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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호 Jul 03. 2022

가난과 우울

하미나,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 동아시아,2021

가난과 우울

하미나,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 동아시아, 2021 책 리뷰



# 맥주 한 잔을 마셨다. 안주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지갑에 있던 5,000원을 꺼내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잔 더 마시고 싶었지만, 그들과 함께 하고 싶었지만 그럴 돈이 없었다. 비척거리며 일어났다. 무엇보다 돈이 없다고 말할 용기가 없었다. 돈을 빌린다 해도 값을 능력이 없었다. 그것들이 나를 비참하게 했다.     
# 합주가 끝나고 모두 빵집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사람이 너무 많다고 중얼거리며 밖에 서서 기다렸다. 그들은 빵과 쿠키를 하나씩 들고 나왔고 그중 나이가 가장 많은 선배에게 잘 먹겠다고 인사를 했다. 따라 들어갔으면 내가 그 역할을 자처했을 터이다. 후배들에게 간식거리 하나 사줄 돈조차 없어서 핑계를 대고 밖을 서성이는 내가 한심스러웠다.      
# 심리 상담을 받는 비용이 한 시간에 10만 원 남짓이라는 안내를 받았다. ‘심리 상담이라고 해봐야 말을 들어주기만 하고 실질적인 효과는 없는 게 아닌가’하는 의심이 솟아올랐다. 나의 의지는 돈을 이길 수 없었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는 다짐 또한 돈 앞에서 너무나 쉽게 무너져 내렸다.     
# 자가면역질환을 앓고 있다. 아무 효과도 없는 약물치료와 광선치료를 받는 데에 한 달에 몇만 원에서 몇 십만 원의 돈을 주기적으로 십 수년간 썼다. 생물학적 제제를 처방받는 지금은 130만 원에 달하는 주사를 처방받고 있다. 산정특례를 적용받아 전체 비용의 10%만 내고 있지만 이 마저도 5년 적용기간이 끝나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정신과도 다녀야 하니 병원비로만 한 달에 20만 원 정도의 돈이 나간다. 여기에 심리상담비까지 더하면 고정 비용만 50만 원에 달한다.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라는 공포 혹은 무력감은 죽음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진다.      

 

그렇다. 가난과 우울은 밀접한 연관이 있다. 가난한 모든 사람이 우울한 것은 아니지만, 우울하면서 가난한 사람은 그 늪에서 빠져나오기가 더욱 힘들다.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을 쓴 하미나 작가 또한 “가난은 인간의 모든 측면을 좀먹는다. 단순히 돈이 없어서 밥을 못 먹는 문제가 아니다. 가난은 건강을 해치고 스스로 밥을 먹을 자격이 있냐고 묻게 만든다. 숨 쉬듯 절망을 느끼게 되고, 아무리 시도를 해도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된다. 무기력에 시달린다.(p.206)”라고 말한다.     


나 또한 그랬다.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질병들에 돈을 바치는 인생은 무기력만을 쌓아 올렸다. 돈을 벌기 위해 더 열심히 일할수록 정신건강이 악화되는 딜레마 또한 빠져나오기 힘들었다. ‘돈이 없다’라는 명백한 사실은 모든 시도를 원점으로 돌려놓았다. 긍정적인 사고를 훈련하고 인지행동치료를 해보았지만 돈 앞에서는 파도 앞의 모래성과 같았다. ‘이것들이 다 정신승리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라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우울증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마저도 우울증의 흔한 인지왜곡이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말이다.     


뇌 깊숙이 자리 잡은 가난의 경험은 ‘이 모든 게 돈 때문이다’라는 또 다른 인지 왜곡을 만들었다. “작곡 실력이 늘지 않는 건 내게 미디 데스크를 사고, 강의를 듣고, 레슨을 들을 만한 충분한 돈이 없기 때문이다.”라던가 “안정적인 수익만 생기면 내 인생이 행복해질 것이다”라는 생각을 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돈을 들여 장비를 사고, 강의와 레슨을 들으며 돈이 아닌 내 안의 자존감과 효능감 부족이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무력감은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돈에 대한 결핍이 모든 문제를 돈으로 환원시키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문제는 정신질환을 치료하는 데에는 실제로 시간과 비용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돈이 있다면 고민을 조금 덜 수 있으며, 조금 더 효율적인 치료방법을 택할 수 있다는 건 엄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돈도 에너지도 없는 우리는 덜 쓰고 덜 버는 편을 택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사람들과의 관계 또한 무너지게 된다. 사람들과의 만남에는 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들이 나와 가깝고 친근한 관계라 하더라도 돈이 없어서 쓰지 못하는 상황은 자존감을 떨어트릴 수밖에 없다. 있는데 내지 않는 것과, 정말 없어서 내지 못하는 건 천지차이다.     


