 중복된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나성리에서는 너비 2.5m(측구 제외)의 도로뿐만 아니라 귀족 저택, 토성, 고분, 중앙호수, 창고, 빙고(氷庫), 선착장 등 각종 도시 기반시설이 한꺼번에 발견됐다. 이밖에 대형 항아리를 굽는 가마터가 따로 존재했으며, 가장 높은 지대에는 수장급 무덤을 뒀다. 이 무덤 안에서는 백제 귀족들이 부장품으로 애용한 금동신발이 출토됐다.
이 거대한 도시유적을 지은 주체가 백제 중앙정부인지 혹은 지방 지배층인지를 놓고 학계 의견은 엇갈린다. 박순발 충남대 교수는 나성리 유적이 풍납토성 구조와 비슷한 점을 들어 백제 중앙정부가 도시 건설을 주도한 것으로 본다. 예를 들어 고지형(古地形) 분석 결과 풍납토성과 나성리 모두 토성 주변 수로와 옛 물길을 끌어들여 해자(垓字)를 판 흔적이 발견됐다. 고대 중국의 도성제를 배운 백제가 한성뿐만 아니라 지방도시에도 이를 적용한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인근 송원리 고분군에 중국 남조풍의 양식이 가미된 사실도 백제 중앙과 중국의 교류가 이곳까지 영향을 끼친 흔적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 이홍종 교수는 “출토 유물이나 묘제가 백제 중앙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어 중앙정부의 지원을 받은 지방 지배층이 도시 건설을 주도했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백제 중앙으로부터 반(半) 자치를 인정받은 이 지역 토착 지배층이 왕실과 긴밀히 협력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는 5세기 백제 중앙의 통치력이 영산강 유역까지 온전히 미치지 못했다는 임영진 전남대 교수의 주장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충청·호남일대의 지방 지배층도 시간이 흐를수록 강력해진 백제 중앙정부에 점차 복속돼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