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사량의 「빛 속으로」에서 드러나는 나와 타자의 문제를 중심으로 [1]
김사량의 「빛 속으로」는 최현식의 표현을 빌리자면, “소설 자체의 하중보다 훨씬 무거운 역사성과 현대성의 개입에 의해 그 의미가 심화, 확산되는 흔치 않은 작품이다.” [2] 이 말의 의미는 「빛 속으로」가 가진 고유한 특성에 비추어 이해될 수 있다. 「빛 속으로」는 재일 조선 작가 김사량이, 일본 독자를 대상으로 하여, ‘내지어內地語’로 쓴, 일제 식민주의를 비판하는 작품이다. 이런 특수한 배경 탓에, 김사량의 글쓰기에 대한 초기의 연구는 ‘친일이냐, 저향이냐’라는 관점으로 접근해왔다.[3] 이는 한국 사회의 민족주의의 어두운 이면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2000년대에 들어서며 탈식민주의의 연구방식이 적극 수용되며 바뀌었다. 윤대석[4], 이주미[5], 최현식[6] 등의 연구자들은 식민 통치 하의 이중언어사용, 아이덴티티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탈식민주의의 연구 방법 또한, 식민주의-탈식민주의라는 담론의 틀에 작품을 가둔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본고는 이러한 ‘무거운 역사성과 현대성’의 틀에서 벗어나, 소설 속 인물들 사이에 드러나는 미시적인 상호작용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권력의 통치술은 오히려 미시적 영역에서 가장 복잡하고 세밀하게 작동하는 까닭이다. 그런 개인들 간의 미시적 관계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차원의 문제가 바로 나와 타자의 문제이다.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사르트르의 말처럼, 분명 타자의 존재는 나에게 문제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타인의 존재는 나로 하여금 나라는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게끔 한다. 이렇게 나만의 자폐적 관점에서 벗어났다면, 다음에는 연대나 긍정적 상호작용의 가능성 또한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본고는 「빛 속에서」에서 그러한 가능성을 짚어보고자 한다.
본고는 우선 서술자 ‘나’의 관찰자로서의 지위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것이 타자(하루오, 이군)에 의해 깨지는 지점에 대해 짚어볼 것이다. 그런 다음 ‘나’가 하루오라는 타자에게 주었던 긍정적인 영향을, 당시 일제 식민 통치 상황의 문제와 관련하여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하루오—의 호명—에 의해 ‘나’라는 존재에 큰 긍정적 변화가 발생하는 지점까지 살펴보고자 한다. 본고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나와 타자라는 중요한 문제가 ‘나’와 하루오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극복되고 어떤 가능성을 제시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빛 속으로」는 1인칭 주인공인 ‘나(남/미나미 선생님)’의 시선으로 진행되는 서사이다. 그의 시선을 따라 이루어지는 관찰과 해석은 이 소설을 진행하는 핵심적 요소가 된다. 그가 주된 관찰 대상으로 삼은 것은 야마다 하루오이다. 이는 소설의 첫 구절에서부터 잘 드러난다.
내가 이야기하려고 하는 야마다 하루오는 실로 이상한 아이였다. 그는 다른 아이들 속에 휩쓸리지 못하고 언제나 그 주위에서 소심하게 어물거리고 있었다. 노상 얻어맞기도 하고 수모를 당했으나 저도 처녀 아이들이나 자기보다 어린 아이들을 못살게 굴었다. 그리고 누가 자빠지기라도 하면 기다리고 있은 듯이 야야 하고 떠들어댔다. 그는 사랑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또 사랑 받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보기에 머리 숱이 적은 편이고 키가 컸으며 눈은 약간 흰자위가 많아서 좀 기분이 나쁘다. 그는 이 지역에 사는 그 어느 아이보다 옷이 어지러웠으며 벌써 가을이 깊었는데도 아직 해어진 회색 옷을 입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그의 눈은 한층 더 음울하고 회의적으로 보였다. (25)
그는 관찰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그는 관찰 대상의 인물에 대해서 판단 또한 하고 있으며, 그 판단에 대해 꽤나 확신을 보인다.
