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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상운 Dec 09. 2019

日왕가 뿌리 '부여 능산리 무덤떼'에?

용꿈 꾸고 국보를 캐다, ‘백제금동대향로’

백제왕들이 묻힌 부여 능산리 고분군. © 2019 김상운


日 王家 뿌리 백제 능산리 고분군에?


  백제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百濟金銅大香爐)가 출토된 능산리사지는 보통의 사찰과는 좀 다릅니다. 사찰 터 옆으로 경사를 따라 떼 지어 서있는 7개의 원형 봉분을 보고 있노라면 전공 학자가 아니라도 뭔가 독특한 장소임을 직감할 수 있죠. 국가 사적에 지정된 이 무덤 떼는 행정구역명(충남 부여군 능산리)을 따서 능산리 고분군으로 불리는데, 학계는 사비시대 백제 왕릉으로 보고 있습니다. 무덤 내부를 발굴해본 결과 이 시대 왕들의 전형적인 묘제인 석실분(石室墳)이 확인됐기 때문입니다.


  이곳을 걸으면 아키히토 일왕이 “천황가의 모계는 백제 혈통”이라고 언급한 이유를 새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능산리 고분군에서 능산리사지 방면으로 걷다보면 경계에 일본인들이 세운 기념비와 기념식수를 여럿 볼 수 있는데 ‘일본국 백제 후손’이란 글자가 눈에 들어옵니다. 백제 왕가를 자신의 뿌리로 여기는 일본인들이 이곳을 방문해 백제 왕들의 공덕을 기린 거죠.


능산리 고분군 근처에 있는 기념식수판. ‘일본국 백제 후손’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백제 왕을 추념하기 위해 일본인들이 세운 또 다른 기념식수판(아래).


  그렇다면 백제왕릉 바로 옆에 붙어있는 사찰(능산리사지)의 존재는 무엇일까. 학자들은 백제 왕과 왕비들의 죽음을 기리는 추복 시설이라고 추정합니다. 지금으로 치면 서울 동작구 현충원의 박정희 대통령 묘역 바로 옆에 자리 잡은 호국지장사와 비교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능산리사지에서 발견된 돌로 만든 사리감(舍利龕․사리를 보관하는 용기) 명문에 따르면 이 사찰은 위덕왕(재위 554~598년) 13년 백제 왕실에 의해 건립됐습니다. 신라와의 관산성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아버지 성왕(재위 523~554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위덕왕이 세운 것으로 추정됩니다.


간밤에 본 용이 눈앞에..


  “여보, 간밤에 용꿈을 꿨지 뭐예요.”
  “당신 늦둥이라도 보려는가. 하하.”
  1993년 12월 12일 오후 8시 반. 능산리사지 발굴현장에서 일생일대의 놀라운 광경을 목도한 신광섭 당시 국립부여박물관장은 이날 출근길 아내와 나눈 짧은 대화가 불현듯 떠올랐다고 합니다. 그의 눈앞에는 거대한 용이 온몸을 비틀며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었죠. 용의 아가리 위로 연꽃이 피고 다시 그 위로 첩첩산중의 삼라만상(森羅萬象)이 펼쳐졌습니다. 백제금동대향로였습니다.


  향로가 출토된 과정은 용꿈만큼이나 드라마틱합니다. 발굴단은 당시 신 관장을 비롯해 김정완 당시 국립부여박물관 학예연구실장(전 국립대구박물관장), 김종만 학예연구사(전 국립공주박물관장) 등으로 구성됐습니다. 부여군이 나성(羅城)과 능산리 고분군 사이에 관람객 주차장을 짓기로 함에 따라 1993년 마지막 발굴이 시작됐습니다. 군청의 공사 독촉에 시간은 촉박했고 발굴예산은 부족했습니다. 신 관장은 “만약 1993년 발굴에서 향로가 발견되지 않았다면 능산리사지는 황량한 아스팔트 주차장으로 바뀌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부여 토박이인 신광섭은 예부터 이곳에서 백제 기와가 대량으로 출토된 사실에 주목했다고 합니다. 삼국시대 기와는 사찰이나 궁궐과 같은 격조 있는 건물에만 쓰였기 때문이죠. 신광섭은 “왕릉(능산리 고분군)과 나성에 인접한 곳이라면 뭔가 중요한 시설이 있었을 것이라는 감이 왔다”고 말했습니다.

