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따뜻한 햇살에 이끌려 베란다 앞에 섰다. 온몸으로 우주의 따뜻함을 끌어 안으며 여기에도 의자가 하나 필요하겠구나 싶어 거실에 있던 의자를 냉큼 가져왔다. MK TV에서 처음 보았던 고미숙 선생님, 고전평론가 ᛫ 작가로 활동하고 계신 그분의 세계로 사심없이, 넓고 깊게 그물을 치며 접속했다.
이 우주는 어떻게 처음 생겼을까?
왜 하필 나는 지구별에 떨어졌지?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까?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건 뭘까?
사춘기도 아니고 사십대를 살아가는 나는 존재의 GPS를 찾아 몇년째 길을 헤매고 있다.
현재의 삶이 마냥 충만하고 행복하다면 이런 근원적인 질문을 하며 사유할수 있을까? 길 위에 서서, 읽는 행위를 통하여 그 존재의 거룩함은 진즉 온몸으로 깨달았으나, 쓰는 통쾌함은 또 어떨까 궁금해졌다.
읽기와 쓰기는 분리될 수 없고 하나라고 한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이해되지 않았지만 계속 읽기만 하던 어느 순간 쓰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왜그럴까 한동안 생각해 보았는데 읽기의 연장선에 쓰기가 있음을 깨달았다. 읽기의 즐거움에서 휘발되어 사라지는 명문장들을 안타까워 하며, 잡아 놓지 않으면 더이상 안되겠다 싶어 쓰기 시작했다. 처음 쓰기는 나에게 고민과 번뇌를 안겨 주었다.
커서만 깜박깜박...서평 하나 쓰는데도 왜 그렇게 힘들지? 처음부터 잘쓰고 싶은 욕망 때문일까? 무슨 말을 써야할지 생각이 나질 않는다. 첫문장을 시작하기가 이렇게 힘들줄이야...읽는 것보다 에너지가 몇배는 더 필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든 여정을 지속하는건 다른 사람의 언어가 아닌 나의 언어를 통하여 새롭게 탄생한 하나의 작품(?)을 마주하는 설렘 때문일 것이다.
통쾌하다는 말을 이럴때 쓰는 걸까? 서툴지만 내 몸 안에서 무언가 발산하는 기쁨, 통쾌함이란 단어가 적절하다 싶다. 이 영역도 계속 지속하다 보면 좀더 편해지고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도구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책은 이론편과 실전편으로 나뉘어져 있다. 읽고 쓴다는 것이 인간에게 어떤 의미이고, 본성과 쓰기의 관계는 무엇인지 칼럼, 리뷰, 에세이, 여행기의 실전적 훈련을 통하여 알려준다.
인간이 태어나 두 발로 서서 온전히 자립하려면 나만의 비전과 지도가 필요하다. 아무 생각없이 산다면 동물과 무엇이 다를까. 호모 사피엔스의 후예로 살아가는 우리는 생각과 문자를 통하여 지금의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다. 생각의 크기가 곧 존재의 크기라 한다. 무지로부터 벗어나고 나의 생을 잘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세상을 탐구하며 나아가는 힘이 필요하다. 그것을 위한 구체적인 행위가 읽기와 쓰기다.
문자가 생기기전 우리 인류는 기억의 조각들을 언어를 통하여 후대 사람들에게 전달하였다. 사건 또는 사실이 변형되기도 하고 소멸되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문자의 탄생은 언어를 불멸적인 상태로 만들었고, 그것을 읽고 사유하는 사람들이 인류를 폭발적으로 성장시켰다. 그러나 그 옛날 특권층에만 부여되었던 읽고 쓰는 것이 이젠 그들만의 전유물이 아닌 세상이 되었다. 문자를 통하여 세상의 온갖 소식을 듣고, 전하며, 사람들과 연결된다.
쓰기 위해 읽기 시작했을 때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듯하다. 쓺으로써 기억이 좀 더 보존되고, 작가의 주장에 나의 생각을 보태어 새로운 문장을 만들어 낸다. 삶의 방향을 바꾸고 힘든 일이 생겼을때 일어설 수 있는 내면의 힘이 생긴다. 존재의 외연이 확장된다. 쓰기가 이런맛이구나. 약간의 고통을(?) 수반한 통쾌함, 후련함..또다른 연결점.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노동과 관계의 스트레스로 하루 하루가 힘들다. 욕망과 능력의 거리를 좁히지 못해 현실을 외면한채 즉흥적인 쾌감만을 따라간다. 순간은 즐겁지만 근원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후회한다. 쌓인 감정을 배설할 곳이 필요하다. 가족이라고 아무렇게나 감정을 쏟아내면 상처만 받을 뿐이다. 읽고 쓰고 듣고 말하고..우리 인간의 신체는 이 모든 것을 원한다고 한다. 감정의 출구를 찾아 분출하고 마음을 다스리고 싶을때, 순간적인 욕망의 불꽃을 끄고 무지로부터 해방되고 싶을때, 우정과 지식의 네트워크에 접속하고 싶을때 우리는 읽고 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