물론 나는 순진한 이 군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지난날 내 자신이 그런 시기를 거쳐왔기 때문이다. (강조는 인용자, 51)
그는 곧 안심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훈훈하게 더운 이불 속에 다리를 펴며 목을 움츠려 보였다. 나에게는 그것이 각별히 애처롭게 보였다. 그는 눈을 번뜩이며 입가에 방긋 미소를 지었다. 나에게 완전히 속을 주었다는 뜻일 것이다. 나는 그의 내면세계에도 이런 아름다운 것이 숨어 있는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중략) ‘아버지의 것’에 대한 헌신과 ‘어머니의 것’에 대한 맹목적인 배척, 그 둘이 언제나 서로 싸우고 있을 것이다. 더욱이 몸을 빈궁 속에 잠그고 있는 소년이고 보면 순진하게 어머니의 애정 세계에 젖어들 수 없게 제지당한 것이 틀림없다. (중략) 그것은 나를 통해서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는 하나의 굴절된 표현임에 틀림없다. (강조는 인용자, 47-48)
그런데 타자에 대한 확신과 망설임 없는 서술에도 불구하고, 대조적으로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는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망설인다.
“물론 나는 조선 사람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나의 목소리는 예감이 앞서서인지 약간 떨렸다. 아마도 내 성이 마음에 걸렸을 것이다. (강조는 인용자, 30)
“무례한 소리 마오!” 나는 어찌된 일인지 발끈 성이 나서 소리쳤다. 나는 분명 그(이 군)의 출현에 당황했던 모양이다. (강조, 밑줄, 괄호는 인용자, 50)
그런데 나는 어째서인지 그 일(하루오의 어머니가 남편 한베에에게 폭행을 당한 일)을 진지하게 깊이 생각해 보려고 하지 않았다. 나 자신이 두려움에 압도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강조, 괄호는 인용자, 46)
그는 자신의 심리를 서술하면서 “걸렸을 것이다”, “당황했던 모양이다”, “있었는지도 모른다”에서와 같은 추측형의 서술을 빈번하게 나타낸다. 또한 “앞서서인지”, “어찌된 일인지”, “어째서인지”와 같은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특히 두 번째 문장에서는, “분명”이라는 확신의 의미를 담은 부사를 사용하면서도 추측형의 서술을 보인다. 이를 통해 그의 자신에 대한 망설임이 실은 의도적인 것, 즉 모르는 것이 아니라 ‘모르려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궁색한 자기 변명을 보이기도 한다. 그는 ‘남南’이라는 자신의 조선 성이 일본 식인 ‘미나미’로 불리고 있다는 사실이 처음에는 “몹시 마음에 걸렸(29)”다. 그러나 그는 “이런 천진난만한 아이들과 놀기 위해서는 오히려 그편이 나은지도 모른다(29)”고, 그러므로 “위선을 보일 까닭도 없고 비굴해질 이유도 없다고 몇 번이나 자신을 납득(29)”시킨다. 이처럼 그의 관찰자로서의 지위는 공고하지 않다. 위태롭다.
조선인 청년 이 군의 등장은, 이러한 관찰자 ‘나’의 지위가 위협받게 된 최초의 계기를 제공하는 사건이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아이들과 함께 떠들고 있는데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나의 학생이 들어왔다. 자동차 조수를 하면서 밤마다 영어와 수학을 배우러 오는 이아무개라는 건장한 젊은이였다. 그는 문을 닫자 싸움을 걸듯이 나의 앞을 막아섰다.
“선생님.” 그것은 조선말이었다.
나는 흠칫하였다. 아이들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지만 험악한 공기에 눌리어 그와 나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자, 있다가 또 놀자. 이제부터 선생님은 볼일이 있어서…”하고 나는 침착해지려고 애쓰면서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아이들이 고분고분 문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야마다 하루오의 눈길만은 유난스런 빛을 띠고 무엇을 알아내려는 듯이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나는 지금도 희미하게 빛나고 있던 그 눈을 잊을 수 없다. (29-30)
일방적으로 타자들을 관찰하는 나로서만 자신을 인식하고 있던 그에게, 타자들 또한 자신을 관찰할 수 있음이 드러난 순간이다. 관찰하는 나였던 그가, 타자—이 군과 하루오—의 입장에서 보면 관찰되는 타자로 전락한 것이다. 그가 관찰자로서 가지던 특별한 지위는 무너지게 된다.
