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위한, 무엇을 지키기 위한 고민 Netflix original
두 교황의 담담하면서도 열정적인 토론이 신선한 영화였다. 품격 있는 싸움이 무엇인지 잘 보여주는, 입체적인 영화였다고 생각한다. 영화내내 “종교는 어때야 하는가”라는 추상적인 질문을 종교를 대표하는 교황의 모습을 통해 답한다. 토론을 형식을 통해 2가지 문제에 대한 고민과 영화나름의 해결책을 제시한다.
1. 성 소수자 등 보수적 카톨릭이 비정상으로 규정했던 존재에 대한 21c 카톨릭의 답은 무엇인가?
2. 독재자의 억압 속에서 종교의 역할은 진취적이며 진보적인 정의를 관철시키는 존재인가?
아니면 그 안에서 중립성을 유지하며 약자를 보살펴야 하는가?
개인적으로는 영화가 개연성 있는 나름대로의 해석을 통해서 교황청 내부 비리 사건을 다루는 방식이나, 질문을 풀어나가는 방식이 마음에 들어, 2020년 들어서 본 영화 중 최고라고 생각한다. 특히 두 가지 질문에 있어서 첫번째 질문은 두 교황의 대립으로, 두 번째 질문은 각 교황의 내면의 갈등으로 보여주는 방식이 너무 좋았다.
첫번째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은 종교의 기원에 있다고 생각한다. 카톨릭은 로마제정의 차별을 받던 유대인들 중에서도 예수를 비롯한 일부 종교인들이 유대의 전통적인 교리를 벗어나 약자에 대한 구원, 자비와 사랑을 강조하면서 시작했다. 21c에 종교가 설 자리가 어디인가? 라고 묻는다면 내 답은 고민없이 위로가 필요한 사람,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 의지할 무엇인가가 필요한 사람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간 카톨릭은 위상과 위신, 지위에 집착해 권력과 책임을 혼동하고, 진정한 위로보다 형식적인 기도를 강조하며, 필요로 하는 곳에 있던 시간보다, 원하는 곳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믿음은 종교를 믿는 사람들로부터 오는 것이다. 신이 믿음을 부여하여 정당성이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의 믿음이, 각자의 모두 다른 기대감이, 욕망이 아닌 위로를 바라는 그 마음이 종교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두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조금 더 고민이 필요하다. 이 문제는 교황과 종교에 대한 문제가 아닌 인간의 내면적인 의식 차원의 문제에 더 가까운 느낌이다. 영화에서 프란치스코 새 교황은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너무 많은 사람을 잃었음을 자책하며, 자신의 부족함을 탓했다. 나는 이 문제를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본다. 누군가는 싸워야만 했으며, 누군가는 그들의 일시적인 투쟁의 유약함을 알고 더 많은 사람을 지켜야 하기에, 싸우는 사람들에게 제동을 걸어야 했으며, 또 누군가는 그 둘을 중재해야만 했다. 종교 지도자가 이러한 경험을 갖는 것이 과연 문제가 되느냐는 질문은 적어도 나에겐 아무 의미가 없다. 위와 같은 내면갈등과 죄의식의 경험이 없다면 이러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을 종교로서 위로하면 되는 것이고 이러한 경험이 있다면 경험을 가진 한 사람으로서 위로하면 되는 것이다. 나는 영화의 주제의식은 종교지도자의 죄 지은 과거가 아니라 결국 종교 지도자들도 인간이라는 데에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죄를 짓는다. 모든 죄를 용서하는 하느님은 그 연장선에 있는 것이다. 죄를 지은 인간은 괴로워한다. 종교 지도자들도 마찬가지다 피해자와 가해자는 있어도, 종교 앞에 영원한 죄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종교의 존재 의의이자, 아무리 종교가 발전하고 진보적으로 변해도 바뀌어서는 안될 황금률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바탕으로 두번째 질문에 대한 답을 할 수 있다. 투쟁을 통해 정의를 관철시키는 것도 사람, 중립을 유지하며 약자를 보살피는 것도 사람이다. 종교는 그들 모두에게 위로의 수단이다. 영화에서도 나름대로의 답을 제시한다. 화해한 동료와 포옹하고, 화해 못한 동료의 남은 제자들은 위로와 사랑을 말하는 강연에서 쫒겨난다. 종교는 화해의 수단이고 내면의 갈등은 다른 의견과 다른 사람을 이해하게 하는 조금은 불편한 전제조건이며, 죄의식은 조금 더 나아지기 위한 원동력이다. 물론 반성없는 발전은 없다. 또한 종교적 차원의 용서가 사회적으로, 법적으로 죄를 없애주지는 못한다. 종교를 핑계로 반성과 피해자에 대한 사과 없이, 스스로 편안한 가해자의 모습은 어느 누가 봐도 바람직한 모습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