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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나다앨리 Apr 10. 2020

미니멀리스트의 유일한 사치
: 내가 꽃을 사는 이유

미라클 모닝 9일 차


국민학교 시절 엄마는 꽃집을 하셨다.





그리고 나는 왠지 그게 부끄럽고 싫었다.

지금 그때로 되돌아가 이유를 생각을 해 보니

우선 학교에 다녀와서 텅텅 빈 집이 싫었다.

따뜻한 품으로 잘 다녀왔냐고 안아주는 엄마,

맛있는 간식을 해서 기다리고 있는

그런 엄마를 원했다.




다음으로는 남자아이들의 놀림이 싫었다.

남자아이들은 하나같이 제목은 모르겠지만

"꽃집의 아가씨는 예뻐요~

그렇게 예쁠 수가 없어요"

하는 노래를 부르며 나를 따라다니며 놀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관심의 표현이었던 것 같은데

어린 마음에 우리 엄마가 꽃집을 하기 때문에

내가 놀림을 당한다고 생각을 했다.








엄마는 꽃에 대한 애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엄마의 삶은 늘 바쁘고 치열했다.

꽃 가게는 상가 마트의 엘리베이터 옆이었는데

어쩔 때는 내가 과자를 사고 지나가더라도

정신없이 꽃을 만든다고

나를 못 본 적도 있었다.




꽃 손질을 하다가 계속 손을 다치는지

늘 손가락에는 골무나

대일 밴드를 하고 있었다.

지금에 와서야 어렴풋이 생각이 나는 것이지

그때만 해도 엄마의 상처 따위는

보더라도 아픈 줄 모르는 

철없던 어린아이였다.




꽃은 사진 찍는 용도라고만 생각했던 그때 (2012 미국, 샌프란시스코)




어버이날이었던 걸로 기억난다.

늦게 일을 마치고 들어온 엄마는

앞치마 호주머니에 넘치도록 담긴

천 원짜리들을 꺼내어 세면서 행복해하셨다.

전날 밤새 만드신 카네이션이 잘 팔린 듯했다.




하지만 나는 같이 기쁘기는커녕

차라니 엄마가

슈퍼를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내가 좋아하는

과자라도 마음껏 먹을 수 있지

꽃은 나에게 아무 필요가 없는 물건이었다.

엄마가 돈을 버는 단지 그 수단,

나의 기억 속에 꽃은 그런 것이었다.








제일 받기 싫었던 선물 = 꽃




그런 이유에서 나는 성인이 되어서도

꽃에 대해서는 무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 어떤 특별한 감정도 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지긋지긋하고 멀리하고 싶은 존재였다.

그렇기에 데이트 선물로 받은 많은 꽃들은

그 수명을 다 하기 전에

쓰레기통으로 버려졌다.




캐나다에 와서 임신중독증으로 입원을 하고

출산을 하기까지

가장 많이 받은 선물이 꽃이다.

와주심과 마음 주심에 감사하기는 했지만

'꽃은 한순간일 뿐인데

차라리 아기 옷이 낫지 않나?'

라는 솔직한 마음과 함께 돈이 아까웠다.







그러다 몇 년 전 한 목사님께서

내 머리에 경종을 울리는 말씀을 하셨다.

아프리카에 봉사활동을 가서 꽃을 심고 있는데

그곳 사람들이 하나같이 불만 가득한 얼굴로

"도대체 먹지도 못하는 꽃을 왜 심는 거예요?"

라고 말을 했다는 것이다.




나와 달리 어릴 때부터 꽃을 좋아하던 아이들 (2017 몬트리올, 앙그리뇽 파크)




의식주의 해결조차 힘든 생존 위기의 그들에게

그 꽃을 보면서 희망을 가지기를 바랐지만

그렇게 할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부끄럽지만 나도

정확히 그들과 같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내가 그들과의 다른 점은

나는 물질을 통한 풍요는 누리고 있으면서

정작 정신적, 마음의 풍요는

누리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

물질은 풍요하지만 

마음은 가난한 사람이었다.

엄마가 꽃집을 했기 때문에

꽃이 지겹다는 핑계를 댔지만

실제로 꽃의 아름다움을 느낄 만한

삶과 마음의 여유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그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난 후

마음과 생활의 여유를 가지려고 노력했고,

특히 꽃이 일상화된 캐나다 사람들을 보면서

나의 삶 또한 변화하기 시작한 것 같다.







꽃이 일상의 한 부분인 캐나다의 사람들 (2017 몬트리올)



마트에서 장을 보고 줄을 서 있을 때 보면

카트에 꽃이나 화분이

안 담겨 있는 사람이 잘 없다.

그리고 그렇게 꽃을 산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이 아닌 본인 자신을 위해서

꽃을 사는 것이다.




인간은 환경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주변 환경에서 보고 느끼는

에너지가 영향을 미쳐

결국 나도 비슷한 모습으로 만드는 것 같다.



이런 환경의 변화 때문이기도 하고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이기도 한 것 같다.

어느 순간 나는 점점 꽃이 좋아지고 있다.

그리고 자주는 아니지만

이따금 나를 위한 꽃을 산다.

아직도 꽃을 살 때

좀 망설여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꽃을 과감하게 사서 집으로 오는 그날부터

꽃잎이 다 지는 그날까지 기분이 좋아진다.




특별한 날, 중요한 날이

떠올려지는 것이 꽃인데

그 꽃이 내 집에 예쁘게 꽂혀있으니 반대로

평범한 일상이 왠지 특별해지는 느낌이 든다.

이보다 저렴하게 누릴 수 있는 사치는 없다.

그래서 미니멀리스트로서

유일하게 사치하는 물건이기도 하다.






특별한 날이 아니라도 꽃을 사고, 특별한 날이 아니라도 케이크에 불을 켜 보자. 특별한 날이 될 것이다. (2017 몬트리올, 평범한 하루가 특별한 하루가 되던 날)




우리가 꽃을 사는 이유,

꽃은 반드시 사야 할 생필품은 아니다.

하지만 마음과 정서를 채워주고

우리의 삶에 희망을 주는 고마운 존재이다.




코로나 여파로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있는 봄,
그리고 우리들의 지친 마음,
오늘은 나를 위한 꽃을 사서
힐링해 보는 것은 어떨까?




오늘 남편이 퇴근해서 돌아오면

오랜만에 나를 위해 꽃을 사러 나서 봐야겠다.






@캐나다앨리

<미라클 모닝 9일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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