이 절의 논의를 진행하기 전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이 군과 하루오는 모두 ‘나’에게 유의미한 타자이다. 그런데 소설의 전개에서 ‘나’에게 좀 더 비중있게 다뤄지는 존재는 하루오이다. 어째서 이 군보다 하루오와의 관계가 더 집중적으로 다뤄지는 것인가?
그 이유는 이 군과 하루오의 시선에 대응하는 ‘나’의 방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군은 나에게 어째서 조선인이 아닌 것처럼 행동하냐는 추궁을 당한다. ‘나’는 이 추궁에 대응할 근거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근거는 한베에에게 폭행을 당한 하루오의 어머니를 자신의 지인이자 또다른 지식인인 윤 의사에게 소개함으로써 마련된다. 이 군의 추궁에 대한 부채의식을 비교적 손쉽게 해소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하루오의 시선에 대응하는 문제는 한 번에 해소되지 못한다. 서사가 진행됨에 따라, 하루오와 그 사이의 깊은 상호작용을 통해 서서히 해소된다. 또한 (후에 이야기하겠지만) 그 상호작용 속에서 ‘나’ 자신의 존재에도 커다란 변화가 발생하게 된다. 이것이 하루오와의 관계가 더 중요하게 다뤄지는 이유이다.
‘나’는 하루오와의 관계를 통해 하루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게 된다. 하루오는 당시 일제 식민 통치에서 비롯된 여러 문제들을 나의 도움으로 극복하게 된다. 이를 살펴보기 위해 당시 식민 통치에서 비롯된 문제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 간단히 살펴보자.
첫째, 정체성의 문제이다.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이데올로기는 당시 조선인들에게 가장 일상적인 풍속의 하나였다. 내선일체의 계획에 따라, 신사참배(1937)→조선어 폐지(1938.4) →창씨개명(1940.2.11) →징병제 실시(1943) 등으로 이른바 황민화(皇民化) 정책으로 이어진다. … 「빛 속으로」에서 가장 중요한 풍속은 내선일체라는 강요적 이데올로기였고, 그 핵심은 창씨개명이다.”[7] 김응교가 잘 지적하고 있듯이, 당시 인물들은 일본의 동화 정책에 따라 일본인으로서 정체성을 강요받는 상황이었다. 둘째, 차별의 내면화 문제이다. 황호덕이 지적한 바와 같이, 일본은 “세계 식민사에서 유일하게 동일 인종, 동일 문화권을 동심원적 확장 방법을 통해 지배해 나간 국가이다. (중략) 동일 인종, 동일 문화권(한자 문화권)을 지배해야 했던 일본으로서는 식민자와 피식민자를 구별하는 매우 정교한 차별 논리를 생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8] 이러한 점은 피식민자들이 실제 생활 내에서 차별당할지도 모른다는 굉장한 압박감을 가지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이는 피식민자 내부에서도, 피식민자들이 차별과 식별의 논리를 내면화하여, 서로가 서로를 차별하고 식별하도록 만들었다. 셋째, 어엿한 주체되기의 문제이다. 이는 정체성의 문제와도 관련이 있다. 개인의 차원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긍정한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타자와 사회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 어엿한 하나의 주체로 인정받는 일은 개인적으로 이뤄질 수 없기에, 한 개인을 사회적 불구로 만들 폭력성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본고는 ‘나’가 하루오와의 관계를 통해 타자의 문제를 넘어서는 지점이 주된 내용이다. 하지만 하루오 또한 ‘나’와의 관계를 통해 타자의 문제를 넘어서게 된다. 이 점에 주목하여 하루오가 위의 문제들을 어떤 방식으로 극복하게 되었는지 살펴보자.
