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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난 Jul 03. 2023

내 그림이 도서관 한편에 걸렸다.

공무원을 그만두고 드로잉을 배워보았다.

'작품 전시회'라고 하면 너무 거창하고, 도서관 드로잉 수업에서 그렸던 그림 중에 하나가 도서관 자료실 한편에 걸렸다. 


13명의 드로잉 수업 신청자가 3월 첫 주부터 5월 마지막주까지 주 1회 2시간씩 도서관에서 드로잉을 배웠다. 그림동아리 활동을 하거나 그림전공자 출신인 사람이 반. 중고등학교 때 이후로 그림 그려본 적 없는 사람이 반. (나는 후자였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다거나 평소에 그림에 관심이 있다거나 한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드로잉 수업을 신청하게 된 건,

1) 이제 나는 퇴직자니까.

2) 시간이 많고.

3) 그동안은 일하느라 참여할 수 없었던 무료강좌는 뭐든 듣겠다는 욕심(혹은 욕구불만의 해소)


저 모든 게 뒤섞여 아무튼 뭐든 다 해보겠다는 의욕뿜뿜의 마음이었다.



https://blog.naver.com/uuunan/223039102486



매주 수요일 오전 10시에 도서관에서 만나 미술치료사쌤의 지도하에 미술 이론을 조금 배우고 쌤이 내주시는 미션으로 그림을 그렸다. 


전문가가 아니니 내가(우리가) 능숙하게 그림을 그릴 수 있을 리 없었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저렇게 그리기에 필요한 이론들을 가르쳐 주시기는 했지만 '못 그려도 된다. 편하게 그리라.'고 하셨다.


수업 2시간 동안 각자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수업 끝나기 전 10분간은 다 같이 서로의 그림을 돌려보며 감상을 나눴다. 그림 그리기도 좋았지만, 나는 그 감상의 시간이 좋았다. 같은 그림을 그리면서도 모두의 그림은 하나같이 다 달랐다.


누가 더 잘 그리고, 누가 더 못 그리고가 아니라, 

"이 그림은 이 부분이 좋고"

"저 그림은 저래서 좋고"

"이 그림은 색 표현이 남다르고"

"저 그림은 묘사가 좋고"

선생님의 칭찬이 나를(우리를) 춤추게 했다. (역시 미술치료사셔서 그런지 사람 심리를 잘 아시는 것 같다. ㅎㅎㅎ)


처음에는 수업시간에만 조금씩 그리다가 점점 완성도가 필요한 그림을 그리게 되면서 2시간 안에 완성하기가 어려워서 집에 와서도 그리고 밤늦도록 새벽까지도 그리고 어느 순간 그렇게 되었다.


처음에는 연필로 작은 정물부터 그리다가 색연필로 색칠도 해보고 또 그러다가 풍경으로 넘어가고 펜 스케치에 수채화물감까지 더해졌다.


https://blog.naver.com/uuunan/223078783708


'미술'하면 맨날 숙제로 억지로 그렸던 기억 때문에 '어렵고 재미없고 귀찮은 것'이라고 각인되어 있었는데 나의 의지로 선택한 그림 그리기는 너무 재미있었다.

잘 그리고 싶었다.


수채물감이 도화지를 번질 때의 설렘

바탕색 위에 좀 더 짙게 색이 더해질 때의 쾌감

내가 원하는 느낌으로 결과물이 나왔을 때의 만족감

물감이 도화지에 스며들 듯 나도 그림 그리기에 편안하게 스며들었다.


한동안 나무 그리기에 심취했었다.


나무 그리는 걸 연습하다가 2시간 내내 나무 사진, 나무 그림을 관찰하다 보니 나무라고 다 같은 나무가 아니고, 한 나무에서도 색이 다 다르고, '나무'의 한 뭉터기 안에서도 빛에 따라 음영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동안은 그냥 '나무가 나무지, 뭐 별거 있나.'라고 생각했었다. 아니, 나무에 대해 따로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러고 나서 집에 오는 길에 길가에 보이는 나무가 그 이전과는 다르게 보여서 잎 하나하나 나무 하나하나가 너무 생생해서 혼자 감동하면서 길을 걸었던 기억들...














드로잉 수업 단톡방에서 이 이야기를 했는데 그날 선생님이 인스타그램에 올리셔서 나도 기분이 좋았다. (선생님도 제 마음을 뜨겁게 해 주셨어요!)




마지막 수업 때는 그동안 그렸던 그림들 중에서 하나를 골라 직접 액자에 넣었다.

3개월간 드로잉 수업을 하면서 느꼈던 감정들을 다른 수강생들과 함께 나누었다.



액자에 끼워서 모아놓으니 그럴싸했다.



그리고 며칠 뒤 도서관 자료실의 한쪽 벽면에 우리의 그림이 전시되었다. 사서선생님이 전시된 사진을 찍어서 단톡방에 공유해 주셨다.


오늘 아이와 함께 그 그림들을 보러 도서관에 다녀왔다. 집 근처 도서관이 아니라서 버스 환승해서 두 번타고 다녀왔다. (전시된 그림을 직접 보겠다는 열정!)


액자에 담긴 그림은 실제 그림보다 꽤 멋져 보였다. 


그림을 그려보니 내가 그리려는 대상이 평소와는 완전 다르게 보였다. 더 애정이 가고, 하나하나 그렇게 이뻐 보일 수가 없다. 물감이 도화지에 번져나갈 때 뭔가 정확히 알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 의무적인 그림이 아닌 자발적 그림 그리기의 효능감이라고 해야 하나...


3개월간의 행복했던 여정이 마무리되었다.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의무감없이, 의도 없이, 마음 가는 대로 그림 그리고 싶을 때 그려야지.

(수업 끝나고 나서 그림을 한 번도 안 그린 건 아무도 몰랐으면 좋겠다.)






3개월간의 드로잉 수업 끝.

이른 퇴직자의 6개월도 순삭.

벌써 7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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