이에 작가 또한 “반복되는 가난은 공동체가 베푸는 호혜마저 두렵게 만든다. 호혜를 되돌려 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에도 정말 돈이 없을 때는 타인의 도움을 받기가 어려웠다. 그것을 갚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또한 도움이 절실했기 때문에 그 상황이 너무나 수치스러웠다.”라고 덧붙인다. 사실이다. 나는 우울과 불안장애를 함께 겪으며 적극적으로 사회에 들어가 일원으로 기능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없는 경험을 반복했다. 그 사이에서 어떻게든 돈을 벌 방법을 궁리했고 불안정한 수익과 가족의 도움으로 지금까지 살아남아 있다. 그리고 살아있다는 이유로 죄책감과 불안에 시달린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경제적 상황에 대한 공포는 증폭되고 있다.     


작가가 인터뷰한 ‘리타’ 또한 책 속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제일 무서운 건 이런 거예요. 지금까지 겪었던 것보다 더 최악의 가난을 만날 수 있잖아요. 그때, 가난 앞에서 내가 배운 것들, 이렇게 가난에 대해 해석하고 이야기 나눈 것들이 아무 쓸모도 없어지면 어떡하지? 나는 가난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바꿀 수 있어. 하고 느꼈던 것들이 사실은 아무 효력이 없다면? 정신승리일 뿐이라면? 자기 경험에 대해서 말할 수 있었던 능력들이 끝장나는 가난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드러나면 어떡하지? 그게 엄청 두렵습니다.(p.217)”


나 또한 우울과 불안 앞에서 나의 세계를 몇 번이고 해체하고 다시 세우기를 반복하고 있다. 이런 지난한 과정 속에서 나의 과거를 감싸 안기도 하고, 분열되어 있던 사건이나 자아를 통합하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때로는 오히려 더 혼란스럽고 불안하고, 초조한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게 다 쓸모없다면? 그리고 그 이유가 가난에서 기인한다면?’ 생각만 해도 무서운 일이다. 그리고 가난에 대한 예기불안은 현실에 발돋움할 수 없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놓치지 않아야 하는 것은 우울은 개인의 문제에 국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작가가 제니퍼 실바의 책 『커밍 업 쇼트』를 언급하며 지적하듯 “가난으로 인해 주택 구입, 결혼 등과 같은 전통적인 방식으로 자립이 불가능해진 청년들이 ‘개인적인 자아의 성장’에 집중(p.218~219)”하는 추세다. 이로 인해 “청년들이 시장과 국가 같은 강력한 제도를 변화시키는 대신,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데에 치중”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울의 문제도 사회가 아닌 ‘내 탓’에 치중하게 되기 마련이다. 모든 게 ‘내가 무력해서’, ‘노력하지 않아서’, ‘다른 사람보다 내가 부족해서’라고 생각해버리면 사회가 아닌 개인만을 반복해서 지적하게 된다.   

   

하지만 작가가 인터뷰 한 한국 “여성들 중 누구도 우울을 온전히 개인의 문제로 보지 않(p.219)”는다. 여기서 희망을 본다. 우울한 사람에게 ‘의지의 문제’라고 지적한다던가 ‘배가 불러서 하는 소리’라는 등의 지적이 이어지는 사회는 분명 문제가 있다. 타인의 삶을 단편적으로 단정 지어버리고, 정상과 비정상으로 구분해버리는 이상 개인이 노력해도 우울에서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우울의 온전히 개인의 문제라면 ‘비정상’인 개인이 ‘정상’의 범주에 들어올 때까지 자기를 단련하고 ‘교정’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스스로와 타인의 인정을 받아 ‘정상인’이 되어야 ‘완치’되는 사회라면 우울은 영원히 존재할 수밖에 없다. 불완전한 사회에서 낙오자는 항상 발생할 수밖에 없고, 그런 평범한 인간들을 ‘비정상’으로 규정해버리곤 했으니 말이다.     


시대의 우울을 경험한 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여성들)은 “우울을 둘러싼 다양한 원인과 맥락들을 인지(p.219)”하고 있다. 그렇기에 조금 더 예민하고 섬세하게 접근해야 하는 사회 문제들을 포착해낼 수 있다고 본다. 나 또한 나의 사연을 적으며 검열하게 되는 이유는 나의 이야기가 ‘불행 배틀’로 이어지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의 말처럼 “모두가 피해자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곳에선 어디로도 나아갈 수 없다(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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