첫째, 정체성의 문제를 하루오는 어떻게 극복하는가? 하루오 뿐 아니라 이 군과 한베에, 정순과 같은 인물들도 정체성의 문제로 인해 고민하고, 자기 나름의 대답을 내놓고자 한다. 이 군의 경우에는 조선인의 정체성을 고수하며, 동화 정책에 저항하는 전략을 택한다. 이 군은 자신이 ‘나’보다 차별받기 쉬운 직업을 가지고 있음에도, “하지만 난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샘도 내고 싶지 않으며 비굴한 시늉도 내고 싶지 않습니다(31)”라고 말하면서 저항을 고수한다. 한베에와 정순은 조선인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차별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동화 정책을 내면화하려 한다. 하루오는 가정환경의 영향으로, 한베에나 정순과 같이 조선인의 정체성을 부정, 심지어는 혐오하고 일본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내면화하고자 한다. 그러나 정순이 한베에로부터 폭행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이 사건 속에서 하루오는 어머니의 병문안을 가야 할지 여부를 두고 많은 내적 갈등을 보인다. ‘나’는 여기에서 그를 위로하고 감싸준다. 또한, 어머니의 병문안을 다녀온 뒤에 우에노 공원에 함께 가자고 말하기도 한다. 이를 통해 하루오는 ‘어머니의 것’에 대한 사랑을 더 이상 부정하지 않고, 어머니에게 썬 담배를 가져다주게 된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하루오가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자신의 것으로 선택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다만 혼혈로서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는 조선인의 정체성, ‘어머니의 것’을 부정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일제 식민 통치의 동화 정책을 내면화한 상태로 “고집스럽게도 침묵을 지키(36)”고, “아무리 다정하게 말해도 언제나 의심을 가지(36)”던 하루오가, ‘나’라는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자기 쇄신을 이루고 일제 통치의 정체성 문제를 어느 정도 극복했음을 보여준다.
둘째, 차별의 내면화 문제를 어떻게 극복하는가? 인물들은 차별의 피해자임과 동시에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한베에의 경우는 자신의 “패거리 중에서 ‘모자라는 놈’이라는 의미로 한베에라고(56)” 불림에도, 같은 피식민자이자 아내인 정순을 무시하고 무차별적인 폭력을 가한다. 이 군의 경우는 그 자신이 피식민자임에도 불구하고, 몸의 4분의 3은 조선인의 피가 흐르고[9] 있는 하루오의 “손목을 잡고 팔을 비틀(41)”거나, 격노하여 하루오의 “잔등을 힘껏 걷어 차(40)”거나, “저주를 받아라 악당 놈!(50)”이라고 폭언을 가하기도 한다. 이것은 피식민자들 간에도 조선인 대對 일본인이라는 이분법적 순혈주의에 기반하여 서로를 엄격히 식별하고 차별을 행하는 경우이다. 혼혈인 하루오는 이분법적 순혈주의의 경계에 위치한 인물로 차별의 대상이 된다. 이에 대한 방어 전략으로 그는 일본인의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조선인을 차별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차별 주체로서의 하루오의 모습은, 자신의 정체성을 조선인과 일본인 중 하나로 고정하지 않고 탐색을 지속함으로써 해소된다. 더 이상 그러한 정체성을 받아들이기 위한 차별적 행동 양식을 수행하지 않아도 되는 까닭이다. 또한 ‘나’는 하루오가 차별의 피해자가 되지 않도록 그를 감싸고 보호해준다.
셋째, 어엿한 주체되기의 문제를 어떻게 극복하는가? 인물들이 S협회와 같은 공동체를 만들거나, 일본인의 정체성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것은 사실 식민 통치 상황에서 어엿한 주체로 자리잡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다. 이 군이 새 자동차를 구입하고 “나도 마침내 제구실을 하게 됐(74)”다며 기뻐하는 것도 그 까닭이며, ‘나’가 자신이 ‘미나미’로 불리는 것을 묵인함으로써 조선인으로 비춰지지 않으려는 것도 그 까닭이다. 하루오는 ‘나’의 도움으로 차별적 행동 양식을 수행하지 않게 됨으로써, 타자에 대한 상시적인 불안과 경계를 거두게 된다. 그 결과 그는 많은 사람들 속에 있게 되고, ‘나’는 하루오가 “하루오인 동시에 지금은 내 곁에 있으며 또 사람들 속에도 있는 것(71)”에 “넘쳐나는 듯한 기쁨(71)”을 느낀다. 하루오가 많은 타자들 속에서도 여엇한 주체로 서게 된 것이다. 그 뿐 아니라 하루오는 무용가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사회 속에서 자리잡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출신이 남다르고 학대와 구박 속에서 짓눌리기만 한 한 소년이 무대 위에서 서로 엇갈리는 붉고 푸른 갖가지 빛을 쫓으며 빗발 속으로 춤추며 돌아(76)”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처럼 ‘나’는 하루오에게 상당히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런데 그럼에도 그의 모습에는 어딘가 석연치 않은 점이 존재한다.