  신 관장은 박물관계에서 불도저로 통합니다. 판단이 서면 과감하게 목표를 향해 돌진하는 스타일이죠. 그는 곧바로 서울로 올라가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 노태섭 기념물과장(훗날 문화재청장 역임)을 만났습니다. 발굴현장을 많이 다녀본 노 과장도 남다른 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과장 전결로 2000만 원의 예산 지원이 즉시 이뤄졌습니다. 신 관장은 한발 더 나갔습니다. 당초 시굴(발굴에 앞서 유구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 일부만 파보는 것)로만 발굴 허가가 났지만, 과감히 사찰 서쪽 건물터(발굴결과 공방 터로 밝혀짐)에 대한 전면 발굴에 나섰습니다. 시키지도 않은 일을 감행해 나중에 책임 추궁을 당할 수도 있었지만, 유적을 온전히 확인하는 게 우선이었죠. 발굴성과가 제때 나오지 않으면 주차장 공사가 당장 강행될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신 관장은 “하늘이 도왔다. 여기서 향로가 나올 줄 누가 상상이라도 했겠느냐”고 말했습니다.


금동대향로의 받침대 부분. 연꽃무늬 위로 다양한 동물들이 새겨져 있다. 국립부여박물관 제공


추위 속 얼음장에서 사투

  1993년 12월 12일 오후 4시. 현장을 지휘한 김종만 학예연구사가 흙 밖으로 살짝 드러난 향로 한 귀퉁이를 처음 발견했습니다. 능산리사지 서쪽 공방터 안 물웅덩이에서 금속편이 살짝 노출된 겁니다. 너비 90cm, 깊이 50cm의 웅덩이에는 오래전 지붕이 무너져 내려 기와조각과 물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김 연구사를 비롯한 조사원들은 인근에서 나온 금동광배의 조각으로 알았습니다. 당직을 서기 위해 박물관에 돌아온 김 연구사로부터 보고를 받은 신 관장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발굴현장으로 향했습니다.


  4시 40분경 현장에 도착한 신 관장이 조각을 찬찬히 살펴봤습니다. 그의 회고. “그해 봄 근처에서 출토된 불상 광배 조각이랑 비슷했어요. 그때만 해도 향로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지….”
  그는 인부들을 퇴근시킨 뒤 엎드린 자세로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에 손을 담그고 기와를 하나씩 빼냈습니다. 너비가 1m도 안 되는 좁은 구덩이라 혼자 작업해야만 했죠. 웅덩이 안에서는 물이 계속 솟구쳐 올라 종이컵으로 물을 퍼내고 스펀지로 물기를 계속 훔쳤습니다. 유물이 다칠 것을 우려해 연장 없이 맨손으로 기와조각을 제거하다보니 시간이 꽤 걸렸습니다. 추운 겨울 저녁, 찬물에 연신 손을 담그고 작업하다보니 손끝의 감각이 둔해졌습니다. 그날 오후 8시 반, 3시간여의 고된 작업 끝에 드디어 향로 뚜껑과 받침의 윤곽이 드러났습니다. “현장에서 뚜껑과 받침을 대충 결합시켰는데 이걸 보고 누군가 박산향로 얘기를 하더라고. 혹시 중국 수입품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밥맛이 싹 사라집디다.”


  그날 발굴단은 수습한 향로를 박물관으로 옮겨놓고 세척에 들어갔습니다. 데운 물에 면봉을 묻혀 구석구석 닦아냈습니다. 진흙탕에 있을 땐 미처 보지 못한 정교한 장식들이 눈에 들어오자 조사원들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흘러나왔습니다.

고고학 유튜브 채널 <발굴왕>에서 금동대향로 발굴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시청하실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o8Fmnm4-mS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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