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문학의이해 강의 에세이
본전공이 사회학인 나는, 이번 2020-2학기부터 국어국문학과 복수전공 승인을 받았다. 소영현 교수님의 한국문학과문화읽기 수업, 정과리 교수님의 문학이란무엇인가 수업 등을 들으며 언어와 문학에 대한 흥미를 갖게 된 것이다. 두 수업에서 주로 다루었던 것은 현대(근대)문학이었다. 나는 문학 작품, 특히 좋은 문학 작품을 읽을 때마다 그것을 읽기 전의 삶으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깨달음을 얻었다. 나는 그 깨달음이 좋았다. 그 깨달음은 과거의 나, 나의 편협한 세계를 부수고 새로운 나, 새로운 세계를 마주하게 해 주었다. 자기의 쇄신, 정도의 표현이 적합하려나. 이처럼 나의 문학에 대한 흥미는 현대문학으로부터 시작하였다. 현대문학은 당연하게도 ‘현대(근대)’ 도래 이후의 삶을 이야기한다. 나 역시 현대(근대)에 살고 있기에, 현대문학의 이야기들은 내게 강한 울림으로 찾아왔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국어국문학과 수업을 듣게 된 나는, 현대의 문학이 아닌, 고전문학에 대해서도 공부하게 되었다. 물론 대학 진학 전에도 교육과정에 따라 몇몇 고전문학 작품들을 접한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나는 고전문학의 인물들, 화자들, 주제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때로는 비장하거나 대담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종종 답답하고 미련하게 느껴지기도 하였다. 좀 더 간결하게 말하자면, 근대를 살아가고 있는 나의 시각으로 본 그들은, ‘전근대적’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전근대성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과연 무엇인지 의문을 가졌다. 당시 나에게, 고전 문학은 근대와는 유리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느껴졌던 것이다.
그러나 고전문학과 근대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면서 다음과 같은 의문들이 들었다. ‘과연 근대는 근대성의 오롯한 소산인가?’, ‘근대를 구성하는 것은 근대성 만이 아니지 않은가?’, ‘만약 그렇다면 작금에 발생하는 여러 근대의 모순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단순히 근대성의 완전한 실현만이 그 모순을 완전히 해결할 수 있는가?’, ‘어쩌면 근대성 자체가 내적 모순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근대를 넘은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고 논의해야 하는 게 아닐까?’ 등의 의문들. 그런 의문들이 쌓여갈수록 오히려 하나의 생각이 분명해졌다. 그럴수록 우리가 살아가는 근대라는 것을 더욱 면밀히 살펴보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 명확한 분석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근대를 보았을 때, 나는 우리가 살고 있는 근대가 전(全)근대적이지 않으며, 전(前)근대적 요소를 상당히 많이 포함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우리는 전근대와 근대라는 개념으로 두 시대를 손쉽게 구분하려고 하지만, 과연 누가 그 일을 정확히 해낼 수 있겠는가? 나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내가 이 부정에서 좀 더 방점을 두고 싶은 곳은 ‘정확히’가 아니라 ‘해낼 수 있’다는 부분이다. 소위 전근대 사회라고 우리가 부르는 시대가 전적으로 전근대적 요소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살고 있는 근대 사회가 전적으로 근대적 요소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다. 한 시대는 전근대적 요소와 근대적 요소가 상존하고, 상호작용한다. 다만, 어떤 요소가 중심부에 속하는지에 따라 그 시대의 ‘주류’ 구성요소를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어느 날 나는 내가 사용하고 있는 음악 스트리밍 어플의 인기 순위에 올라온 곡들을 차례대로 들어본 적이 있었다. 일례로 한 곡의 가사를 인용해보겠다. 윤종신의 곡 〈좋니〉의 일부이다.
(전략)
좋으니 사랑해서
사랑을 시작할 때
니가 얼마나 예쁜지 모르지
그 모습을 아직도 못 잊어
헤어 나오지 못해
니 소식 들린 날은 더
좋으니 그 사람
솔직히 견디기 버거워
니가 조금 더 힘들면 좋겠어
진짜 조금 내 십 분의 일 만이라도
아프다
행복해줘
억울한가 봐
(중략)
난 딱 알맞게 사랑하지 못한
뒤끝있는 너의 예전 남자친구일 뿐
(후략)
과연 이게 근대적 주체로서의 태도인가! 〈좋니〉의 화자를 〈정읍사〉, 〈가시리〉, 〈아리랑(경기)〉의 화자가 보이는 태도와 비교해보라. 〈좋니〉는 내가 고3이었던 2018년 당시 몇 주 동안 음악 차트 1위를 기록한 곡이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좋니〉는 몇 백, 심지어는 천년도 더 된 고전 시가에서 보이는 미련의 태도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진정한 근대적 주체라 함은 이러한 미련과 자질구레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보다는 〈진달래꽃〉의 화자처럼 자신을 보전함과 동시에 상대를 붙잡는 사랑의 전략을 보일 여지가 더 크다. 그럼에도 결국 〈좋니〉가 사랑받았다는 사실은, 전근대적 요소가 여전히 오늘날에도 유효하다는 것, 심지어 꽤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일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는 이러한 것을 두고 “특정한 사회의 발전이란 도리어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이란 원칙에 따라 이루어지게 마련”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이 즈음에서 나는 모든 학문의 보편적 목적에 대해 생각해본다. 이제 2학년이 채 되지 않았으며 신촌에서 수학해본 적도 없는 학부생 나부랭이에 불과하지만, 내 짧은 식견이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모든 학문은 결국 현재의 ‘삶’을 더 잘 살아내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고전문학을 공부하는 일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결국 현재의 ‘삶’을 더 잘 살아내기 위해서는, 현재 속에 살아 숨 쉬는 과거의 구성 요소를, 그것의 역사적 궤적을, 그것이 오늘날의 중심부 요소와 맞닿는 지점을, 심지어 부단히 상호작용하는 양상을 연구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고전문학은 응당 그 핵심적 의제가 되어야 하리라. 오랜 시간을 거쳐, 말해지고 들리고 기록되기까지 한 언어는 그것을 향유한 이들의 삶으로서의 언어인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