그는 이제 완전히 나를 믿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나는 몰래 미소를 짓기만 하고 아무 말도 묻지 않았다. (강조는 인용자, 70)
우리는 3층까지 올라갔다. 거기서도 붐비는 사람들 속에 누비며 다시 5층인가 6층까지 올라간 우리는 식당의 한쪽 구석에 마주 앉았다. 하지만 우리 둘은 필요 이상의 말은 별로 하지 않았다. (강조는 인용자, 71)
소년은 어느새 새 셔츠를 갈아입고 넝마 같은 저고리를 꿍져 겨드랑이에 낀 채 휘파람을 불었다. 나는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그가 사랑스러워졌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긴 말을 할 수 없었다. (강조는 인용자, 72)
‘나’는 하루오가 “완전히 나를 믿고 있는 게 틀림없”고, 당대 근대 문화를 대표하는 백화점에 와서 하루오와 좋은 시간을 보내고,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그(하루오)가 사랑스러워졌”다. ‘하지만’ 그는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인가? 이에 대해 살펴보기 위해서는, 소설의 마지막 부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선생님, 난 선생님 이름 알고 있어요.”
“그래?”
나는 가볍게 웃어 보였다. “말해보려무나.”
“남 선생님이시지요?” 하고 말하고 나서 그는 겨드랑이에 끼웠던 웃옷을 나의 손에 쥐어 주며 기쁜 마음으로 돌계단을 뛰어내려 가는 것이었다.
나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가벼운 걸음으로 그의 뒤를 쫓아 계단을 내려갔다.
(강조는 인용자, 78)
마지막 부분의 ‘그제야’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그가 이 대화 이전까지는 무언가 안도할 수 없는 부분이 존재했다는 것, 그런데 이 대화를 통해, 특히 하루오가 그를 ‘남 선생님’이라고 부름으로써 그의 마음은 가벼워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루오의 호명이 그에게 가지는 의미에 대해 분석하면 앞서 제기된 의문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자신을 괴롭게 만든 타자였던 하루오에 의해 독선적이던 관찰자로서의 지위를 상실한다. 그런 그는 하루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다. 그 결과 나를 관찰 및 경계하고, 차별하던 타자인 하루오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데 성공한다. 자신을 “야 조선 사람!(33)”, “조선 사람, 바보!(35)” 등으로 호명하던 하루오는 이제 나를 “남 선생님”으로 호명하게 된다. 이것은 타자와의 접점을 향한 지향과 그에 대한 타자의 응답이 맞닿는 지점이다. 이것은 나(‘나’)의 실천에 의해 타자의 존재를 긍정적인 방식으로 변화시키고, 이제는 그 타자에 의해 나의 존재가 변화되는 경험이다 이것은 타자의 존재에 대한 부단한 노력을 통해, 그 자신을 “남 선생님”이라고 불릴 수 있는, 그럴 자격이 있는 존재로 만드는 일이다. ‘나’에 대한 하루오의 호명은 이와 같이 거대한 의미를 가진다.
「빛 속으로」의 ‘나’는 하루오와의 관계를 통해 나라는 감옥에서 벗어났고, 하루오라는 타자가 긍정적 존재로 변할 수 있도록 긍정적 영향을 미쳤으며, 그로 인해 자기 자신도 긍정적인 존재로 거듭나게 된다. 이러한 본고의 해석은 역사성과 현대성에 입각해 이 소설을 분석하던 기존의 접근 방식과는 다른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이다. 그런데 역사성과 현대성이라는 거대 담론 앞에서 나와 타자라는 개인 간의 문제는 일견 왜소하게 보일 수 있다. 본고는 이에 대한 나름의 대답으로 결어를 대신하고자 한다.
타자의 문제는 거대한 권력에 대한 저항이나 연대나 전지구적 협력 등의 커다란 변화를 추동하는 담론 이전에 반드시 이야기되어야 할 주제이다. 여러 타자들 사이의 문제를, 하나의 거대한 목표 아래 덮어두는 방식의 한계는 20세기에 무수히 드러났다. 그렇다면 우리는 개인 간에 최초의 문제가 발생하는 지점부터 근본적으로 성찰해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최초의 문제는 바로 나와 타자의 문제이다. 그런 점에서, 김사량의 「빛 속으로」가 일제 식민 통치라는 거대한 권력의 문제가 개인들을 지배하던 시기에 나와 타자의 문제와 그것의 극복 과정을 깊이 있게 다루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이전까지는 이에 대한 논의가 충분히 진행되지 않아왔다. 필자는 본고가 이에 대한 자그마한 불씨가 되길 바란다. 제언을 덧붙이자면 「빛 속으로」에서 드러나는 나와 타자의 문제가 실존주의와 앙가주망의 개념을 활용하여 분석될 수 있다면, 더 의미있는 연구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1] 김사량, 「빛 속으로」(1940), 『김사량 작품집』,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08, 25-78.
이하 본문에서 쪽수로만 표기.
[2] 최현식, 「혼혈/혼종과 주체의 문제」, 『민족문학사연구』 23권, 민족문학사연구, 2003, 139-164.
[3] 김석희, 「일본문학, 일본학: 김사량 평가사 –“민족주의”의 레트릭과 김사량 평가-」, 『日語日文學硏究』 57권 2호, 韓國日語日文學會, 2006, 191-207.
[4] 윤대석, 『국민문학론』 도서출판, 2006, 22-27.
[5] 이주미, 「김사량 소설에 나타난 탈식민주의적 양상」, 『현대소설연구』 19권, 한국현대소설학회, 2003, 225-240.
[6] 최현식, 위의 논문.
[7] 김응교, 「김사량 「빛 속으로」의 이름·지기미·도시유람」, 『민족문학사연구』 20권, 민족문학사연구소, 2002, 391.
[8] 황호덕, 「김사량의 《빛 속으로》, 일본어로 쓴다는 것」, 『내일을 여는 역사』 32권, 내일을 여는 역사, 2008, 138-148.
황호덕은 위의 인용문 뒤에서 ‘고쿠고(國語)’, 즉 일본어가 이러한 식별을 위해 사용되는 매개라고 밝히며 일본 식민주의와 일본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본고는 그보다는 피식민자들이 차별과 식별의 논리를 내면화하여, 서로가 서로를 차별하고 식별한다는 문제점에 더욱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9] 한베에가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에 태어난 혼혈이고, 정순은 순수한 조선인인 까닭이다.
김사량, 「빛 속으로」(1940), 『김사량 작품집』,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08, 25-78.
김석희, 「일본문학, 일본학: 김사량 평가사 –“민족주의”의 레트릭과 김사량 평가-」, 『日語日文學硏究』 57권 2호, 韓國日語日文學會, 2006, 191-207.
김응교, 「김사량 「빛 속으로」의 이름·지기미·도시유람」, 『민족문학사연구』 20권, 민족문학사연구소, 2002, 382~406.
윤대석, 『국민문학론』 도서출판, 2006, 22-27.
이주미, 「김사량 소설에 나타난 탈식민주의적 양상」, 『현대소설연구』 19권, 한국현대소설학회, 2003, 225-240.
최현식, 「혼혈/혼종과 주체의 문제」, 『민족문학사연구』 23권, 민족문학사연구, 2003, 139-164.
황호덕, 「김사량의 《빛 속으로》, 일본어로 쓴다는 것」, 『내일을 여는 역사』 32권, 내일을 여는 역사, 2008, 138-148.
본고는 연세대학교에서 진행되었던 현대사회와문학 강의의 중간 보고서로 제출된 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